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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CEO, 인생 후반을 그림으로 열다

『그림 수업, 인생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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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다 보니 인물들을 더 알고 싶어서 책을 찾아 읽고, 뉴스나 SNS에 관련 정보가 뜨면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그리기 시작할 때보다 훨씬 더 대상 인물들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린 것을 후회하게 한 분들은 없었습니다.

그림수업, 인생수업-표지평면.jpg

 

 

화실 문을 두드리다
 

“저… 그림을 배워 보고 싶은데요….”
“전에 그림을 그려 보셨어요?”
“아니요. 고등학교 때 미술 시간에 그려 본 게 마지막이에요.”
화실 선생님은 스케치북과 4B 연필을 주더니 대뜸 수평 줄 긋기부터 시킵니다. 다음 수직 줄 긋기, 빗금 줄 긋기… 그러고 나서 긴 직사각형을 그리게 하더니 그 안에 0부터 100까지 점차적으로 명암을 표현해 보라고 했습니다. 첫 미술 수업 세 시간이 이렇게 지나갔습니다.


‘내가 지금 뭐하나? 애들같이 줄 긋기나 하고… 그래도 기초가 중요한 거라고 늘 이야기해 왔으니 나도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말과 행동의 일관성이 있겠지!’


시키는 일에 익숙했던 사람이 학생이 되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에 느낀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2013년 전문 경영인으로 일하던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문득 ‘그림을 배우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니던 회사가 홍대 부근이라 적당한 화실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30년의 직장 생활을 끝내고 인생 후반전의 출발, 그림 공부가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성격적으로 무엇을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중도에 잘 그만두지 못합니다. 단골 밥집이 생기고 나면 다른 식당에 가고 싶어도 ‘단골집 주인이 기다리거나 서운해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차마 발길을 못 돌리는 타입입니다. 그럼에도 3년 가까이 그림을 그리다 보니 지루하거나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참 잘하셨네요!”라는 화실 선생님의 칭찬 덕분이었습니다. 어릴 적 공책에 ‘참 잘했어요’라는 선생님의 스탬프를 받고 좋아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인정받고 칭찬 받는 일에 목마른 존재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선생님의 칭찬에도 그림을 그만두고 싶은 고비는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림 실력이 늘지 않고 마음처럼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때는 속이 상했습니다. 누군가 내 그림을 흉보는 것 같아 창피해서 찢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매순간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선생님이 조금 손보면 그림이 그럴싸해지는 겁니다. 망친 그림이라는 것은 없고 조금 고치면 좋아지는 그림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선생님이 조금 만져 준 그림을 제 솜씨인 것처럼 주변에 자랑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그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실력이 늘면서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게 된 거지? 미술부 활동을 한 적도, 그림으로 ‘수’나 ‘우’를 받아 본 기억도 별로 없는데….’


기억을 더듬다 보니 1964년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어린 나와 마주칩니다. 당시에는 형편이 어려운 집이 많아서 미술 시간에 크레용을 준비해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저도 그 아이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미술 수업이 있는 날, 학교 앞 문방구에서 도화지는 한 장 샀는데…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날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짝이 크레용을 갖고 오지 못한 사람들은 크레용을 나눠서 쓰도록 해라.”


마음 착한 짝이 크레파스를 내밉니다.
“여기 있어. 같이 쓰자.”


짝이 내민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데, 아니 크레파스가 왜 이렇게 쉽게 닳는 것입니까? 조금만 힘주어 색칠하면 쑥쑥 닳는 게 제 눈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어린 저는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크레파스를 살짝 쥐고 연하게 선을 긋습니다. 색칠도 살살합니다. 크레파스가 최대한 닳지 않도록 하려고요. 그러면서 굳은 결심을 합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48색 크레파스를 사서 ‘빡빡’ 문지르면서 그림을 그려 봐야지.’


그것이 제 마음에 심긴 씨앗이 된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파스텔을 빡빡 문지르면서, 또 유화물감을 두껍게 덧입혀 가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게 그려서 행복한 게 아니라 마음껏 물감을 쓸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몇 년 전 외신을 통해 3만 년 전의 씨앗에서 꽃을 피운 러시아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매머드 화석 유적지인 시베리아의 콜미아 강둑에서 석죽과 식물인 실레네 스테노필라의 열매를 발견한 러시아 과학자들이 그 열매 속 씨방에서 세포를 추출해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다고 BBC 뉴스가 보도한 것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씨앗은 오래되어도 여건만 맞으면 싹을 틔울 수 있고 꽃을 피울 수 있구나.’
그러고 보니 약 50년 전에 제 마음에 심겨진 그 작은 씨앗이 지금 꽃 피우게 된 것은 아닐까요?

 


왜 인물화를 그리게 되었나


“누구를 그리고 싶으세요?”
“좋아하는 사람이요.”


마음속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한 작품이 완성되려면 수천 번의 붓질을 해야 하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리는 게 고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실에서는 데생력을 기르기 위해서 연필이나 목탄으로 인물 그림을 많이 그리게 합니다. 인물 그림은 사물 소묘와는 달리 조금만 비례가 어긋나도 티가 확 나지만 계속 그리다 보니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작은 붓질에도 인물의 인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에 인물화의 매력은 섬세한 붓질로 살아 숨 쉬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평균 8~9번 정도 화실에서 작업을 했습니다. 한 번에 세 시간 정도 그리니까 온전히 24시간 정도 걸립니다. 덧칠하기 위해 물감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하면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얼추 한 달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사람들을 좋아하게 됐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들이 제 마음에 크게 부각된 장면과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경섬유종을 앓고 있는 사람을 끌어안아 줄 때였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27년 옥살이를 한 모습이 젊었을 때보다 훨씬 온화해진 것을 보았을 때였고, 오바마 대통령은 쪼그리고 앉아 대테러 작전 진행 보고를 받는 모습에 반하면서였습니다. 그림을 그려 나가면서 제가 좋아한 사람들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진정성’입니다.
그들이 보여 준 진정성은 크게 세 가지 모습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첫째는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다.
둘째는 말과 글에 영성과 통찰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자기가 맡은 일,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에게 무한책임을 지려 한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텐데도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붓는 모습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물론 제가 그린 분들이 모든 점에서 다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진정성’이 작은 허물들을 덮을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인물들을 더 알고 싶어서 책을 찾아 읽고, 뉴스나 SNS에 관련 정보가 뜨면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그리기 시작할 때보다 훨씬 더 대상 인물들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린 것을 후회하게 한 분들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마음의 대화까지 주고받으면서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은 예상하지 못한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깨달음과 기쁨을 여러 사람과 나누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나무를 심는 사람들’의 이수미 대표가 『그림 수업, 인생 수업』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내자는 제안을 해서 겁도 없이 덥석 받아들였습니다.


훌륭한 분들인데도 불구하고 제가 아직 그리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제가 그분들의 진정성을 체험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그분들의 진정성을 잘 나타내는 이미지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 주신 분들께,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 맞장구쳐 주고 깨달음을 보태 준 많은 분들께 지면을 빌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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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수업, 인생 수업김준희 저 | 나무를심는사람들
30년 넘게 교육 사업에 종사해 온 CEO가 퇴직 후 취미로 시작한 초상화 그리기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는 왜 초보자에게 가장 어렵다는 인물화 그리기에 도전했을까? 넬슨 만델라에서 아내의 초상화로 마무리되는 그의 화폭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한 인물의 초상을 완성하기 위해 수천 번의 붓질을 하면서 저자는 기업 경영이든 그림 수업이든 살면서 절대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사람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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