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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요일, 보고 들은 자, 퇴폐에 거하다

김도언의 시인의 얼굴 아홉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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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일은 충분히 보고 들은 자다. 보고 들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맹독을 가진 영민한 뱀이 혀를 내밀어 세상의 냄새를 일별하고 절망하듯, 보고 들은 자는 안간힘을 다해 자신을 소모하면서 궁극적으로 거할 수 있는 탈속의 세계를 찾는다. 김요일은, 일찍이 퇴폐에 거한 드물고 귀한 시인이다.

아득히 그리운 그곳 / 아바나에선 모두가 시인이라네 / 시가든 대마초든 다디단 담배를 물고 아무 곡조나 흥얼거리지 / 아무도 무언가를 적지 않지만 / 인생을 조금 아는 사람들의 눈에선 / 당신 닮은 수련꽃이 몇 번이나 피고 졌다네
-  〈아바나의 피아니스트〉 부분, 김요일 시집 『애초의 당신』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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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두 개의 포지션

 

김요일 시인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문단에서 쉽게 목격할 수 없는 ‘퇴폐주의자’다. 그것은 범박한 수사가 아니라 실증적인 근거를 수반하는 말이다. 젊은 시절 허무에 취해 자폐적 삶에 깊이 침잠했던 고은 시인은 사석에서 김요일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놈이 퇴폐를 알아. 네가 한번 정착시켜봐. 한국에는 퇴폐가 없었어. 공자 때문에 일본에도 프랑스에도 중국에도 있는 퇴폐가 우리에게는 없어. 유교의 노예가 됐기 때문이야. 예술의 가능성은 퇴폐 없이는 안 돼. 유교는 시를 압살했어.”

 

공교롭게도, 황음으로 치달으며 문학적 전위의 극한을 실험했던 이상의 전기를 쓴 고은 시인이 한국의 퇴폐를 부정하는 것이 쉽게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김요일을 가리켜 퇴폐를 아는 자라고 말한 것은 퍽이나 예리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퇴폐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지인 중에 내가 포함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김요일 시인과 나는 ‘육친’에 버금가는 각별한 정을 나누는 사이다. 수년 전부터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홍대나 연희동 일대에서 얼굴을 맞대고 소주잔을 기울인다. 어쩌다 그것이 생략되기라도 하면 허전한 마음이 들 정도다. 아마도 나는 그에게 술잔을 가장 많이 받은 후배일 것이며, 그는 내가 술잔을 가장 많이 따른 문단 선배일 것이다.


어찌 보면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하기 어려워 보이는 막역하고 절친한 ‘정인’을 인터뷰의 대상으로 삼아 공식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리스크를 동반한다. 우선은 인터뷰어가 중립적인 보고자의 시선을 잃어버리고 인터뷰이에 대한 진술이 미화나 상찬 위주로 흘러가버리고 말 거라는 독자들의 당연한 ‘짐작’에 맞서야 한다는 과제가 따를 것이다. 당연한 ‘짐작’이라는 말이 다소 복잡한 사정을 암시하지만 그런 편견이나 의심을 해소하고 불식시키는 것이 이번 인터뷰의 관건이라면 관건이겠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내가 김요일 시인을 만나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공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가 우리 시단에서 상당히 드물고 귀한 포지션을 확보하고 있는 시인이라는 분명한 판단 때문이다. 그 포지션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한데 첫 번째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가 우리 문학 환경에선 예외적으로 퇴폐적 삶과 시학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시인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비상한 가족적 계보를 바탕으로 그가 우리 시단에서 독특한 관찰자의 역할을 수행해왔다는 점이다. ‘퇴폐’와 관련된 그의 초상은 뒤에서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그를 두고 독특한 관찰자라고 말한 근거에 대한 설명을 좀더 부연하도록 하겠다.

