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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를 향한 여정

the road to Impressio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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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의 루앙에서 일드프랑스의 오베르쉬르우아즈까지. 현실과 캔버스가 중첩되는 여정을 그리며 인상파의 자취를 따라간다. 멈추는 곳마다 찬란한 빛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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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생미셸은 도도하게 떠 있는 섬 같다. 수도원 교회의 첨탑 위에 서 있는 천사상이 반짝인다.
PHOTOGRAPH : HUR TAE-WOO

 

Rouen 루앙과 클로드 모네
<Rouen Cathedral at sunset>(1893, Musee Marmottan Monet)

 

1892년, 빛의 매혹을 탐구하던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루앙에서 새로운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훗날 ‘수련’과 더불어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된 ‘성당’ 시리즈였다. 파리 생라자르(Saint-Lazare) 역에서 기차로 연결되던 도시 루앙은 중세 시대부터 노르망디(Normandie) 지역의 중심지로 성장해온 곳.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100개의 종탑의 도시’라고 묘사했을 만큼 루앙은 종교 건축물이 그득했고, 덕분에 예술적 매력을 풍기던 곳이었다. 인상파의 선두 주자로 평가받던 모네는 루앙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루앙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Rouen)을 캔버스에 옮겼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성당의 파사드에 내리쬐는 빛과 시시각각 변화하던 그 미묘한 변화를 말이다.


우아한 첨탑, 아름다운 중세 구시가와 하늘 높이 치솟은 고딕 대성당. 루앙은 노르망디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화재와 전염병으로 중세 시대에 수차례 파괴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폭격으로 또 한 번 큰 피해를 입었으나 도시는 여전히 자태를 뽐내고 있다. 1431년 루앙 한복판에서 화형에 처해진 영웅 잔다르크보다, 이제는 19세기의 인상파 작가들이 이 도시를 더 유명하게 만드는 듯하다. 모네를 비롯해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폴 고갱(Paul Gauguin), 앨프리드 시슬레(Alfred Sisley) 등 인상파의 거장들은 한번쯤 이곳에 적을 두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루앙 미술관(Musee des Beaux-Arts de Rouen)은 파리의 오르세미술관(Musee d’Orsay)만큼이나 수준 높은 인상파 컬렉션을 자랑한다.


모네는 3개의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1곳이 대성당 건너편 건물에 자리했다. 바로 오늘날 루앙 여행 안내소가 들어서 있는 건물이다. 모네는 공식적으로 총 28점의 대성당 연작을 완성했다. 특이한 사실은 그가 마치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듯 작품을 계속 수정했다는 것이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과 대성당의 파사드를 관찰한 후, 스튜디오에서 그 인상을 덧붙였다. 붓 터치가 거듭될 수록 작품의 밀도는 더욱 높아졌다. 아침의 빛, 오후의 빛, 어둠이 내리거나 흐린 날 대성당을 감싸는 빛. 마침내 1895년, 그는 자신의 연작 중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는 작품 20점을 선택해 파리에서 전시했다. 그리고 결과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현상과 같다. 루앙 대성당은 미술 교과서에서도 볼 수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 중 하나가 되었다. 세계 유명 미술관이 앞다투어 소장하려 하는 모네의 작품처럼 말이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던 루앙 대성당은 프랑스 역사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고딕 유산이고 루앙 구시가와 도심 곳곳에도 우아한 역사적 건축이 비늘처럼 덮여 있다. 인상파의 작품만큼이나 인상적 풍경이 흐른다. 모네의 자취를 둘러본 후에는, 잔다르크가 화형을 선고받았던 법원 건물을 레너베이션해 완성한 잔다르크 역사박물관(Historial Jeanne d’Arc)과 1979년 완공한 생트잔다르크 교회(eglise Sainte-Jeanne d’Arc) 등에서 프랑스를 구한 영웅의 이야기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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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루앙 미술관은 르네상스부터 현대까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밤이 되면, 루앙 대성당의 파사드에 펼쳐지는 ‘빛의 대성당’ 조명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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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올해 새롭게 문을 연 잔다르크 역사박물관의 예배당.
루앙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오주 쇼콜라티에(Auzou chocolatier).
오주 쇼콜라티에의 마카롱.

