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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은 “진짜 혹은 가짜 기억은 어떤 공포를 줄 것인가”

『키브라, 기억의 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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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을 하나 쓰기 위해선 여러 가지 것들이 필요해요. 배경으로써의 장소도 중요한 요소이고요, 문제의식이랄까,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사색도 필요하구요, 어울리는 문장도 필요하고요,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이 오랫동안 머리에서 떠돌다, 어느 날 그런 것들이 화학적인 결합을 하면서 뭉칠 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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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치은 씨의 새 소설 『키브라, 기억의 원점』은 기억에 관한 소설이다. 쉽게 연상하듯, 기억이 상실된 자의 기록이다. 그런데, 그 기억을 잃은 자는 연쇄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스스로 갖는다. 이런 극악한 설정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혹시 정통 추리소설 작품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장은수 평론가의 말처럼, “세상이 자신을 기록하지 않는 부조리 속에서” 사회에 고발하거나 처방을 던지고 싶었던 것일까?

 

이치은 작가는 지난해 『노예 틈입자 파괴자』를 들고 5년 만에 독자를 찾아왔다. “꿈에 관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경계를 넘은 작품”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치은 작가는 꿈에 관한 소설을 두 편, 언어에 관한 소설을 두 편, 기억에 관한 소설을 두 편(한 편은 미출간)을 썼다. 이번에 “기억에 관한 소설”을 쓴 셈이다.
 
작년에 『노예 틈입자 파괴자』를 내고 1년 만에 장편소설을 또 냈습니다. 그동안 모두 5권의 장편소설을 내셨는데, 계속해서 장편소설만을 쓰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곰곰 되짚어 보면 처음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저를 쓰게 만들었던 책들이 대부분 긴 책들이었어요. 괴테의 『파우스트』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카프카의 『성』, 『소송』등요. 감정들을 짧은 호흡으로 뱉어낼 수 있는 시와 달리 문자들을 가지고 허구의, 조금 더 큰 세상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제게는 소설의 매력이었던 것 같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장편들을 주로 쓰게 되었네요. 한편으로 단편을 쓰기 위해선 이야기 , 사상 - 문제의식 등을 압축해서 밀도 있게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텐데, 제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을 아닐 테지만 최근 들어서는 점점 더 흥미가 가네요. 짧은 글들도, 완전히 독립적인 글들은 아니지만,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이번에 내신 소설은 제목에서 바로 연상되네요. 바로 “기억에 관한 소설”입니다. 그전에 썼던 소설들은 대체로 언어나 꿈에 관한 것이었죠? 기억을 가지고 쓰신 이유가 궁금하네요.


꿈에 대해선 아직 발표되지 않은 글까지 하면 대략 세 편의 긴 글을 쓴 셈이 되네요. 뭐 많이 쓰다 보니, 이제 다른 부분에 대해서 쓰고 싶어지기도 했구요. 기억에 대해서 쓰게 된 건, 그러니까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원인들을 떠올려 보면, 망각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첫 번째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의 작품을 읽을 수 없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독자가 될 수 없는 작가의 처지가 항상 저를 힘들게 했고 그러다 보니, 기억을 잃고 내가 쓴 책을 읽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공상에 빠지게 되었던 것 같고, 그게 이 책 전체의 모티브가 된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시간에 대한 흥미인데요. 소설 속에서 인간이 시간을 만났을 때 반응할 수 있는 방법으로 두 가지 커다란 대척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가 귄터 그라스 『넙치』에서의 넙치처럼 시간을 초월해서 늘 똑같은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인물, 다른 하나는 마치 보르헤스의 『1983년 8월 25일』에서의 상황처럼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른 인물이라는 설정. 그러니까 인간이 시간 속에서 편재(遍在)하느냐, 편재(偏在)하느냐 라는 문제겠죠. 시간 속에서,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의 흐름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동일한 정체성을 요구할 수 있는 근본 조건이 바로 이 기억이고, 그런 면에서 보르헤스는 자주 이 기억에 대해 딴지를 걸죠. 저 역시 이런 시간에 대한 흥미가 기억에 대한 글을 쓰고 싶게 하는 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그전에 ‘나’를 작중 화자로 등장시킨 소설이 없었나요? 이번에는 ‘나’가 작중 화자인데, 그전 소설과 달리, 그렇게 쓰신 점이 특이하네요.