 

김요일 시인의 부친은 알려진 것처럼 시인 김종해 선생이다. 1963년에 등단해 현대시 동인을 거쳐 2004년 34대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신, 시력(詩歷)이 50년이 넘는 한국 시단의 존경 받는 원로다. 김종해 선생의 장자인 김요일 시인은 말하자면 부친이 앞서 걸은 시인의 길을 따라서 걷고 있는 셈이다. 그뿐인가, 김요일 시인의 숙부는 고 김종철 시인으로 그 역시 39대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시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그는 2014년 시인협회장 재임 중 지병으로 작고했고 장례는 시인협회장으로 엄수됐다)

 

문향이 넘치는 이와 같은 흔치 않은 가풍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김요일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 김종해 선생을 따라다니며 선생이 참여한 현대시 동인을 비롯한 당대의 기라성 같은 시인들을 관찰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닐 테니, 그의 경험이 드물고 귀하다고 말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이 스물여섯의 나이로 시단에 나온 뒤에는 박남철, 하재봉, 함민복, 정병근, 성귀수, 이윤학, 장정일, 이진우, 박정대, 조현석, 김중식, 전윤호, 주종환 등 선배 및 동료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시단의 중심 풍경을 목도하게 된다.

 

아울러 그 자신이 중견의 자리로 접어든 뒤에는 후배들의 시 작업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교유의 폭을 넓혔는데, 고영, 박후기, 황병승, 김이듬, 이준규, 박지웅, 박장호, 이해존 등이 그가 주로 어울리는 후배 시인들이다. 사실이 이렇다면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30년이 넘는 한국 시사의 현장을 김요일 시인만큼 섬세하고 유효한 거리에서 관찰하고 목격한 사람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그에게 유력한 관찰자, 혹은 지배적인 목격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퇴폐적 세계에 침잠하면서 만들어진 그의 고유한 이미지와 더불어 그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공적인 인터뷰의 장으로 그를 끈질기게 회유한 것이다. 최근 우울증과 무력증으로 신경정신과 처방을 받기도 한 그는 인터뷰를 두 번이나 고사했으나, 결국 인터뷰어의 회유를 이겨내지 못했다.

 

공식적인 약력에 의하면, 김요일 시인은 1990년, 최근 폐간을 결정한 《세계의 문학》에 신작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 과정이 꽤 특별했다는데 그 이야기부터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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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박남철 시인과의 만남

 

김도언 : 등단하던 무렵의 상황을 들어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그 당시 문예지에 신인상 제도도 없었을 때였고 등단 방식이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었다면서요. 《세계의 문학》도 신인상 제도라는 게 없었죠?

 

김요일 : 맞아, 신인상이 따로 없었고, 시인 지망생들이 문예지에 투고를 하면 편집위원들이 검토를 거친 후에 우수한 작품을 뽑아서 지면에 발표할 기회를 제공하고, 그렇게 발표를 하면 등단한 것으로 인정한 거지. 편집위원은 당시 문단의 중진 시인들이 맡았었고. 

 

김도언 : 그러니까 좋은 시가 투고되면 발표 지면을 주면서 등단시키고 투고작 중에 이렇다 할 작품이 안 보이면 그냥 지나가는 식이었다는 거죠? 그럼 그때 형도 정식으로 투고를 한 거예요?

 

김요일 : 투고를 한 게 아니야. 나처럼 등단하게 된 경우는 굉장히 드물지. 그 당시 인사동에 '평화 만들기'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그곳은 시인과 문인들이 모여서 술도 마시고 차도 마시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야. 어느 날, 혹시 '평화 만들기'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얼굴이나 술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혼자 찾아갔어. 한 아홉 시쯤 돼서 찾아갔는데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거야. 나중에 알았는데 김명리 선배하고 황학주 선배와 박남철 선배가 과격하게 언쟁을 벌이는 소리였지.