 

 

Deauville 도빌과 외젠 부댕
<Bathing Time at Deauville>(1865, National Gallery of Art)

 

승마, 폴로, 카지노, 해변, 골프, 럭셔리 호텔. 19세기 중반, 샤를 드 모르니(Charles de Morny) 공작의 주도로 시작된 개발의 목적은 분명했다. 해변 마을 도빌을 파리의 부르주아가 찾을 만한 고급 휴양지로 만들어보자는 것. 나폴레옹 3세의 이복형제이던 모르니 공작은 당시 프랑스 상류사회의 중심인물이었으니, 그의 행보에 눈과 귀가 쏠리는 일은 당연했다. 경마장을 짓고 카지노가 문을 열었다. 개발이 시작되자 중심가에는 앵글로노르망(Anglo-Norman) 양식 특유의 반목조(halftimbered) 빌라들이 들어섰다. 휴양과 치료 목적의 대중탕 시설도 생겼다. 1863년 바로 옆 동네 투루빌쉬르메르(Trouville-sur-Mer)에 기차역이 생기자 파리지앵은 반나절 만에 도빌에 올 수 있었다.


오늘날 도빌은 150여 년 전의 사회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동네 전체가 근대의 분위기에 젖어 클래식한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하여 반세기 전 이곳에서 촬영한 클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 감독의 영화 <남과 여> 속의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도 놀랄 일은 아니다. 경마장과 해변에서는 때때로 말이 질주하고, 1923년 완성된 해변 산책로 프롬나드 데 플랑슈(Promenade des Planches)도 그대로다. 중심가에 줄지어 서 있는 빌라는 루이 뷔통, 에르메스 등 명품 부티크로 바뀌어 명맥을 유지한다. 우아함의 정점을 이룬 듯한 노르망디 바리에르 호텔(Hetel Barriere le Normandy)이나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이 소유했던 대저택 스트라스뷔르제(Villa Strassburger)에도 직접 들어가볼 수 있다. 도빌의 인구는 약 4,000명에 불과하지만 주말마다 8배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파리에서 기차나 자동차를 이용해 2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런던에서도 비행기를 타면 2시간 만에 온다. 일부는 이곳에 별장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고 또 일부는 상류사회의 낭만을 간접 체험하려는 이방인일 것이다. 당연히 그중에는 한 인상파 화가의 행적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테다.


도빌 일대의 해변과 하늘을 외젠 부댕(Eugene-Louis Boudin)보다 더 탁월하게 표현한 인상파 화가는 없었다. 그는 옹플뢰르(Honfleur) 출신으로, 도빌에서 생을 마감했다. 모네보다 열여섯 살이나 많았지만 친구로 지냈고, 1873년 첫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도 참가했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 라 망슈 해협(La Manche)의 변화무쌍한 풍경은 부댕의 단골 주제였다. 실제로 노르망디의 날씨는 오락가락하고, 도빌에서 하루만 머물러봐도 비와 바람, 햇살과 안개의 종잡을 수 없는 출몰을 겪게 된다. 이런 대기의 변화를 얼마나 잘 묘사했던지, 부댕은 ‘하늘의 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휴양지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초창기 도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잘 차려입은 신사 숙녀가 긴장감이 감도는 파란 하늘 아래에서 망중한을 보내는 일상 말이다. 그 장면이 현재와 얼마나 비슷한지 놀라울 뿐이다. 휴식을 즐기는 남과 여, 해변에 서 있는 작은 캐빈, 항해를 준비하는 요트, 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짙고도 푸른 하늘. 도빌에서의 하루는 1865년의 어느 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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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빌의 경마장에서는 매일 승마와 폴로 훈련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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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코코 샤넬>의 배경으로 알려진 스트라스뷔르제 저택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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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의 형형색색 파라솔은 도빌을 대표하는 풍경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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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에르 호텔 객실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도빌의 아침. 해무 너머로 이웃 동네 투르빌쉬르메르까지 보인다.

 

 

Le Havre 르 아브르와 카미유 피사로
<The Port of le Havre>(1903, MuMa le Havre)

 

