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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아이

수남, 채령의 집에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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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에 다녀오던 곽 씨는 불빛에 비친 수남을 처음 본 순간 채령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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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남의 아버지는 돈을 붙여 내놓아도 주워 가지 않을 딸년을 논 서 마지기에 사 간다고 하자 어안이 벙벙했다. 수남이 태어날 때 남다른 징조가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으나 죽은 아이들까지 합쳐 자식이 열이나 되는 탓에 어느 기억이 수남의 것인지 헷갈렸다. 집에서 수남이 태어나던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수남 자신뿐이었다. 수남 또한 그게 자신의 기억인지 큰언니한테 들은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른 봄에 쌀독 빈 집 아낙네 박속 긁듯이 어미의 양분을 바닥까지 파먹으며 열 달을 견딘 생명은 이제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고 어미나 생명이나 모두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시어머니는 아비가 산달을 앞두고 문에 뚫린 구멍들을 메웠기 때문이라고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비가 세상에 태어날 생명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었다. 시커멓게 독 오른 한여름 모기가 사람 짐승 가리지 않고 달라붙어 악착같이 피를 빨아 먹고 있었다.


짚과 흙을 개어 바른 벽을 할퀴며 어미는 고통스러워했다. 여덟 번째 출산이었지만 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미는 아픈 것보다 또 딸일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남동생 보라는 뜻으로 수남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딸이 갓 돌을 넘긴 얼마 전에 죽은 것도 불길했다. 또 딸이라면 배 속의 생명과 함께 자신도 이 세상을 그만 떠나고 싶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문이 열리지 않아 포기하려던 생명에게 큰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힘을 내. 배 속에 있는 동안 엄마 목소리보다 더 익숙해진 음성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아이가 치받자 어미는 마지막 기운을 끌어모아 힘을 주었다. 생명 또한 마지막 힘을 내었고, 무사히 태어나 얼마 전 죽은 언니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또 지지배네. 어찌된 놈의 뱃구레 속에는 지지배밖에 안 들었대.”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아들을 낳은 적이 있다는 기억은 까맣게 잊은 채 솥뚜껑을 소리 나게 메어쳤다. 그 아들은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아이들의 죽음은 너무 흔한 일이어서 가족 외에는 큰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했다.


아비는 제 어머니의 기세에 눌려 아이 낳느라 생사를 넘나들었던 아내 얼굴 한 번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뒷산 기슭에 태를 묻었다. 입술이 시퍼레지도록 참꽃을 따 먹던 마을 아이들이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가 묻는 게 먹을거리였다면 아이들은 참꽃으로는 어림없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몰려들었을 것이다. 대신 비쩍 곯은 개들이 주둥이를 끌며 모여들었다. 아비는 발을 한 번 굴러 쫓는 시늉을 했을 뿐 더 기운을 내지 못했다. 소 한 마리 빌릴 수 없어 직접 쟁기질을 하고 있는 판에 헛된 힘을 쓸 기력이 없었다.


지주가 윤형만 자작으로 바뀌면서 소작농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일본의 산미 증식 계획에 적극 동참한 형만은 수로 개선이나 못줄을 이용한 모내기, 화학비료 사용 등을 강권했다. 그로 인해 소출은 늘었지만 더 높아진 소작료와 비룟값을 내고 나면 나머지 쌀로는 몇 달도 버티기 어려웠다. 쌀을 팔아 만주에서 들여온 옥수수와 조로 바꾸어도 머릿수 많은 식구들 배를 채우기에는 턱도 없었다. 당장 이자가 비싼 장리쌀이라도 얻어 와야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입이 하나 더 늘었다는 건 아비 어깨에 얹힌 짐이 그만큼 더 무거워졌다는 의미밖에 없었다.


