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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한다면, 때로는 무시해줘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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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언이 너를 살찌게 하고 옳은 길로 인도하리라는 생각은 하는 사람의 오만한 착각이다.

노비 문장

 

기본적인 신뢰가 갖춰져 있는 조건하에서라면, 타인의 결여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배려’ 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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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령화 가족>의 한 장면. 심각한 두 형제.


1.

 

설을 쇠고 집으로 돌아온 후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인에 작은 형의 이름이 뜬다. “형이다”. 목소리가 이미 취해있다.

 

저녁에 사위가 와서 아들들과 함께 술을 한 잔 할거라며, 당신의 집에 같이 가자고 한 것을 마다했는데 이미 거하게 드신 모양이다. 경험으로 예견컨대, 그가 할 말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전부터 형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술의 힘을 빌어, 거침없이 말하고는 했다. 잔정도 많고 가족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으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옳은 것이라고 확신하는 그의 태도와 취중의 독설은 늘 나를 경직시켰다. 그래도 어찌하나, 내 형인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는 “내가 하는 말을 고깝게 듣지 말거라” 라는 말로 나의 예감이 적중했음을 암시했다. 그리고 본론이 시작되었고 5분이 지난 후부터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스피커폰으로 그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 마치 라디오에서 나오는 어떤 소리를 듣듯이, 나의 눈은 TV를 향했고 어서 그의 훈계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형은 자신이 환갑을 넘어서도 자식들을 다 장악하고 살고 있지 않냐며, 애들이 자기에게 잘하는 이유는 부모가 본을 잘 보이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너의 아들이 지금 학교를 제대로 가지 않고 속을 썩이는 이유는 가장의 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거라며, 네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똑똑하다 해도 가정 하나를 잘 꾸리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말을, 술술술 쏟아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내가 잘 듣고 있는지를 확인했고, 나는 말씀 다 하셨으면 전화를 끊겠다는 말로 나의 인내심을 종결시켜버렸다.

 

그리고 그 밤, 나는 소주 한 병 반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형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당신 인생이나 잘 챙기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역시 어쩌겠는가, 나도 늙어가고 형도 늙어가고, 죽을 때까지, 죽고 나서도, 내 형인걸.

 

아침에 형에게 문자가 왔다. “어제 두서없이 형이 한 말을 마음에 두지 말아라. 내 동생 가정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말이니.” 뭔가가 속에서 걸린 것은 본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세상의 모든 훈계와 일방적 조언은, 듣는 사람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겉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 안을 채우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이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못 참겠으니까 하는 말일 뿐이다. 나의 조언이 너를 살찌게 하고 옳은 길로 인도하리라는 생각은 하는 사람의 오만한 착각이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사람이, 내 가정과 내 아이들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그리 잘 알고 있으며 그 세부적인 속사정을 어떻게 알겠으며 내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그 내용과 선택들을 헤아리기나 한 것일까? 더디지만 분명 조금씩, 자기 삶을 다듬어가는 내 아이의 변화와 그 대견함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문자를 받고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바로 그 설날 아침, 오랜만에 만난 질녀에게 했던 나의 말들이 계속 복기 되었기 때문이다.

 

서른이 다 되도록 아직도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있는 내 누이의 딸에게, 나는 현실적인 판단을 할 때라며 대학원 생각하지 말고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의 끝에 나는 이런 토를 달았다. “외삼촌이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말 하는 것 싫지? 그러나 엄마는 너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니, 외삼촌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그러니 삼촌 말을 서운하게 듣지 말아라.” 아아, 내 형이 나에게 했던 말들은 모두 꼰대가 하는 말이고 내가 내 조카에게 하는 말은 꽃 향기 나는 시라 생각하는 나의 이 착각을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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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령화 가족>의 한 장면. 거리가 조금 멀어지니 표정이 밝아진 형제.