빅토르 위고(Victor Hugo) 거리 도로변 아파트 발코니의 문이 열리자, 한 노인이 걸어 나와 담배를 꺼내 문다. 콘트리트로 지은 아파트는 무척 견고해 보인다. 그는 거리를 힐끗 쳐다보다가 멀리 시선을 옮긴다. 퇴근 시간을 맞은 늦은 오후, 대서양 위 하늘을 뒤덮은 구름을 감상하려는 듯이. 그 아래 도열한 도심의 빌딩들은 오와 열을 맞춰 서 있고, 거리에는 19~20세기를 누비던 예술가의 과거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군데군데 서 있다. 르 아브르는 모더니스트의 무대다. 건축의 관점에서 볼 때, 형태와 기능이 조화를 이룬 이상주의적 공간 같다. 미술사의 관점에서 볼 때는 기념비적 장소라 할 수 있겠다. 인상파라는 명칭을 탄생시킨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를 이 도시에서 그렸다. 최근 미국의 한 대학교수는 <인상, 해돋이>는 모네가 1872년 11월 13일 오전 7시 35분 르 아브르 항구의 한 호텔에서 바라본 일출을 캔버스에 옮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1517년 프랑수아 1세(King Franeois I)의 명에 따라 건설된 르 아브르는 오랫동안 탐험가와 무역 상인을 설레게 했다. 파리와 가장 가깝게 자리한 항구였기에 신대륙을 향해 호기 어린 범선이 출발했고, 세계 각지의 특산품을 실은 무역선이 도착했다. 한때는 프랑스로 들어오던 커피 원두 대부분이 르 아브르 항구를 거쳤다고 한다. 그 정도로 수백 년간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항이었다. 항구의 활기와 해변의 여유가 공존하던 곳.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도시의 몰락을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과도한 폭격으로 주요 건물과 시설이 깡그리 파괴당한 것이다.


전쟁은 끝났다.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와 모더니즘 건축은 도시를 되살렸다. 종전 후 도시 재건에 몰두한 정부는 ‘콘크리트의 시인’이라 불리던 페레에게 원대한 프로젝트를 맡겼다. 주요 관공서 건물뿐 아니라 1만여 가구의 이재민을 위한 주거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 원대한 프로젝트. 모든 걱정과 관심을 한 몸에 받던 그는 한정된 예산으로 재주 좋게 도시를 차곡차곡 일으켰다.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은 곧바로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넓은 창에 개방형 공간을 전개한 시청사와 1만3,000여 개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사용한 생조제프 교회(St. Joseph’s Church)는 페레의 도전 정신과 세계관을 잘 드러낸다. 허나 뭐니 뭐니 해도 이 프로젝트의 절정은 6미터 24센티미터 길이로 공간을 모듈화한 아파트다. 절망에 빠진 이재민에게 선사한 삶의 공간이 이렇게 멋질 줄이야. 주택 전시관에 들러 공간과 가구가 딱딱 들어맞게 배치된 모습을 두 눈으로 필히 확인해보자. 형태와 기능이 완벽하도록 어울린 세계를 경험할 수 있으니까. 프로젝트는 페레의 사후에도 계속되어 1964년에 끝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유네스코는 재건된 시가지 전체를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려놓았다.


세계대전 전 르 아브르의 모습은 앙드레 말로 근대 미술관(Musee d’Art Moderne Andre Malraux)의 작품 속에 살아 있다. 이곳은 루앙 미술관이나 오르세 미술관 못지않은 인상파 컬렉션이 자랑이다. 도시의 과거를 품은 모네와 부댕의 작품들은 관람자의 상상력을 조곤조곤히 자극한다. 특히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의 1903년 작품 속 르 아브르의 항구 앞에서는 쉽사리 발걸음을 떼기 어렵다. 모든 인상파 화가의 스승이던 그의 마지막 여행지. 노년의 화가가 그린 항구는 만남과 기다림이 반복되는 삶의 풍경이 스며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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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르 아브르 시내. 계획도시답게 건물과 녹지 공간의 배치가 질서 정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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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아브르 시민의 휴식처인 시청사 앞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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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조제프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화려한 빛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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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페레가 설계한 아파트 실내. 6m 24cm 마다 기둥이 지탱하고 있다.

 

 

Mont Saint-Michel 몽생미셸과 폴 시냐크
<Mont Saint-Michel, Fog and Sun>(1897)

 

폴 시냐크(Paul Signac)가 그린 몽생미셸은 대기의 입자에 가린 성체 같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그 모습을 보면 감탄을 멈출 수 없다. 수평선과 맞닿은 땅 위에 홀로 도도하게 서 있어 숭고함마저 감돈다. 교회 첨탑 꼭대기에 솟아오른 천사 미카엘(Michael)의 날개는 하늘을 향해 V자 형태로 펼쳐졌고, 그 아래 건물들은 직사광선이 비출 때마다 주황빛을 발산한다. 그러다가 구름이 태양을 가리면 금세 빛바랜 화강암 성채가 되고는 한다. 자신이 한낱 관광지가 아니라 바위섬 위의 엄숙한 수도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이. 