 

일단 전에 쓴 장편들에선 커다란 세계를 조립하는 데, 하나의 시선보다 여러 가지 다른 시선에서 쳐다보면서 조금씩 조립해 나가는 방식을 선호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소설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고, 기억에 대한 이야기고, 그러니까 과거-현재-미래가 일단은 실에 꿴 것처럼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아이덴티티도 보관되는 그런 세상에 대한, 혹은 그런 세상을 복원하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잖아요. 그러다 보니, 일인칭 주인공을 쓰게 된 게 아닌가 하네요. 소설을 마치고 나서 롤랑 바르트의 「S/Z」라는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문구가 들어오더라구요. “'나'라고 말하는 것은 시간에 어떤 의미, 방향을 주는 것이다.” 확실히 시간에 방향을 주기 위해선 ‘나’가 필요한 듯해요.

 

이치은 작가의 작품들을 읽을 때면, 항상 독자 입장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읽어야 하죠. 약간은 불친절하달까요. 아니면 독자한테 어떤 확정적 사실을 전달하는 것을 배제하는 작가적인 원칙이 있는가요?


딱히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혹은 그것을 원칙으로 삼고서 글을 쓰지는 않는 것 같아요. 독서로 돌아가 보면 물론 찬 우유에 만 너덜너덜해진 콘플레이크를 독자들의 입에 쑤셔 넣어주려는 글들을-작가들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한 톤으로 분명한 이야기를 분명한 방식으로 전해주는 이야기도 매력적인 경우가 꽤 있거든요. 잘 모르겠네요.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 봐야겠네요.

 

작품 『키브라, 기억의 원점』의 표면을 흐르는 이야기는 한 기억상실자가 자신의 과거를 찾아 다니는 기록이라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단지 그 이야기는 그것으로만 그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작품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모리스 블랑쇼는 “작품을 쓰는 자는 격리되며, 작품을 다 쓴 자는 내쫓긴다”라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했었지요, 해서 작가의 숨은 뜻이라고 해도 저는 개개 독자의 오독(誤讀)과 비슷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작가의 오독이 숨겨지지 않고 작가에 의해서 이야기될 때 독자에게 가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고요. 그렇다는 이야기고요, 그 작가의 숨은 뜻이라는 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가정-동의 하에서 간단히 이야기의 근원을 말씀 드리자면, 자신의 책을 읽고 싶어서 기꺼이 기억을 잃은 자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고 싶다는 게 이 이야기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느덧 마흔 중반에 이르렀어요. 네 편의 소설을 썼었고, 이번이 다섯 번째입니다. 앞으로 얼마만큼 더 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소재로 소설을 쓰실 계획인가요?

 

쓰기를 마쳤는데 출간이 안 된 책도 있고, 지금 쓰고 있는 것도 있고, 그리고 쓰려고 일종의 시놉시스 같은 걸 잡아놓은 글감들도 꽤 있습니다. 죽기 전에 이 중 최소한 대여섯 개는 끝마쳐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미래를 누가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내일이라고 당장 이 쓰다 만 것들, 혹은 책이 되지 못한 글들을 다 불살라 버리고 싶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지금 쓰고 있는 건 다시 한번 시간-기억에 대한 글이고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매우 짧은 글들을 모아 놓은 글이 될 겁니다. 압축적이고 독립적인 글을 쓰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힘들지만 재미는 있네요.

 

이 소설의 각 장에는 키에르케고르라든가 움베르토 에코, 나기브 마푸즈, 보르헤스 등이 기억에 관해 언급한 짤막한 글들이 장식처럼 들어 있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제사(題詞)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다른 글에서 인용한 짤막한 글들을 책의 제일 앞 부분이나, 만약 나누어진 장이 있다면 거기다 배치하는 일을? 왜일까요?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요? 보르헤스 글을 읽고 나서 이런 고약한 버릇이 붙었던 것 같긴 한데...... 왜? 라는 항상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들을 잠시 담요로 덮어두고, 제가 실제 했던 일들을 떠 올려 보면, 각 장의 대강 내용을 정하고 나서, 이 장의 전체 제목으로 어울릴 만한 인용구들을 찾아 봤던 것 같아요. 저한테는 일종의 유희일 수도 있겠구요, 제 소설이라는 게, 제가 쓰는 모든 게 다른 누군가,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Text에 빚진 것이라는 선언일 수도 있고요. 인용된 글들은 대부분 매우 인상적으로 읽은 Text에서 뽑아낸 조각들입니다. 물론 처음 뽑아낼 땐, 어떤 글에 제사로 쓰겠다고 생각한 건 아닌 게 대부분이고요.