 

그때 내 눈에 확 들어왔던 게 박남철 시인이었어. 난 그분의 실험적인 해체시를 아주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나하고 눈이 마주치기에, 박남철 씨 아니냐고 했더니, 갑자기 나한테 눈을 부라리면서 어린 녀석이 감히 나한테 ‘씨’라고 그래, 너 누구야, 너 거기 앉아 있어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 나는 뭐 그때 한창 혈기가 있을 때였으니까 알겠다고 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기다렸는데 박남철 선배가 내 쪽으로 씩씩대면서 오더니 뭐 하는 놈이냐 묻더라고. 그래서 시 공부하는 사람이고 박남철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랬더니 좀 누그러지더라고.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가 혹시 시 쓴 거 있냐 그래서 가방에 시 쓴 게 한 대여섯 편 정도 있길래 보여줬더니만 갑자기 자기 가방에 넣으면서 내가 찬찬히 한 번 읽어볼게 그러는 거야. 그러고 그다음 주에 ‘시인학교’라고 시인들이 자주 가는 술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자리에 나갔는데 갑자기 나한테 하는 말이 너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하게 됐다고 해.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투고한 적도 없고 아직 준비도 안 돼 있다고 말했는데, 박남철 시인이 당시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인 이남호 선생한테 내 시를 보여주면서 그냥 밀어붙인 거야. 그래서 진짜 떠밀리다시피 《세계의 문학》이라는 잡지로 등단을 하게 됐지.

 

김도언 : 제가 형 등단작을 읽어봤는데, 문법의 해체와 음악적 요소의 도입 등, 신선한 요소가 많더라고요. 《세계의 문학》 말이 나와서 그런데 형의 등단지고 모지인데, 얼마 전에 폐간한다는 뉴스가 나왔잖아요. 어떠세요, 소회가. 전통을 가진 유서 깊은 문학잡지였는데. 저는 《세계의 문학》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상당히 충격적인 뉴스였거든요, 그것이 우리 문학계가 상업주의에 굴복한 어떤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이기도 하고.

 

김요일 : 나 역시 우리 문학과 인문학의 밑거름 역할을 해온 《세계의 문학》이 폐간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씁쓸했지. 특히 내가 관여한 『시인세계』라는 잡지를 문학세계사에서 펴내다가 중단하고 있는 상황도 떠오르면서 많이 우울했어. 이제 문학출판사의 맏형격인 민음사조차도 문화예술, 문학예술 잡지를 이끌어가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출판시장이 붕괴됐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 결국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문학이 백기를 든 셈인데. 특히 민음사는 다른 문예지를 펴내는 곳과는 달리 상징적인 권위와 자본력이 탄탄한 출판사 중 하나인데 거기에서조차 놓아버리면 앞으로 한국 문학계가 더 황폐해지겠구나, 이런 생각도 들었지.

 

 

대를 잇는 시업, 음악에서 시로

 

김도언 : 형 입장에선 좀 겸연쩍은 질문일 수도 있는데, 일반 독자들은 2대에 걸쳐 시를 쓰는 김종해 선생님과 형의 관계를 흥미롭게 생각할 듯해요. 어려서부터 아버님 가까이에서 시인의 삶을 지켜봤을 텐데, 기억나는 인상적인 장면은 없나요?

 

김요일 : 아버님은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성실하셨고 매사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었지.(김종해 선생은 1979년 문학전문출판사 문학세계사를 창립해 3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가끔 술을 드시고 집에 오실 때 땅콩이나 오징어 같은 걸 가지고 오셨는데, 잠을 자다 일어나서 맛있게 먹곤 했어. 하지만 매우 엄격하셔서 무서운 분이기도 하셨지. 아침에 우리를 깨우기 위해 다가오시면, 발소리만 듣고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지. 그리고 아버님이 참여하신 현대시 동인 친구분들이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셔서 술을 드시기도 했는데, 오실 때마다 내게 노래를 시켰던 게 기억나. 나는 조영남의 ‘딜라일라’를 자주 불렀던 것 같아. 노래가 끝나면 선생님들이 10원짜리 한 개씩을 손에 쥐여 주곤 했지. 이건청 선생님, 홍기삼 선생님 가족과도 자주 어울렸었고.