어미는 누더기나 다름없는 포대기에 감싸인 딸을 보았다. 아직 미끈미끈하고 하얀 태내 기름이 쭈글쭈글한 몸을 뒤덮은 빨갛고 작은 생명에게 어미는 묘한 슬픔을 느꼈다. 또 딸이라서만은 아니었다. 아이의 운명이 위의 딸들과는 다른 길로 갈 것이라는, 엄마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환히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예감 때문이었다. 어미는 그 뒤로도 딸을 하나 더 낳고 마지막으로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라는 기쁨은 낳는 순간으로 끝나고 어미는 또다시 집안일과 농사일에 뼈와 살을 바쳐야 했다.

 

찬기가 겨우 가신 물을 끼얹어 가며 수남을 씻기던 어미 머릿속에 딸을 낳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이것이었던가. 자식을 팔다니. 민며느리로 보냈던 맏딸도 실은 팔려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의 결정이지만 어미는 부모로서 또 자식을 파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어미도 논 서 마지기는 과분하다고 여겼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미는 가장 좋은 옷으로-그래 봤자 누더기를 겨우 면한 것이지만-골라 입히고 부뚜막에 앉힌 채 보리보다 옥수수와 조가 더 많이 섞인 밥을 고봉으로 퍼 주었다. 수남의 동생 수옥과 경석이 처음 벌어진 상황에 불만을 품고 찡찡거렸다.


수남이 밥을 먹는 동안 어미는 머리를 빗겨 주었다. 그 일도 처음이었다. 낳기만 했을 뿐 딸이 일곱 살이 되도록 무얼 먹고 어떻게 자랐는지 생각나는 게 거의 없었다. 수남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큰언니 이야기를 자주 했다. 혼자 놀면서도 누구와 이야기라도 하듯 조잘거리기 일쑤였다. 맏딸이 보살펴 줬다는 게 참말인가? 큰딸은 열다섯 나이에 시집에서 몸을 풀다 아이와 함께 죽었다. 어미는 황급히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혹시라도 귀신 붙은 년이라며 계약을 무르자고 할까 봐 겁났다. 논 서 마지기의 주인이 되면 남은 아이들 배도 덜 곯릴 테고 딸들 시집갈 때 이불 한 채씩이라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뿐인 아들 경석이 크면 보통학교에도 보낼 수 있다. 비로소 지주가 된 실감에 머리 빗기는 어미의 손이 떨렸다.


짠지 반찬 하나로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운 수남은 포만감에 흡족해 게트림을 했다. 그러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딸을 앞세워 너도나도 마름네 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형만의 마음이 바뀔까 봐 불안해진 수남 아비는 늘쩡거리는 아내에게 욕을 퍼부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고 하나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수남이 부엌에서 나오자 할미가 눈물을 질금거리며 말했다.


“이년아, 어디서든 지 귀염은 지가 받는 게야. 집에서처럼 허튼소리 지껄이지 말고 싹싹하고 눈치 빠르게 잘해.”


보퉁이를 든 수남은 처음 받아 보는 대우와 관심에 의기양양해져 자동차라는 것에 올라탔다. 자매들과 경석은 부러움보다 오히려 두려운 기색으로 수남을 지켜보았다. 앞좌석에는 형만이 앉고 뒷자리에 채령과 수남이 앉았다. 박 서방은 며칠 머물며 소작지 일을 볼 예정이었다. 마소가 끄는 것도 아닌데 저절로 굴러가는 자동차가 너무 신기해 수남은 자신이 고향을 떠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큰언니가 사람들 틈에 끼어 배웅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채령은 수남과 닿을까 봐 한쪽 창가에 몸을 바짝 붙여 앉았고, 수남 역시 휙휙 스쳐 가는 바깥 풍경에 정신을 판 채 다른 쪽 창에 달라붙었다.


수남은 고개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늘 궁금했다. 큰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장에 가는 사람도, 학교에 다니는 몇 안 되는 동네 아이들도, 더 먼 곳에 갔던 사람도 모두 고개를 넘나들었다. 수남은 할머니나 아버지가 장에 갈 때마다 데려가 달라고 조르고 몰래 쫓아가기도 했지만 중간에 들켜 매타작만 당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차에 앉아 고개를 넘다니.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속에서는 구미호가 나오는 좁고 가파른 길이었지만 지금은 소달구지나 트럭이 넘나들 수 있을 만큼 넓고 완만해졌다. 마을 사람들이 부역으로 만든 그 길로 죽어라 농사지은 쌀이, 먹을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실려 나갔다.


