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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장소의 음악 수준

Getz & Gilberto < o grande am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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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스피커에서 대화에 방해 되지도 않고 너무 낮아서 신경 쓰이지도 않을 정도의 황금 레시피 음량이 나왔다. 깜빡했던 스탄 게츠와 주앙 질베르토도 너무 반가웠고 당연하게도 그 집 파스타와 생맥주는 아주 성의 있는 맛이었다.

Getz-&-Gilberto-album-2.jpg

 

공공장소에서 제법 큰 음악소리가 귓구멍으로 파고들 때 나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우와 이 음악 뭐지? / 젠장 이게 뭐야?
멋져서 궁금한 음악이 있고 그저 소음에 불과한 것도 있다는 얘기다.

 

뭐가 됐건 쌀쌀한 늦가을 오후에 나는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집에 라면이 떨어져 대형마트에 갔을 뿐인데 똑같은 광고 음악을 계속 틀어재끼고 있었다. 어떤 건 삼년 째 똑같은 거였다. 음량마저 높아 귀를 겁탈당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공공장소에서 그토록 요란하게 반복적으로 내 민감한 달팽이관을 쑤셔도 되나. 손님이 라면을 고를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혼미해지면 매출도 손해 아닌가? 아니면 강제로 허접한 노래들을 외우게 해 우민화 하려는 음모 세력이라도 있는 건가.

 

요리 에센스 땡땡 해요~ /가격이 착해~ 플러스가 되니까~ /국내 생산 안심 따개~ /두부 달걀 귀요미 콩 좋아해~ /딴 건 넣지 마요 땡땡이면 충분해요~ /좋아졌네 좋아졌어~

 

쓰면서도 촌스런 멜로디와 노랫말들이 너무 선명해 눈물겹다. 아아 똑같은 곡 몇 개를 주구장창 반복하는 건 남의 정신건강에 똥침을 놓는 행위임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편애하는 음악도 그렇게 반복해서 듣진 않겠다. 근데 누추한 시엠송을... 소비자인 나에게 왜 이래? 차라리 쓸모 있는 영어표현을 반복적으로 틀어주든가.

 

큰 문제다. 안 그런 대형마트가 드물다. 장보는 분위기를 깔아주는 배경음악도 아니고, 공익을 위한 캠페인송도 아니고, 단지 이 물건을 사라는 광고로 고객의 귀를 후벼 파는 건 저질이고 가학적인 발상이다. 또한 중독과 세뇌를 통한 마약 마케팅 전략 따윈 이지적인 현대인에게 반감만 살 뿐이다. 정치 사회가 촌스럽다고 광고음악까지 꼭 그리 촌스럽게 들이대야만 하는가? 시장 분위기를 낸다는 것과 땡 상업주의의 더러움을 드러내는 걸 구분 못하는 수준은 곤란하다.


나는 마트에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가장 끔찍한 장면은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마트에서 그 노래들을 엄마랑 따라 부르는 모습이었다.

 

솔로생활 몇 년 만에 내가 너무 까칠해진 건가, 아니면 드디어 꼰대가 되어가는 건가. 아이유 연애 소식에 너무 충격을 받은 건가. 고뇌하며 차를 몰다보니 수도권을 벗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아무데나 가자, 하고 계속 밟았더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러나 휴게소에서 다시 달팽이관이 삐끗했다. 으아아 왜 고속도로 휴게소만 가면 주차장이 떠내려갈 정도로 뽕짝이 나오는 거야? 휴게소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유만 나온다고 해도 식상할 텐데 여행자가 좀 쉬려고 차에서 내렸다가 왜 난데없는 뽕짝 공격을 당해야 하는가? 그런 음악이 기분을 고조시키던 시대는 지난 것 아닌가? 휴게소와 시골 장날을 헷갈리다니, 엿을 많이 팔겠다는 건가? 헬조선 고속도로엔 무슨 장년층 관광버스만 달리나?