 

80년대의 문학세계사는 문인, 기자들의 사랑방 같았는데, 모여서 화투 치고 바둑 두며 웃기도 하고 싸우시기도 했었지. 어깨너머로 그분들의 노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밌었어. 이형기, 김광림, 오규원, 이근배, 이탄, 김원일, 김주영 등 당시 중진 문인부터 젊은 시인에 속한 장석주 시인, 정규웅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비롯해서 말단 기자였던 기형도, 이경철, 박해현 기자들까지 거의 매일 북적거렸어.

 

김도언 : 형은 정말 아무나 볼 수 없는 진풍경을 구경한 셈이네요. 형, 등단했을 때, 작품 발표되고 김종해 선생님의 반응은 어떠셨어요? 형이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걸 아버님이 알고 있었어요?

 

김요일 : 알고 계셨지. 내가 고등학교 두 번 잘리고,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인천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고교 백일장 공고를 봤거든. 근데 그 당시만 해도 검정고시생들은 지원을 할 수 없었어. 그래서 당시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두 살 터울인 동생 김요안의 이름으로 재미 삼아 응모를 했었는데 거기서 차상을 받게 된 거야. 그래 가지고 동생은 얼떨결에 인천대학교에 가서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정신 못 차리도록 막걸리 얻어먹고 집에 들어온 거지. (김종해 선생은 이날의 기억을 5년 전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장남 김요일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를 절대 쓰지 못하게 엄하게 꾸짖었어요. 요일이는 시 외에 음악적 재질과 소양이 있었습니다. 그 쪽의 권위자의 오디션도 받고 했습니다. 그래서 김요일은 시를 쓰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김요안이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습니다. 대문을 여는데 술 냄새가 확 났습니다. 고등학생이 어디서 술을 마셨느냐고 꾸짖으니, 형이 전국 남녀 대학 문예콩쿠르에 시가 당선되었는데, 형이 시상식에 못 가고 자기를 대신 보냈다고 했습니다. 인천대학교 시상식에서 사람들이 술을 권해서 취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일이에게 시를 한번 보자고 해서 읽어보니 제법 잘 썼었어요.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선을 하고 심사평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해서 내버려두었습니다.”)

 

근데 그걸 아버지가 보시고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그런데 그 이후에 가끔씩 내 딴에는 괜찮아 보이는 시를 썼을 때 시를 보여드리면 알았다, 그 정도의 말씀밖에 안 하셨어. 사실 나는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꾼 적은 전혀 없었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음악이었지. 특히 성악을 하고 싶었어.

 

김도언 : 그런데 왜 성악가가 되지 않고 시인이 되신 거죠. 어떤 극적인 전환점이 있었던 건가요?

 

김요일 : 극적인 전환은 아니고 자연스러운 전환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아버님이 시인이니까 우편으로 아버님에게 수많은 책들이 왔거든.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어린이책이 많지 않았서 그냥 100권짜리, 50권짜리 이런 전집 다 읽고 나면 읽을거리가 없었어. 그러면 아버지 서재에 있는 책들을 펼쳐보게 되지. 그러다 보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때 백일장 같은 걸 하면 학교 대표로 나가게 되곤 했어. 제일 신나는 시간이었지. 왜냐하면 공부를 안 하고 밖에 나갈 수 있으니까. 실컷 놀다가 1시간 전이나 30분 전쯤 후다닥 써서 내면 상도 주고.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음악이었어. 그래서 레슨도 받으면서 성악가가 되고 싶었는데 노래를 하면 할수록 나하고는 맞지 않는 거야. 성악이라는 게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곡에, 다른 사람이 붙여놓은 가사에 다른 사람이 반주를 하는 데 맞춰서 내가 노래를 하는 거잖아. 그냥 악기 역할밖에 못 한다는 게 불만족스럽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냥 나 혼자 내 스스로 만들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까 다시 시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 집에 배달되는 잡지나 시집들을 보면서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다가 우연치 않게 등단을 하게 됐고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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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와 전위를 감행한 실험