수남은 몸을 돌려 멀어져 가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배고픔과 어른들이 내는 온갖 악다구니와 욕설, 코를 찌르는 거름 냄새와 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가득하던 안골마을은 석양에 잠겨 아름답게 빛났다. 수남이 큰언니와 함께 늑대 새끼처럼 누비던 뒷산도 점점 작아졌다.


깊은 골짜기, 아이들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면 머루가 있고 다래가 있었다. 개암나무나 산뽕나무 열매도 허기를 달래 주었다. 맑고 차고 단맛이 나는 개울물도 있었다. 산속은 수남이 제대로 안겨 보지 못한 엄마 품처럼 푸근했다. 그 산이 이제 손바닥으로도 가려졌다. 가까이서 보는 것과 멀리서 보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집을 떠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 채 수남은 처음 보는 광경에 흠뻑 취해 있었다.


“얘, 아버지가 이름 묻잖아.”


채령이 핀잔을 주어서야 수남은 정신을 차렸다.


“수남이요. 김수남.”


비로소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현실을 직시한 수남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주눅 든 기색으로 대답했다.


“앞으로 애기씨 잘 모셔야 한다.”


수남은 턱을 치켜든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채령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


잘 모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수남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형만은 딸에게 괜찮은 선물을 한 듯싶어 흡족했다. 그동안 어른들 틈에서 자라는 딸이 늘 신경 쓰였다. 고보생이 된 강휘가 제 동생과 놀아 줄 리 없고 집에 어린아이라고는 채령뿐이었다. 형만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유모 치맛자락을 붙잡고 다니는 딸아이 심부름도 해 주고, 시중도 들고, 말동무도 해 줄 또래 계집아이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성가시게 굴지 모를 가족이 가까이 사는 경성보다는 시골에서 찾는 게 나을 것 같아 소작지에 미리 일러두었던 것이다. 원래는 채령보다 두세 살 많은 아이를 원했으나 수남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형만이 주저 없이 수남을 택했던 건 땟국물이 흐르는 얼굴 너머로 느껴지는 총기 때문이었다. 잘 길들이면 오래도록 채령의 수족으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시집갈 때 딸려 보내도 된다는 생각을 형만은 황급히 지워 버렸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만 벌써부터 가슴 아픈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형만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술이네를 불렀다. 아버지와 외출했다 오는 날이면 채령은 집에 닿기 전 잠든 척해 어머니의 질문 세례를 피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부리나케 달려간 술이네는 보퉁이를 끌어안고 서 있는 수남을 보곤 어리둥절해졌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초라한 행색은 알 수 있었다. 수남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술이네에게 형만이 말했다.

 

“채령이 몸종으로 데려온 아일세. 오늘은 늦었으니 마님한테는 내일 인사시키고. 자네가 끼고 잘 가르쳐서 채령이 학교 갔을 때는 집안일도 시키고 하게. 당돌한 구석이 있으니 매질을 해서라도 잘 길들이게.”

 

형만은 기사에게 채령을 방까지 조심히 안아다 눕힐 것을 명령했다. 그는 채령이 돌을 넘기고부터는 딸을 별채로 불러냈지 안채에는 좀처럼 걸음을 하지 않았다.

 

술이네는 수남에게 따라오라 이르고 기사를 쫓아갔다. 수발을 들기는커녕 비리비리해서 오히려 채령이 돌봐 주게 생겼지만 안채에 일손이 하나 더 생긴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술이네는 수남을 잘 길들여 채령이 없을 때는 자신의 수족으로 삼고자 마음먹었다.

 

“애기씨 잠자리 봐 드리고 올 테니께 너는 여기서 지둘리고 있어.”