답 없는 의문들이 줄을 이었다. 뽕짝 메들리는 주로 차량 잡화와 메들리 음반을 파는 가게에서 튼다. 뮤지션에게 저작권이 제대로 돌아가는 음원인지도 의심스럽다. 그딴 소음공해를 당당히 일으키는 코너가 휴게소마다 배정된 걸 보면 무슨 음모가 있는 것만 같다. 아아 지들이 좋아하는 거 너네도 들으라는 꼰대 마인드인지도 모르겠고, 그걸 못 봐주겠는 나 역시 정말 꼰대가 되어가는 건지도 모르겠고 아아.

 

괴로워서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모차르트가 흘렀다. 듣기 좋은 음량이었다. 공기 좋은 바깥보다 냄새나는 화장실이 더 수준 높은 게 매우 아이러니 했다.

 

광주-카페.jpg

 

뽕짝을 피해 쉬지도 못하고 달렸더니 광주광역시 동명동이 나왔다. 예쁜 가게들과 게스트하우스가 즐비해 사랑스러운 동네였다. 숙소를 잡은 뒤 배가 고파 가장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그럴 듯한 메뉴들이 있었고 분위기가 좋았지만 나는 메뉴판을 내려놓고 나와야만 했다. 도저히 그 카페에 안 어울리는 음악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R&B를 추구하면서 리듬도 블루스도 없이 흉내 내기 기교로 대충 넘어가려던 허접 가요라 이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삼대 째 싫어하는 곡이었다. 어째서 2015년의 예쁜 카페에서 내가 이 음악을 또 들어야 하지? 음악은 호불호가 갈리는 취미영역이긴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거나, 여전한 생명력을 가진 명곡도 아닌 걸 자기 가게에 튼다는 건 음반을 안 산지 이십 년이 넘었거나 감각이 전혀 없다는 얘기 같았다. 당연히 음식 맛도 기대할 수 없을 수준일 게 뻔했다.

 

그 카페에서 나와 터덜터덜 거리를 걷는 동안 충장로 쪽에서 어떤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커다란 앰프 스피커로 김수철의 <젊은 그대>가 쿵쿵 울렸다. 그건 명곡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가 ‘으싸라으쌰’ 하는 응원형식 추임새를 넣는 게 대단히 지겨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추억의 7080 행사였긴 했지만) 길에서도 음악 때문에 시달리기만 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Untitled-2.jpg

 

그러나 역시 죽으란 법은 없었다. 멋진 보사노바가 흐르는 예쁜 식당을 발견한 것이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자 몹시 편안했다. 작년에 50주년 기념판이 나온 Getz & Gilberto의 <o grande amor>가 흘렀기 때문이었다. 좋은 스피커에서 대화에 방해 되지도 않고 너무 낮아서 신경 쓰이지도 않을 정도의 황금 레시피 음량이 나왔다. 깜빡했던 스탄 게츠와 주앙 질베르토도 너무 반가웠고 당연하게도 그 집 파스타와 생맥주는 아주 성의 있는 맛이었다.

 

 

 

음악은 한 공간의 디자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공공장소 BGM의 수준이란 그 중요도에 대한 이해 수준과 같다. 날씨나 콘셉트나 분위기에 맞게 선곡할 세련된 능력이 없으면 그냥 음량을 좀 줄이거나 클래식 채널을 깔아 놓거나 좀 그랬으면 좋겠다.

 

세상에 나처럼 귀때기가 예민하고, 안 웃기고, 심성이 관대하지 못한 꼰대 손님만 존재하진 않겠지만 음악 수준 좀 높이면 매출도 오를 것임을 장담하는 바다.

 

그나저나 얼떨결에 간 광주여행 참 좋았다. 무슨 애호박찌개가 엉엉, 예술이 따로 없었다. 뜻밖의 지출 때문에 당분간 라면만 먹고 살아야겠지만. 엉엉.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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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빠지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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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Stan Getz & Joao Gilberto - Stan Getz & Joao Gilberto

<Stan Getz>,<Joao Gilberto>17,800원(19% + 1%)

스탄 게츠와 조아오 질베르토의 환상적인 콤비로 경쾌하고 산뜻한 '보사노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앨범. 모든 트랙이 다 멋지지만, 타이틀이라 할 수 있는 'The Girl from Ipanema'는 조아오 질베르토와 그의 부인인 아스트루드 질베르토가 보컬로 참여한 곡으로 조곤조곤 읊조리는 듯한 보컬과 상쾌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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