 

김요일 시인은 자신의 등단을 우연의 산물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그는 1993년 EBS에서 방영된 ‘1990년대를 여는 시인들’ 특집에 장석남, 함민복, 함성호, 김중식 시인과 함께 선정되는 등 90년대 초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의 등단작 중 한 편인 <자유무덤>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자유무덤……중얼거려보았다……밤알만한신문활자들이후두두후두두쏟아지는데나는우산을뒤집어그것들을주워담았다따스한것뾰족해서손을찌르는것물컹한것신냄새가나는것닥치는대로주워담았다”

 

그가 들려준, 혼돈과 광기에 취한 채 무덤을 탈출한 자유로운 유목민의 목소리는 한 세기를 포효한 거대한 이념이 쇠하던 1990년, 군사정권의 말기적 증세와 모더니즘의 창궐 사이에서 새로운 시대의 여명의 징후를 알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마 그가 시단의 호의를 받아들여 차근차근 시를 발표하고, 시집을 내고, 시업을 축적하는, 많은 시인들이 대체적으로 선택하는 길을 걸었다면 시인으로서 그의 길은 더 안정적이고 그의 시적 위상은 탄탄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1994년 돌연 좀 해괴한 실험을 감행한다.

 

『붉은 기호등』이라는, 한 편의 시가 시집 한 권을 이루는 형식과 내용이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실험장시를 출간한 것이다. 사실상, 『붉은 기호등』은 디스토피아적 전망 속에 해방과 자유의 욕구를 배치한 독특한 퇴폐적 세계의 창조를 통해 탐미의 궁극에 다다르고자 했던 시인 자신의 시학이 기괴하게 망라되어 있는 시집이었다. 

 

김도언 : 등단한 지 4년 만인 1994년 우리가 쉽게 성격을 규정하기 힘든 시집을 출간하잖아요. 『붉은 기호등』. 서사시도 아니고 장시라고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상당히 실험적이고 파격적이고 또 난해한 어떤 전위성을 내포한 시집으로 저도 읽었고 또 그 시집을 읽은 다른 분들도 불온한 상상력으로 이 세계의 위선과 허위를 폭로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장시를 쓰던 무렵의 형의 상황을 설명해주시면 좋겠어요. 어떤 세계에 골몰했었는지.

 

김요일 : 『붉은 기호등』은 시 한 편을 책으로 엮어서 낸 것인데, 나는 시가 됐든 다른 예술 장르가 됐든 예술 창작이라는 건 뭔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 시인이라면 자신의 시를 보는 사람들에게 낯설고 이상한 느낌을 안겨줘야 한다고 생각했지. 낯설고 이상한 느낌들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린 새로운 세계를 창출한다고 믿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붉은 기호등』을 그런 마음으로 썼어. 아직 세상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언어로 쓰이지 않은 시를 쓰는 기분으로. 그래서 『붉은 기호등』이 나오면 세상이 전복될 줄 알았지. 내 작품을 보고 세상이 깜짝 놀랄 줄 알았던 거야. 어쨌거나 『붉은 기호등』은 내 뜻대로 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 예술이라는 건 뭔가 세상과 불화하고 불협화음이 있어야 한다고 믿어. 음악에서의 불화음처럼. 그런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해서 교향곡처럼 여러 화음이 교차하듯이 말 그대로 교향곡 같은 그런 시를 써보고 싶었지. 그 시집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현대문학』에 〈혈의 누〉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야. 그 시를 실험적인 장시 형태로 늘인 거지. 그런데 『현대문학』에 작품을 발표했을 당시 항의 전화가 많이 왔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현대문학』에서 이렇게 쓰레기 같은 작품을 실을 수가 있느냐. 어떻게 시에서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가 나올 수 있느냐는 둥. 그러면서 나한테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둥 좀 작은 소란이 일었었지.

 

김도언 : 『붉은 기호등』의 옹호자는 없었나요?