작년부터 몽생미셸은 다시 완전한 의미의 섬이 되었다. 708년 천사 미카엘의 계시를 받았다는 생오베르(Saint Aubert) 주교가 이 외딴 바위섬에 수도원을 지었던 시대처럼 말이다. 신화적 유래로 탄생한 몽생미셸은 ‘성미카엘의 산’이라는 뜻. 산 같은 바위섬 주변의 조수간만의 차는 무려 14미터에 이를 정도로 심해서, 밀물 때면 수도원 입구까지 물이 들어찼다. 그럴 때면 바다 위에 떠 있는 수도원이 되었다. 하지만 19세기 말 육지와 연결하기 위해 만든 제방 때문에 지형이 바뀌었다. 퇴적물이 쌓이며 밀물의 깊이가 얕아졌고, 바위섬은 점차 육지 끄트머리의 바위산으로 변해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찾은 방법. 제방 길을 걷어내고 바닷물이 흐를 수 있도록 하는 것. 마침내 지난 10년간의 공사 끝에 몽생미셸과 본토를 연결하는 760미터 길이의 다리를 완공했다. 다리덕분에 이제 바닷물은 자연스럽게 바위섬 주위를 돌아 흐르고 조수간만의 차이도 예전만큼 회복 중이다.


입구를 통과하면, 교회까지 오르막 자갈 길이 이어진다. 그 짧은 구간에 기념품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 숙소가 오밀조밀 붙어 있어 사람들로 번잡하다. 공식적으로 이곳에 적을 둔 주민은 50여 명이나, 연간 방문객은 100만 명이 넘는다. 노르만 양식,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 양식이 뒤죽박죽 조화를 이룬 수도원과 교회 건물은 천 년이 넘는 역사를 대변한다. 처음 수도원이 생긴 후 종교 건물이 계속 추가되었고, 순례자를 위한 부대시설도 추가됐다. 브르타뉴(Bretagne)와 노르망디의 경계를 이루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방어 요새 역할도 필요했다. 프랑스대혁명 후에는 감옥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관련 시설을 또 덧붙였다. 그래도 고딕 양식의 걸작인 메인 건물 라메르베유(La Merveille)의 숭고함은 그대로다. 3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 위층의 교회와 수도원에서 수사들은 고립된 삶을 살았고 수도원장과 상위 성직자들은 중간층에서 귀빈을 맞았다. 순례자들은 지하층만 입장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성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공간은 13세기에 지은 아치 회랑(Cloetre). 사각형의 정원을 고딕 양식 기둥이 이중으로 둘러싸고, 사방의 아치 회랑으로 몇 움큼의 빛이 통과한다. 바다를 향한 한쪽 벽으로는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듯한 아치형 출입구가 뚫려 있다. 출입구 너머로 바닷물이 빠져나간 짙은 회색의 갯벌이 보인다. 썰물 때에는 몽생미셸 주변 1킬로미터까지 산책할 수 있다. 수세기 전의 순례자는 모두 그와 같이 걸어왔다.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바닷물의 웅덩이는 점점이 흩어져 후기 인상파의 점묘화처럼 윤슬이 반짝인다. 물 위에 떠 있는 수도원의 모습만큼 이 안에서 내려다보는 노르망디의 풍경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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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몽생미셸로 가는 길. 작년에 완공한 다리 덕분에 몽생미셸은 다시 완전한 의미의 섬이 되었다.

 

 

Auvers Sur Oise 오베르쉬르우아즈와 반 고흐
<Wheatfield with Crows>(1890, Van Gogh Museum)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Charles-Franeois Daubigny), 아르망 기요맹(Armand Guillaumin), 카미유 피사로, 장바티스트 코로(Jean-Baptiste Corot)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오베르쉬르우아즈를 거쳐간 예술가들. 그중 고흐는 이 변두리 마을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주인공이다. 그는 지친 심신을 달래고자 이주한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2층짜리 라부 여인숙(Auberge Ravoux)의 다락방을 빌려 지냈다. 시청사 바로 앞의 집이다. 아마추어 화가이자 의사인 폴 가셰 박사(Dr. Paul Gachet)가 고흐를 돌봤고 동생 테오(Theo)는 꾸준히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고흐는 자살하기 직전까지 70일을 이곳에 머물면서 70여 점의 유화를 완성했는데, 일생에서 가장 열정 어린 활동을 보인 시기다. 오늘날까지 작품은 마을 곳곳에 남아, 그곳을 찾아오는 이방인의 손을 빌려 불우했던 천재를 위로해주고 있다.


