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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와 세상의 끝

레시피는 요리의 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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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없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 결국 본인 레시피를 만들어낸 고집스러움. 그 삶은 고되고 자주 지칠지라도 남이 가보지 않을 길을 가고 그래서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간다.

하루키의 1985년 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하루끼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소설로 꼽힌다. 그 마니아들을 누구로 상정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있긴 하다. 마니아를 '나'로 한정 짓는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상실의 시대』도 만만치 않게 반복해서 읽었지만 저 소설이 주는 만족감에 비할 것은 아니다. 1995년 『언더그라운드』 이후의 작품이 가지는 사회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중 세계관 및 그것의 연결 가능성 등, 하루끼 작품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완성된 문제적 소설인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나에게는 특별한 소설이다.

 

몇 년 전 회사로 가는 버스 뒷자리 창가에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나는 눈물이 났다. 늘 타던 버스 안이었지만 나른한 온기의 햇살, 어딘지 모르게 더욱 정겨웠던 공기, 그 속에서 책을 두 손에 쥐고 한참 멍하니 있었다.


한권의 책이 마음에 들 때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또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걸었을 때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생각해 보면
나를 기쁘게 해 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中 에서 -


나는 늘 '세계의 끝'에 끌렸다. 저 세계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보고 싶다. 보고 싶다. 궁금하다’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세계의 끝은 좌우로 확장된 넓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끝은 저 밑으로도 존재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요리를 시작했을 때 나는 자주 그 끝을 봤다.

 

언젠가 산 강금실 전 장관의 수필집에서 그녀는 '맺힌 것이 없는 사람은 믿지 못한다'라고 말을 했다는 고종석 씨의 추천사가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저 끝에 가보지 않은 사람을 믿지 못한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가보았을까? 잘 모르겠다. 내가 가보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마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다 가봤어'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세계가 좁다는 것을 인정하는 격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하리라고 생각될 만큼 끝없는 깊이로 가본 사람들을 더 믿는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끌린다. 그들이 가지는 자주 왜곡되고 때로는 살기가 돌고 그래서 불편한 공기도,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오로지 그들만의 세계다. 일그러지고 깨어졌지만 그래서 반짝 빛나는 모서리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이밀게 된다. 왜냐면 그들은 기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찾을 수 있고 대체 가능한 무엇이 넘쳐나는 세상에 그들은 희귀하다. 나는 집에 전쟁터의 해골처럼 수북이 쌓아놓은 요리책 속 레시피를 보며 그 희귀한 흔적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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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는 약속이고 지도다. '이렇게 만드십쇼'라는 지침이다. 하지만 레시피는 요리의 전부가 아니다. 누구는 레시피 사냥을 하듯 레시피를 수집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마치 레시피가 비법이라도 된 양 비밀로 가지기도 한다. 서양에서 레시피는 모두 공유한다. 업장의 레시피를 책자로 만들어 나누어주기도 하고 출판하는 일도 많다.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은 없는 셈이다. 업장에서 프로 요리사가 비법 없이 누구에게나 공개된 레시피대로 요리를 하면 당연히 음식이 잘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만드는 사람이 문제다. 레시피를 철저하게 따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무리 세세하게 설명하고 가르친다 해도 본인이 직접 해보기 전까지 레시피란 단지 글자에 불과하다.

 

강력분을 쓰는 레시피를 보자. 강력분은 단백질 함량이 12~14%인 밀가루다. 12~14 사이의 좁은 간격으로도 글루텐의 형성, 그에 따른 결과물의 질감 및 발효 속도 등에서 의미 있는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밀가루를 어떻게 보관했는지, 계절과 습도에 따라 밀가루가 머금는 수분에도 차이가 생기고, 중량과 부피, 첨가하는 수분의 양에도 영향을 미친다. 반죽도 마찬가지다. 밀가루 반죽에 탄력이 생길 정도로 치대어야 한다. 탄력의 정도라는 것도 애매한 영역이다. 반죽을 숙성시키는 환경 역시 그렇다. 이 모든 것을 철저히 통제한 것이 공장이겠지만 주방은 공장이 아니다. 그 애매함을 알아내는 것은 끊임없는 시행착오다. 시행착오는 반복 속에서 고쳐진다. 그 반복을 가능케 하는 것은 실패에도 꺾이지 않는 강한 마음이다. 결국은 알아낼 것이라는 긍정이다.