 

 

2.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에세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 속의 노비 문장에 밑줄을 그은 것은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 잘되라고 한다는 충고의 배려보다는 네가 먼저 손을 달라고 하기 전까지는 모른 척 하겠어”라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는 말에 나는 동감한다. 형제, 조카라는 혈연의 특수 관계를 기본적인 신뢰와 동의어로 본다면 무시는 신뢰가 가진 또 다른 얼굴일 것이고, 만일 과연 신뢰하는가부터 의심이 든다면 충고보다 선행해야 할 일은 신뢰부터 구축하는 것일테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 놔라 배놔라 하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내 속 시원하라고 남의 가슴에 못 박는 일이다. 뭔가라도 해야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냥 전화해서, 요즘 어떻게 사는지 묻고 조용히 들어주면 된다. 조카가 걱정이 된다면, 요즘 공부하느라 힘들지? 라고 말하며 어깨 한번 두드려주거나 용돈 한 번 더 주면 된다. 그 과정이, 신뢰를 쌓는 길이다.

 

 

독후 낙서 (讀後落書) - 정확한 사랑의 실험

 

개떡같이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먹는 것이 센스 있는 청자(聽者)라지만 문제는 개떡같이 말하는 화자(話者) 역시 애초부터 개떡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어는 늘 이렇게 의도를 빗나가고 문자 역시 하고자 하는 말을 태생적으로 왜곡한다.

 

신형철은 자신의 첫 번째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통해 '말이 대개 나의 진정을 실어 나르지 못하기 때문이고 행동이 자주 나의 통제를 벗어나기 때문'에 문학은 불가피하다고 말하면서 윤리가 문제되는 자리는 '선(善)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덧붙였다(18쪽).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 어떻게 쓸 것인가를 묻는 문학의 윤리학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을 가장 정확한 언어로 전달하려는 노력에 있다고 보여지는 데, 그렇다면 그의 시선 속에서 좋은 글쟁이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정확히 쓰는 사람이다. 정확히라는 것이 언어의 속성상 완벽하게 도달할 지점이 아니라면, 최대한 정확히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좋은 글쟁이가 되려는 사람이다.

 

평론이나 리뷰를 포함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신형철은 다시 말한다. 좋은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라고. 그에게 좋은 해석은 정확한 해석이다. 그는 '정확한'의 의미를 더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장승리의 시, 「말」을 잠시 빌려온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로 시작하는 시의 중간에 나오는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신형철은 이 말을 세상의 모든 작품들이 세상의 모든 해석자들에게 하는 말로 듣는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영화에 대한 해석책이다.

 

2012년 여름부터 2014년 봄까지 영화 주간지 <씨네 21>에 매달 연재한 글들과 다른 지면의 세 개의 글을 엮어 이 책이 나왔다. <러스트 앤 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케빈에 대하여> <아무르> 등을 통해 사랑의 논리를 이야기하고, <피에타> <멜랑콜리아> <테이크 쉘터> 등을 통해 욕망의 병리를 , <더헌트> <시> <설국열차>를 통해 윤리와 사회를, <스토커> <라이프 오브 파이> <그래비티> 등을 통해 성장과 의미를 이야기한다.

 

박찬욱은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이 표현해놓은 대목과 맞닥뜨릴 때면 좀 무섭기까지 했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보면 신형철이 하고자 했던 정확한 해석에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더불어, 그는 영화평론가도 아니면서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주제 넘은 짓이라는 뉘앙스로 말을 했지만 (정확히는, '이 책의 저자가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문학평론가라는 점은 이 책의 개성과 한계 모두에 관계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한 편의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과 시와 철학과 윤리학이 온통 버무려져서 동원되는 호사한 잔치에 초대받은 것이니, 책을 읽는 재미는 더 쏠쏠하고 깊다. 같은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시각을 보는 재미, 보지 않은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유혹은 영화를 배경 혹은 전경으로 다루는 대개의 책들이 가진 미덕이겠고 당연히 이 책은 그 기본의 임무 역시 철저히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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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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