 

오는 길에 본 경성 야경만으로도 얼이 빠진 수남은 임금님이 사는 대궐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커다란 집에 다다르자 완전히 넋이 나갔다. 수남은 불이 훤한 안채 마루를 홀린 듯 보았다. 안골마을 집 안방 문에 손바닥보다 더 작게 붙어 있던 귀한 유리가 수십 장, 아니 수백 장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루엔 처음 보는 진기한 물건이 가득했다. 눈길 닿는 곳마다 놀라워 꿈속이나 이야기 속에 있는 건 아닌지 헷갈렸다.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다가가던 수남은 갑자기 쏟아지는 불빛에 깜짝 놀라 돌아다보았다. 석유 냄새와 함께 남포등 불빛이 바로 앞에서 흔들거렸다.

 

“넌 누구냐?”

 

수남은 덮치듯 다가온 거대한 몸집에 겁을 먹고 뒷걸음쳤다.

 

술이네와 함께 수남은 안방으로 불려 들어갔다. 밤인데도 대낮처럼 환한 방, 번쩍번쩍 빛나는 온갖 물건들과 난데없이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 처음 보는 거구의 여인 앞에서 수남은 꿈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알 수 없었다. 자기가 가겠다고 나선 순간인지, 엄마가 씻겨 주고 고봉밥을 주었던 때부터인지, 차에 올라탔을 때부터인지. 수남은 가겠다고 나선 그 순간에서 깨기를 바랐다. 흙벽 가루가 떨어지는 좁은 방에서 할머니와 언니들 틈에 끼어 빈대에 물린 몸을 긁어 대며 누워 있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수남은 곽 씨가 자신을 뚫어져라 살펴보고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변소에 다녀오던 곽 씨는 불빛에 비친 수남을 처음 본 순간 채령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방으로 들인 것이다. 곽 씨는 수남이 오게 된 연유를 캐물었지만 술이네가 형만으로부터 들은 게 다였다. 소작지에 남은 박 서방 대신 불러들인 운전기사로부터 수남을 논 서 마지기에 사 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쌀 두어 가마면 족할 계집애한테 논 서 마지기라니. 술이네가 놀라 새삼스러운 눈길로 수남을 훑어보았다. 곽 씨는 수남을 볶아쳤지만 나이나 이름, 가족 관계 말고는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원래는 다른 아이가 오기로 했는데 그 애가 싫다고 해서 자기가 왔다는 것이다. 여러 번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었다. 어째서 채령을 닮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곽 씨는 참지 못하고 술이네에게 물었다.

 

“유모, 이년 우리 채령이하고 닮은 것 같지 않아?”

 

“닮기는유, 마님. 어떻게 애기씨하고 천하디천한 촌년하고 닮을 수가 있겠어유.”

 

술이네는 또 강짜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표정이 됐다. 곽 씨는 형만에게 수가 틀리면 그 분을 주위 사람들에게 풀었다. 그때마다 고달픈 건 안채 행랑 사람들이었다. 곽 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감히 누굴 닮아.’

 

술이네에게 속내를 드러냈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한 곽 씨는 명령을 내렸다.

 

“비싸게 사 왔으니 값을 해야지. 낼부터 당장 안채 청소를 맡기게. 이년이 몸값을 제대로 하는지 지켜볼 테니.”

 

유모가 수남을 데리고 나간 뒤에도 곽 씨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늘고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부터 아이치고는 곧은 콧날과 도톰한 입매까지, 닮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채령이 보름달처럼 둥근 얼굴이라면 수남은 하관이 갸름해 복 달아나게 생긴 것만 다를 뿐이었다.

 

곽 씨도 처음엔 자신이 억지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수남이 형만의 핏줄이라면 채령의 몸종으로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채령이 태어날 무렵 형만은 수로 사업이니 산미 증식이니 하면서 걸핏하면 소작지에 내려갔다. 지저분하고 불편한 걸 질색하는 형만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뒤이어 떠오른 생각이 마음을 더욱 들쑤셨다.