 

레시피를 잘 소화해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하더라도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 그 일을 매일 반복해야 한다. 점심과 저녁 서비스를 치르며 하나의 음식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동시에 처리한다. 그 와중에 레시피가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 번 음식이 잘 나온 것과는 다른 문제다. 음식을 언제 데우고 언제 상온에 내놓고, 어떻게 굽고, 어떻게 지지고, 그리고 어떤 음식과 함께 나갈 것인지, 음식을 누가 어떻게 서빙하는지, 이 과정에서 타협하게 된다. 바쁘니까 조금 일찍 구워놓고, 냉장고에 넣어두고, 드레싱을 하는 사이에 음식은 레시피와 달라진다.

 

타협은 바빠서, 한가해서, 재료가 없어서, 많아서, 동료가 못해서, 게을러서, 피곤해서, 봄이니까, 여름이니까, 가을이니까, 겨울이니까, 즉 어떤 이유로든 가능하다. 그래서 좋은 요리사이면서 성격 좋은 요리사가 되기란 쉽지 않다.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현실의 모든 부조리를 뚫고 나가야 한다. 고집이 있어야 한다. 강직해야 한다. 다른 말로 성격이 더러워야 가능하다. 음식을 돈 받고 팔면 끝이 아닌 내 삶의 전부. 이것이 나. 모든 재료는 신성한 땅으로부터 나온 것. 어느 것 하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 타협으로 망쳐버린다면 그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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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은 쉽고 고집은 어렵다. 순하게 산다는 것은 쉽지만 자취가 남지 않는다. 고집은 용기다. 전력질주다. 곁눈질 부리지 않고 앞으로 달린다. 그러다 보면 넘어지고 깨지고 다친다. 사납고 화려한 것들이 쉽게 다치고 죽는 이유다. 5g이 아니라 6g을 쓰라는 레시피를 볼 때, 1g의 차이를 발견하고 그것을 굳이 밝혀놓은 이를 생각한다. 타협 없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 결국 본인 레시피를 만들어낸 고집스러움. 그 삶은 고되고 자주 지칠지라도 남이 가보지 않을 길을 가고 그래서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간다.

 

그 1g의 차이를 알고 싶어서 요리를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요리를 하지 않는다. 영화로 치면 감독이 아니라 제작자 같은 일을 한다. 뜨거운 불 앞에서 분초를 다투다 지금은 컴퓨터 앞에 앉아 생각하고 문서를 만든다. 그 하얀 문서 위에 나는 1g의 차이를 가지고 태어난 음식이 있을 공간을 그린다. 몸이 풀어지고 정신이 느슨해질 때 나는 다시 1g에 울고 웃던 때를 생각한다. 그 끝을 떠올리면 다시 정신이 든다.

 

몇 년 전 그날 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다 읽고 버스에 앉아 눈을 감았다. 버스는 익숙한 길을 돌아 회사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같은 일상이 반복됐다. 하지만 그날은 그 전날과 결코 같지 않았다. 지쳐서 이제 끝이라고, 더 이상은 없다고 여겼지만, 그때 포기하지 않고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신기하게도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흘러온다. 따뜻하게 샘솟는 꿈틀거림, 미약하지만 분명한 힘. 그것은 바로 세계의 끝에 갔을 때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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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의 빨간 노트

정동현 저 | 엑스오북스(XOBOOKS)
다큐멘터리의 카메라처럼 유럽과 호주 레스토랑의 주방 풍경과 셰프들의 뜨거운 전투를 현장감 있게 속속들이 비춰준다. 그 장면 하나하나가 눈과 귀에 쏙 들어오는 것은 셰프들의 벌거벗은 조리 과정을 비롯해 음식에 얽혀 있는 역사와 영화, 예술, 여행 이야기, 나아가 러브 스토리까지 버무려 놓기 때문이다. 군침 넘어가는 레시피와 음식에 관한 깨알 같은 상식과 에티켓까지 음미하고 나면 서양 음식 앞에서 생기는 괜한 주눅도 말끔하게 사라진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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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정동현(셰프)

<셰프의 빨간 노트>의 저자. 신세계그룹 F&B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 핫한 먹거리를 찾아다니면서 혀를 단련 중이다. <조선일보> 주말 매거진과 페이스북을 통해 새로운 맛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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