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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뒤집기를 허하라

고기를 지지듯 구워야 할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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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뒤집는 것과 육즙이 빠지는 건 관계가 없다. 이미 고기 밖으로 나온 육즙이다. 뒤집든 뒤집지 않든 없어진다. 중요한 것은 열이다.

앞차의 신호위반에서 망국의 징조를 읽고, 바로 앞에서 닫힌 엘리베이터 문에서 후진적 시민의식의 단면을 발견하는 진지한 사람들은 삼겹살 구울 때도 한마디 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한 번만 뒤집어"

 

그 근엄한 목소리는 고등학생 시절 학생주임 선생님을 연상케 한다. 이유를 물어볼라치면 한 옥타브 더 낮아져 땅으로 꺼질 것만 같은 음색으로 이렇게 말한다.

 

"여러 번 뒤집으면 육즙이 빠지잖아."

 

정말 여러 번 뒤집으면 육즙이 빠질까? 한 번만 뒤집으면 육즙이 고기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을까? 요리 좀 한다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에까지 나와 '육즙 안 빠지게 겉을 지져주세요'라고 엄숙하게 말하면 고학번 선배의 말처럼 꼭 믿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침착하자. 말은 그럴듯하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고기의 겉면이 열을 받으면 나사 조이듯이 고기 속 조직이 줄어들어 고기 속에 든 육즙을 가둘까? 미안하지만 전혀 아니다. 고기 조직은 육즙을 가둘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고기를 구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특히 두꺼운 스테이크에 흥건히 베이는 핏물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저 추론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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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고기를 지지듯 구워야 할 이유는 있다. 마이야르(Maillard) 현상 때문이다. 단백질 조직이 120도가 넘는 열을 받으면 색이 갈색으로 변한다. 이 갈변 현상은 마이야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 마이야르 현상에 의해 아미노산이 열에 반응하며 우리 인류가 좋아하는 풍미가 생긴다. 하버드 대학 인류학과 교수 리처드 랭엄이 『요리 본능』에서 밝힌 것처럼 인류는 본능적으로 불에 그을린 맛에 끌린다. 화식(火食)을 통해 음식 섭취 속도와 양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며 두뇌가 진화했다는 그의 설명을 읽노라면 내가 불에 그을린 돼지 갈비와 스테이크 앞에 사족을 못 쓰는 연유가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어쨌든 육즙은 상관없다. 그저 고기를 구웠을 때 나는 맛이 중요할 뿐이다. 어차피 육즙은 가두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번 뒤집는 것과 육즙이 빠지는 것도 관계가 없다. 고기를 굽게 되면 위로 올라오는 육즙 때문에 그런 추론이 벌어진 것 같다. 하지만 이미 고기 밖으로 나온 육즙이다. 뒤집든 뒤집지 않든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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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렝 3스타를 받고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선정되었던 레스토랑 팻덕(Fat Duck)의 오너 셰프 대머리 요리사 헤스턴 블루멘설(Heston Bluementhal)은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책에서 '이상적인 스테이크 굽기' 방법을 소개했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하니, 스테이크를 팬 위에서 15초 간격으로 계속 뒤집어주는 것이다. 왜 일까? 어차피 육즙은 뒤집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자주 뒤집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헤스턴은, 고기를 자주 뒤집음으로써 '열이 균일하게 양쪽에 가해지고' '고기의 과숙을 방지하여' 골고루 잘 익은 육즙이 보존된 스테이크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 이상적인 굽기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상적인 스테이크 굽기 (헤스턴 블루멘설의 『Heston Blumenthal at Home』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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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기의 두께는 2 센티미터 정도여야 한다. 그 이하일 경우 겉면이 갈색으로 변했을 때 속은 이미 과숙(overcooking)되기 쉽다(즉 붉은 기가 이미 사라지기 쉽다)

 

2. 고기는 굽기 전 방 안 온도 정도로 미지근해야 한다. 만약에 냉장고에 넣어 뒀다면 굽기 두 시간 전에는 밖에 놔둬야 한다. 고기의 온도가 낮게 되면 익는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3. 고기의 겉면은 수분이 없어야 한다. 수분이 있게 되면 팬에 구울 때, 겉면의 온도가 수분 때문에 낮아져 갈색으로 구워지지 않는다.

 

4. 무겁고 두꺼운 프라이 팬을 센 불에 5분 정도 데운다.

 

5. 고기에 소금을 넉넉히 뿌린다. 소금을 얼마나, 어떻게 쓰느냐에서 직업요리사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난다. '넉넉히' 즉 손끝으로 소금을 넉넉히 쥐고, 두 번 정도 뿌려준다. 고기가 두꺼울 경우 옆면에 뿌려주는 것도 잊지 말자.