 

‘수남이 에미년이 남의 씨 낳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떠들었겠어. 제 서방이나 자작한테는 그 사실을 숨기고 들이민 걸 수도 있잖아. 어린 게 제가 오겠다고 스스로 나섰다는 게 말이 돼? 지 에미가 수를 쓴 게 틀림없어.’

 

모든 걸 알고 있을 박 서방이 소작지에 남은 것도 수상했다.

 

채령과 촌 계집애가 닮았다는 생각은 얼마 뒤 일어난 일로 사라졌지만 수남을 볼 때마다 곽 씨의 눈길은 저절로 사나워졌다.

 

자리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진 수남과 달리 술이네는 잠이 멀찌감치 달아나 버렸다. 수남이 논 서 마지기 값이란 말에 어린아이임에도 시기심이 인 탓이다. 술이네는 월급을 알뜰하게 모아 3남매 중 막내이자 유일한 아들인 태술이 열 살이 됐을 때 성환 집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 4년제 보통학교에 보냈다. 경성살이를 하면서 가진 것 없는 사람은 배우기라도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걸 깨친 덕분이었다. 그 아들이 내년 봄 졸업한다.

 

술이네는 형만에게 태술을 무극광업이든 무극양행이든 한 군데에 넣어 달라고 사정할 참이었다. 태술이 일을 제대로 익힐 때까지는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아직 말도 못 꺼내고 있는데 보잘것없는 계집애를 논 서 마지기에 데려오자 자기 것도 아닌 땅이 아깝고 뭔지 모르게 억울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욕심이 생겼다.


회사 일 할 재목이 못 되면 강휘의 수발을 들게 해 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그동안 강휘를 돌봐 주던 구씨 할아범은 이제 너무 늙었다. 유모인 자기가 있는데도 수남을 데려온 걸 보면 강휘에게도 그 또래 아이를 붙여 줄지 모른다. 채령과 수남처럼 강휘와 태술도 한 살 차이다. 회사 일도 좋지만 장차 가회동 저택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강휘의 수족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수남이 논 서 마지기짜리면 보통학교를 졸업할 내 아들은 얼마나 받아야 할까? 술이네는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하지만 자기 아들한테도 논 서 마지기는 과했다. 문득 채령과 수남이 닮았다는 마님의 말이 괜한 강짜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남이 잠꼬대를 하며 술이네 품을 파고들었다. 처음엔 살차게 밀어내던 술이네는 잠결에 수남을 끌어안았다. 잠을 깨서도 그녀는 팔을 풀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팔려 온 아이가 죽은 자식 같고 고향의 자식들 같아서였다. 하지만 술이네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참새 새끼처럼 작은 아이가 집 생각날 겨를이 없도록 쉴 새 없이 일을 시키는 것뿐이었다.


‘편해 봐야 쓸데없는 잡생각만 들지 좋을 것 없어.’


수남이 불쌍할 때마다 술이네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일을 시켰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제 일을 떠넘기는 것도 모르는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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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판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2이금이 저 | 사계절
논 서 마지기에 윤 자작의 딸 채령의 생일선물이 되어 작은 시골마을에서 경성 대저택으로 오게 된 수남. 두 소녀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복잡한 운명의 줄타기를 하며 일본, 미국, 러시아, 중국 등으로 이어지는 여정에 놓인다. 신분과 성별, 배움과 문화, 민족과 인종의 차이를 온몸으로 겪어낸 주인공들의 인생 드라마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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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금이

‘이 시대 최고의 아동청소년문학 작가’로 꼽히는 이금이는 1984년 ‘새벗문학상’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이후, 30여 년 동안 진한 휴머니티가 담긴 감동적인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소천아동문학상과 윤석중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여러 편의 작품이 실리기도 한 그는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초월하여 폭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대표작으로 『너도 하늘말나리야』,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 『유진과 유진』, 『사료를 드립니다』, 『청춘기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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