 

김요일 : 그 반면에 박정대 같은 시인이 그 시를 읽고 너무 좋다고, 진짜 너무 좋다고 자신의 소감을 전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단짝 친구로 지내고 있고. 그런 실험적이고 모던한 계통의 시를 쓰는 시인들이 나를 옹호해줬어. 『붉은 기호등』이 그들과 계속 모이게 한 계기가 된 거지. 시집을 낸 이후, 시인들이 모이는 술자리에 가보면 사람들의 의견이 많이 엇갈렸지. 이건 시가 아니다. 시에 서정의 물기가 하나도 없는 건 시가 아니다, 이런 말씀을 오세영 선생님 같은 분이 하셨고, 다행스럽게도 내가 전부터 좋아했던 동료들, 장정일이나 함민복, 박상순 같은 시인들은 내 시를 좋아해줬었지.

 

김도언 : 방금 원래부터 좋아했던 동료들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형이 탁월한 감식안을 가진 관찰자자라는 생각을 해왔어요. 형이 생각하는 좋은 시인은 어떤 시인인가요?

 

김요일 : 시를 보면, 정말 타고난 시가 있고 다듬어진 시가 있고 그다음에 공들여서 쓴 시가 있는데, 시인도 마찬가지로 나는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은 타고나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 물론 열심히 공부하고 읽고 쓰고 하다 보면 시 비슷한 것을, 예술 비슷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런 시들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가 자기를 복제하게 되고 시대를 복제하게 되고 선배를 모사하게 되고 그렇게 되더라고. 다시 말해 자기만의 색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은 자기 색을 갖고 있고 자기 냄새가 있는 시인들이야. 그게 악취가 됐든 향기가 됐든.

 

김도언 : 시인으로서 형의 연혁을 다시 끄집어내볼게요. 『붉은 기호등』을 발표하고, 거의 10년 동안 시를 안 쓰는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가 2003년에 다시 시를 발표했죠. 〈아바나의 피아니스트〉라는 시가 그것인데요. 10년의 공백을 설명해주시면 좋겠어요.

 

김요일 : 그 공백을 설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아. 『붉은 기호등』을 낼 때, 나는 세상을 전복시키려고 했고, 실제로 세상이 뒤집어질 줄 알았어. 하지만 ‘그런 것도 시냐’ 같은 비아냥만 있었을 뿐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그때 그러면 『붉은 기호등』보다 더 놀라운 작품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어. 더 새롭고 더 낯설고 더 다른, 정말 극한의 실험을 해보겠다고 작정을 하고 시를 쓰기로 했던 거지. 그런데 쓰고 나서 보면 형편없는 거야. 낯설지도 않고. 아무리 해도 더 다르고 더 낯선 세상을 만들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다 보니까 아예 펜을 놓게 되었던 거야. 청탁은 꾸준히 왔지만 시를 보내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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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와 퇴폐, 시인의 화두 

 

이 글의 서두에서 소개한 것처럼 고은 시인은 김요일을 가리켜 퇴폐를 아는 자라고 했다. 사실 일상적인 문맥에서 퇴폐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에서 협의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 때 퇴폐는,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다자이 오사무를 비판하면서 보인 반응처럼 종종 반이성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학의 어떤 경향이나 태도를 설명할 때, 퇴폐는 분명 풍요롭고 다채로운 함의를 가지는 중요한 키워드로 간주된다. 일본은 다자이 오사무나 사카구치 안고 같은 ‘무뢰파’에 이르러 퇴폐를 표방한 데카당스 문학이 하나의 선명한 문학적 유파로 문학사에 등재되는데, 고은 선생의 지적대로 우리나라에선 좀처럼 ‘퇴폐의 문학’, ‘문학의 퇴폐’를 찾아볼 수 없다.