파리에서 차로 1시간이면 도착하는 오베르쉬르우아즈의 첫인상은 아담하다. 석회암으로 지은 라임색 주택과 녹음이 부풀어오른 가로수가 한적함을 더한다. 좁은 도로에 드문드문 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고양이의 움직임처럼 느긋하다. 알 수 없는 매력이 마을 전체에 조용하게 머무는 것 같다. 본격적으로 고흐의 자취를 좇기 전, 이곳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 샤토 오베르쉬르우아즈(Cheteau d’Auvers-sur-Oise)에 들러야 한다. 17세기에 지은 대저택으로, 현재는 인상파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각종 멀티미디어 기자재를 활용한 상설 전시 공간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관객이 마치 프랑스의 역사 속 한 장면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렇게 한바탕 인상파의 세계에 빠진 후, 저택을 빠져나오면 다시 고흐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가셰 박사의 초상(Portrait of Dr. Gachet)> 속 멜랑콜리한 표정의 주인공이 살았던 집을 시작해, 작품의 소재였던 몇몇 골목과 집을 마주친다. 고맙게도 각 장소 앞에는 원작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인상파의 순례객은 하나같이 작은 지도를 들고 배경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고흐는 대상의 외관을 똑같이 묘사하지 않았으나, 그가 표현한 인상(印象)은 대상을 더욱 깊이 꿰뚫는다. 그래서 실제의 모습보다 작품 속의 모습이 더 관객의 머리에 각인된다. 자칫 현재의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모습이 변했어도, 특정 장소에 가면 ‘아! 여기구나’라 는 놀라움이 새나오는 이유다. 고흐의 대표작 <오베르 시청(Auvers Town Hall)>과 <오베르 교회(The Church at Auvers)>를 지난 걸음은 오르막길을 올라 드디어 밀밭에 이른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인지 아닌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우울한 이 그림이야말로 자살 직전 고흐의 억눌린 감정을 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도비니의 정원(Daubigny’s Garden)> 같은 화사한 그림 또한 비슷한 무렵에 완성됐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밀밭은 기대보다 좀 평범하고 넓다는 것이다. 더불어 하늘과 좀 가깝다는 것도.


밀밭은 고흐와 테오가 묻힌 마을 공동 묘지로 이어진다. 묘지 한쪽 담장 앞에 자리 잡은 두 형제의 무덤은 아이비로 무성히 뒤덮여 있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밀밭에 서서 자신을 쐈고, 7월 30일 장례식이 거행됐다. 인상파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순례객들은 무덤 앞에서 잠시 묵념을 올리고 사진을 찍는다. “ICI REPOSE(여기에 잠들다)”. 어디에선가 바람이 불고 밀밭을 가리던 먹구름이 물러난다. 햇볕을 받은 마을은 한층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듯하다. 무거운 석관을 열고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간다 해도.

 

허태우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편집장이다. 노중훈은 사진 찍고 글 쓰는 여행작가로 프랑스 취재가 자신과 유달리 잘 맞는다고 한다.

 

*취재 협조 프랑스관광청 한국사무소(kr.france.fr), 노르망디관광청(normandy-tourism.org),

루앙관광청(rouentourisme.com), 도빌관광청(deauville.org), 르 아브르관광청(lehavretourisme.com),

프랑스 국립유적센터(monuments-nationaux.fr), 파리 일드프랑스지역 관광청(visitparisregion.com),

에어프랑스(airfranc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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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고흐가 그린 시청사와 실제 시청사 건물. 오베르쉬르우아즈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샤토 오베르쉬르우아즈의 정원. 17세기 프랑스식 정원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 “여기에 잠들다”라고 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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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마지막 무대였던 밀밭에서 마주친 현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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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lonely planet (월간) : 11월 [2015]안그라픽스 편집부 | 안그라픽스
지구촌 여행지를 다룬 여행전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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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론리플래닛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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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lonely planet (월간) : 11월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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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지닌 마음의 힘을 믿는 유설화 작가의 <장갑 초등학교> 시리즈 신작! 장갑 초등학교에 새로 전학 온 발가락 양말! 야구 장갑은 운동을 좋아하는 발가락 양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은 곧 질투로 바뀌게 된다. 과연 야구 장갑은 질투심을 떨쳐 버리고, 발가락 양말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위기는 최고의 기회다!

『내일의 부』, 『부의 체인저』로 남다른 통찰과 새로운 투자 매뉴얼을 전한 조던 김장섭의 신간이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저자만의 새로운 투자 해법을 담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 삼아 부의 길로 들어서는 조던식 매뉴얼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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