 

소설을 쓸 때에, 마치 건물을 짓는 것처럼 하자면, 어떻게 설계를 하고, 어떻게 구조물을 올리고, 어떤 색채를 칠하는지, 작가만의 방식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혹시 소설을 쓸 때마다 반드시 독자에게 이런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다는 메시지가 있는지요?

 

제 경우엔 장편을 하나 쓰기 위해선 여러 가지 것들이 필요해요. 배경으로써의 장소도 중요한 요소이고요, 문제의식이랄까,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사색도 필요하구요, 어울리는 문장도 필요하고요,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이 오랫동안 머리에서 떠돌다, 어느 날 그런 것들이 화학적인 결합을 하면서 뭉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일단 글의 제목과 글의 모티브와 글의 문체와 글의 줄거리와 글의 결말 등을 정리해요. 길게는 장편 소설의 1/4 가량 되는 분량의 글을 통해서 제 생각을 미리 정리한 적도 있어요. 그리고 비로소 소설을 쓰죠. 결말까지 정확하게 계획하고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어떤 경우엔, 제일 첫 부분을 쓰다가 결말을 미리 써 놓은 적도 있어요. 이런 방식의 단점은, 어쩌면 글쓰기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일 수 있는 즉흥성이나 우연의 개입 등을 막아 버리는 단점이 있어요. 조금 더 즉흥적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요, 철저하게 계획하는 것이 버릇이 된 것 같네요. 언젠가는 다른 방식으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작품을 쓰고 있는지, 향후 어떤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시간-기억을 소재로 한 짧은 글들의 모음을 쓰고 있어요. 스무 편 정도를 모아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제목을 ‘4시 37분의 결함’으로 할지, ‘새벽 3시 32분의 계란 후라이’로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습니다. 훌륭한 독자께서 실제로, 당신 소설이 형편없다고 얼굴 앞에서 이야기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해요. 소설 속이니까, 그리고 작가의 머릿속 구상이니까, 일종의 공포감이나 죄책감을 표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그게 글쓰기와 연관된 제 모든 공포의 근원이에요. 말도 안 되는 글을 쓰고 있는 건, 그리고 써 왔던 건 아닐까, 하는 공포. 하지만 ‘훌륭한 독자’를 타인으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아요. 각각의 독자는 각각의 오독 방식과 평가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제게 있어서, 단 하나, 대문자로 쓰일 수 있는 독자는 바로 저예요. 저는 아주 뚜렷한 주관과 감식안과 똥고집으로 남들이 쓴 책들을 맘대로 골라 읽고 멋대로 평가하죠. 아주 간단해요, 저는 독자로서의 제가 읽었을 때 만족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하지만, 글을 쓴 기억들이 남아 있는 이상, 제 글을 읽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죠. 그게 제 딜레마이고요, 그게 제 공포의 근원이고, 그게 이 글을 쓰게 한 충동이고요. 해서, 제가 가장 무서운 상황은 기억을 잃은 제가, 훌륭한 독자라는 이름을 가진 타인이 아니고, 바로 기억상실증자인 제가 제가 쓴 작품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상황인 거죠.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개선을 기대하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 같고...... 글을 쓰지 않고 생존해가는 방식을 찾아야겠죠. 책 읽기만으로 문자-문학에 대한 욕구가 모두 풀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살기 위해서 뭔가를 하겠죠. 데생을 배우던가, 뭐, 글쓰기 없이 살기 위해 뭔가 하려 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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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브라, 기억의 원점 이치은 저 | 알렙
흥미로운 추리소설적 구성과 전개 그리고 속도감 있는 문체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루어 온 작가 이치은의 신작 장편이 출간되었다. 꿈과 언어 그리고 소통에 관한 묵시록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보였던 『노예 틈입자 파괴자』(2014) 이후 1년 만이다. 이번에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작 『키브라, 기억의 원점』은 기억/기록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연쇄살인범이 된 한 기억상실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 가면서 느끼는 공포를 그려 보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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