 

탐미와 쾌락이라는 절대적 이데아 앞에서 소모를 촉진하고 마침내 삶을 탕진하는 퇴폐를 실행하는 일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시인들에게 있어 퇴폐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큰 아나크로니즘적 환상으로 받아들여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지근거리에서 목격한 김요일은 자신의 삶과 희망까지 남김없이 탕진하면서, 결국은 실패가 예정된 탐미와 쾌락의 세계의 완성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자다. 그것은 죽음의 두려움까지도 내팽개치는 것이다.

 

나는 그가 자신의 탐미적 욕망 앞에서 머뭇거리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는 일 년 365일 중, 이틀 내지 사흘을 제외하곤 매일 술을 마시며, 말보로 담배를 하루 두 갑씩 피며, 상시적으로 여행과 음악에 심취한다. 그 극단적 도취가 퇴폐의 세계를 심화시키면서, 그에게 독특한 서정의 정조를 선사하는데 그의 두 번째 시집 『애초의 당신』에서 발견되는 허무와 초월, 비애감과 동경 가득한 시정詩情이 바로 그것의 실례라고 할 수 있다.    

     
김도언 : 형의 두 번째 시집 『애초의 당신』은 2011년도에 나왔죠? 『애초의 당신』을 보면 『붉은 기호등』에서 보여준 과격하고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어떤 전위성 같은 것은 상당히 엷어지고 어떤 세련된 서정, 비애와 우수 속에 퇴폐적인 걸 섞어 놓은 듯한 서정이 엿보여요. 제가 오독을 한 건지 모르겠는데.

 

김요일 : 말하자면 『애초의 당신』에 들어 있는 시들은 정말 말 그대로 술 한잔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골목길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나온 휘파람 같은 그런 시편들이야. 그런데 나는 자주 시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대부분은 시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돼. 말하자면 맹장 같은 거지. 어디 쓸 데도 없고 그렇다고 없앨 수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시를 쓰는 게 난 병 같은 거라고 생각해. 병이지. 쓸모없다는 걸 알지만, 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고. 아주 고약한 병이지.

 

김도언 : 병이라는 말이 참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네요. 그런데 실제로 형은 큰 병과 싸운 적이 있잖아요. 위암과 식도암 선고 받고 수술하고, 그게 벌써 7, 8년 됐죠?

 

김요일 : 내 삶의 모토는 언젠가 너에게 묘비명을 얘기했듯이 ‘뭐 좀 재미있는 일 없을까’ 같은 거야. 평생 호기심 속에서 재미있는 걸 찾았던 것 같아. 그런데 암 수술 하고 나서 몇 달 동안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고 사람들하고 교류하는 일이 줄어들다 보니까 진짜 말 그대로 죽어가는 느낌이 들더라고. 영양 있는 음식만 먹고 술, 담배도 안 하고 운동까지 하는데, 몸은 점점 안 좋아지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살 바에야 단 1년을 더 살더라도 내가 살아왔던 대로 재미있게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술, 담배를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그랬어. 그러다 보니까 놀랍게도 몸이 돌아오는 거야.

 

그 와중에 암 수술 후유증으로 다시 폐결핵과 급성 담석증 같은 게 찾아왔는데,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멈추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 최근에 괜히 우울하고 불안감을 많이 느껴서 진단을 받아보고 싶어 병원에 갔더니 알코올 중독 때문에 일어나는 증상이래. 의사가 심각하게 얘길 하더라고. 그렇다고 아주 안 마실 수는 없으니까, 적당히 마셔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어. 그래도 어쨌거나 매일 술은 마시고 있네. 조금 줄이기는 했어.

 

김도언 : 원래부터 그렇게 살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사셨어요? 이런저런 사고를 치는 바람에 고등학교를 두 번 잘린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서울교대)에 입학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때의 방황 속에 형의 문학이 추구하는 탐미, 퇴폐, 자유 같은 것이 배태되어 있었다고 봐도 될까요?

 

김요일 : 원래부터 살고 싶은 대로 살았냐고 물었는데, 탐미적인 세계 앞에서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는 고민 같은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어. 사실 개인을 떠나서 생각하면 무책임했지. 부모님께 걱정 끼친 것, 가족에게 걱정하게 한 것 죄송하고 미안하지. 고등학교 시절의 방황은 누구나 신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격랑의 시기이니까,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어. 나는 단지 울타리 밖으로 나가고 싶었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 책임 하에서 마음껏 맛보고 싶었지.