 

6. 팬에 포도씨유나, 땅콩기름을 뿌리고, 연기가 날 때까지 기다린다. 올리브유를 쓰는 것은 바보 같은 짓. 올리브유는 발화점이 낮아 구이용으로는 알맞지 않다.

 

7. 기름이 튀지 않게, 고기를 조심스럽게 팬에 올린다.

 

8. 15초 간격으로 고기를 뒤집는다. 2 센티미터의 두께일 경우 미디엄 레어까지 약 2분이 걸린다.

 

9. 굽고 나면 5분 정도 랙(rack) 위에서(열이 잘 빠질 수 있도록) 휴지(resting) 시킨다. 구운 고기를 그야말로 '휴식'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부 열로 고기는 조금 더 익게 되고, 고기의 섬유질이 느슨해지면서 더욱 부드러워진다.

 

10. 서빙 전에 후추를 뿌린다. 고기를 굽기 전 후추를 뿌리게 되면, 후추가 타게 된다.

 

11. 고기에 마블링이 부족할 경우, 버터나 올리브유를 고기에 뿌려주거나, 팬에서 뿌려주면 육즙이 보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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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실생활에 적용해보자. 스테이크는 위에 나온 예시대로 구우면 문제 없다. 절대적으로 육즙이 가득찬 스테이크를 원한다면 진공포장해서 60도 부근에서 24시간 저온 조리를 하고 그걸 다시 팬에 굽고… 하면 되지만 업장이 아니라 가정집이라면 예시로도 충분하다. 아! 두꺼운 팬을 잊지 마시라. 알루미늄 호일처럼 얇은 팬은 비열이 낮아 두꺼운 스테이크를 올리면 온도가 바로 떨어진다. 그럼 제대로 된 색이 나지 않는다. 두꺼운 무쇠팬이 최고다. 고르는 방법은? 온라인 상품평에 '너무 무거워서 쓰기 힘들어요'라는 평이 보이면 제대로다. 그럼 삼겹살은? 팬이 뜨거워야 하는 것은 같다. 급한 마음에 판이 뜨거워지기도 전에 고기를 올리면 고기의 표면이 갈색이 되기 보다는 흰색에 가까워진다. 이때 고기는 구어지는 게 아니다. 내부의 수분으로 '삶아'지는 거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올리게 되면 불판의 온도가 낮아져 역시 제대로 된 색깔이 나오지 않는다. 여러 번 뒤집는 팁의 경우 사실 삼겹살의 두께가 놀라울 정도가 아니라면 그다지 실용적이진 않다. 어차피 두께가 얇아서 충분한 열만 있다면 몇 번 뒤집지 않아도 익게 된다. 중요한 것은 열이다. 열의 느낌은 무엇인가 하니, 고기를 올렸을 때 소나기가 미친 듯이 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나야 한다. 시각적으로는 팬에서 연기가 올라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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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마지막 정리다. 가끔 먹는 스테이크가 아닌 삼겹살, 당신이 즐겨먹고 당신의 상사와 후배도 즐겨 먹는 삼겹살을 구울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주 뒤집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팬이 얼마나 뜨거운가, 충분히 색깔이 나왔는가, 이다. 성격 급한 것은 고기 굽는 데 여러모로 도움이 안 된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고기를 올리고 싶어할 것이 십중팔구. 그리고 열심히 뒤집겠지. 성격이 사려 깊은 우리는 팬이 뜨거워질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자. 비열 높은 사랑은 천천히 달아오르지만 오래 뜨겁듯, 팬의 비열이 올라갈 때까지의 차분한 기다림은 맛있는 고기를 내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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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의 빨간 노트정동현 저 | 엑스오북스(XOBOOKS)
다큐멘터리의 카메라처럼 유럽과 호주 레스토랑의 주방 풍경과 셰프들의 뜨거운 전투를 현장감 있게 속속들이 비춰준다. 그 장면 하나하나가 눈과 귀에 쏙 들어오는 것은 셰프들의 벌거벗은 조리 과정을 비롯해 음식에 얽혀 있는 역사와 영화, 예술, 여행 이야기, 나아가 러브 스토리까지 버무려 놓기 때문이다. 군침 넘어가는 레시피와 음식에 관한 깨알 같은 상식과 에티켓까지 음미하고 나면 서양 음식 앞에서 생기는 괜한 주눅도 말끔하게 사라진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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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정동현(셰프)

<셰프의 빨간 노트>의 저자. 신세계그룹 F&B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 핫한 먹거리를 찾아다니면서 혀를 단련 중이다. <조선일보> 주말 매거진과 페이스북을 통해 새로운 맛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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