 

문학도 마찬가지야. 누가 내 시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건 매우 사소한 문제야. 나는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시를 쓰는 게 언제나 최우선이었어. 말하자면 그게 내 전위라고 할 수 있지. 나조차 만족시키지 못하는 시가 어떤 울림을 가지며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겠어. 내게 창조라는 것은 내가 먼저 느끼고 내가 먼저 즐거울 때 의미가 있었어. 말하자면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었던 것 같네.

 

그의 진술대로라면, 미와 쾌락의 제단에 삶을 바친 에피큐리언으로 김요일을 정의하는 것도 틀렸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미의 탐닉과 쾌락은 가장 정직하고 단순한 관념이어서 좌고우면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의 김요일은 그 원리를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수년 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는 사실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매우 고독하고 검박한 사람이다. 그를 둘러싼 다채로운 풍문은 그 사실을 종종 지워버린다. 내 생각에 그의 고독은 타고난 성정이 지나치게 솔직한 데서 기인하는 것 같고, 검박함은 그의 DNA 속에 깊이 내장된, 유서 깊은 어떤 시흥詩興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시비와 분란이 흔한 시인들의 술자리에서 그가 한 번도 언성을 높이거나 누구와 다투는 걸 본 적이 없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들거나 자기 의도를 강요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는 사리분별이 분명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와 예의의 폭도 깊고 넓다. 그럼에도 그는 동료 문인들로부터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호오의 대상이다.

 

그를 옹호하는 쪽이나 비판하는 쪽 모두 그 논리와 입장이 여일한데, 비판하는 쪽의 경우 김요일 시인이 견지해온 퇴폐적 삶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다소 복잡한 이견이나 오해가 개입됐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거기엔 ‘불편한 선망’으로 불릴 만한 어떤 굴절된 시선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퇴폐와 탐미를 정직하게 추구하는 자는 타인을 억압하지 않는다. 김요일 자신의 진술대로 자신이 먼저 즐거울 때만 작동하는 퇴폐적 세계인식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탕진함으로서 완성하는, 절멸과 초월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에 오히려 타인을 존중한다. 김요일은 충분히 보고 들은 자다. 보고 들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맹독을 가진 영민한 뱀이 혀를 내밀어 세상의 냄새를 일별하고 절망하듯, 보고 들은 자는 안간힘을 다해 자신을 소모하면서 궁극적으로 거할 수 있는 탈속의 세계를 찾을 뿐이다. 김요일은, 일찍이 퇴폐에 거한 드물고 귀한 시인이다.  

 

김요일 캐리커처.jpg


 

시인 김요일은 1990년 《세계의 문학》에 「자유무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출간 시집으로 『붉은 기호등』, 『애초의 당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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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도언 | 이흥렬(사진)

김도언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여섯 권의 소설책과 세 권의 산문집, 한 권의 평전을 펴냈다. 지금은 문학적 관점을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 시각적 이미지 작업과 연계해 세계와 타자를 읽어내는 실험을 하고 있다. 좋은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통찰과 아울러 삶의 총체성에 대한 상상력과 감수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https://www.facebook.com/doeon.kim.58

이흥렬(사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밀라노 IED 사진학과 졸업. 인물사진과 나무사진을 주로 찍고 있으며 최근의 작업은 '푸른 나무(Blue Tree) 시리즈이다.
https://www.facebook.com/yoll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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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세계의 문학〉에 「자유무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1990년대 대표 주자로 기대를 모았으나 실험으로서의 시에 대한 한계에 직면하면서 2003년까지 10년 간 절필했던 김요일 시인의 신작 시집. 수록된 작품들은 등단작 「자유무덤」을 제외하고는 모두 2003년 이후에 쓰인 시들이다. 『붉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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