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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과 함께한 마지막 2년의 기록

『개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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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어머니와 사별하고 구마모토 집에서 홀로 늙어가고 있는 아버지. 다케는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어 여기서 나와 함께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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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조급하다.
서두르지 않으면, 다케에 대한 기록이 수박 겉핥기로
끝나버릴지 모른다.


다케. 태어난 지 13년 된 저먼 셰퍼드. 인간의 나이로 56세. 개 수명으로 따지면 애저녁에 저세상으로 떠났을 나이. 내가 두 딸을 데리고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지 15년이 지났다. 처음 미국에 첫발을 내딛고 1년 반 후에 다케를 만났으니, 이국 생활의 대부분을 다케와 동고동락한 셈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까운 공원으로 다케와 산책을 나갔다. 공원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길로 발걸음이 향한다. 다케가 어렸을 적부터 줄곧 걸었던 길. 다케나 나나 융통성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답답한 부류인지라, 일단 걸음을 떼기 시작하면 마지막까지 똑같은 코스를 주파하지 않으면 영 찜찜하다. 요즘은 노쇠해진 다케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공원과 집 사이를 오갈 때는 차를 탄다.


그렇게 오늘도 다케의 산책 코스를 한 바퀴 돌고 주차장에 돌아왔는데 아뿔싸, 차 키가 없어졌다. 중간 어딘가에 떨어트린 게 틀림없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다케의 목에 감긴 리드 줄을 당겼다. 다케는 잔뜩 골난 얼굴로 네 발에 힘을 주며 완강히 버틴다. 나의 긴박한 사정을 알 턱 없는 다케는 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눈치다. 안 그래도 늙어서 비실비실한데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걸은 탓에 노견의 몸뚱어리는 파김치가 되었을 터. 못 가겠다 고집을 부리는 것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렇다고 다케만 덩그러니 홀로 남겨둘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면 할 수 없다.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나는 리드 줄을 풀어버리고 총총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면 제아무리 고집불통 다케라도 마지못해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긴다.


언제나 다케는 나를 따라온다. 아무리 리드 줄을 있는 힘껏 당기고 버티며 ‘가기 싫다!’라는 무언의 항의를 강력하게 표현해도 내가 리드 줄을 휙 풀어버리고 걷기 시작하면 다케는 움직인다. 개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작동하는 것이다. 자신을 키우는 주인에게는 저항할 수 있어도, 자신이 지닌 태생적인 그것, 요컨대 개의 마음에는 저항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원치 않는 상황 앞에서도 다케는 개의 마음에 따라 힘겹게 굼뜬 발걸음을 내딛는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다케가 지닌 개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나도 오늘만은 그 모습이 참 안쓰럽다. 나는 “조금만 더 가자, 옳지!” 하면서 부드럽게 다케를 다독이며 앞으로 이끌었다.


13년 전에는 나도 개에 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초짜였다. 개를 키우는 데 산책은 당연한 일상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개의 체력에 대해선 참으로 무지몽매했다. 나는 당시 세 돌을 앞둔 막내딸 도메와 함께 다케의 산책을 시키곤 했는데 딸이 아직 어려 늘 유모차를 대동했다. 생후 4개월에 접어든 다케는 식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는데, 산책 중에 틈만 나면 에너지가 폭발해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잠시 도메를 챙기느라 리드 줄이 헐거워지기라도 하면 기회는 이때다 하며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주변을 헤집고 다녔다. 쫓아가면 다케는 보란 듯이 훌쩍 더 달아났다. 덕분에 동네 사람들은 미친 듯이 질주하는 천방지축 강아지와 헉헉대며 유모차를 밀고 그 뒤를 쫓는 주인 간의 볼썽사나운 추격전을 심심찮게 목격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산책 도중에 역시나 리드 줄을 날쌔게 빠져나와 저만치 뛰어가던 다케가 무슨 일인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어라, 저놈이 웬일이야?’ 하며 다가갔더니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그득하게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처음엔 영문을 몰라 멍하니 바라보다가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너도 유모차 타보고 싶니?”


그랬더니 다케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고는 단숨에 유모차에 올라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날 막내딸을 팔에 안고 강아지를 태운 유모차를 밀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큼지막한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던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나이가 든 지금은 귀가 조그매졌다. 어릴 때는 얼굴이 작고 호리호리해서 귀만 보였는데, 나이를 먹어 몸집이 커지니 얼굴도 덩달아 커져서 귀가 상대적으로 작아진 것이다.


다케가 성견이 되자, 무엇보다 주체하기 힘든 개의 혈기를 자제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침 산책은 내가, 저녁 산책은 둘째 딸인 사라코가 맡았다. 겨울이 되면 거리가 금세 어둑해지므로 사라코는 캄캄해지기 전에 다케를 산책시키려고 꽤나 애를 먹곤 했다.


훈련소를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훈련은 사라코가 담당했다. 그러나 운전면허도 없고 돈도 없는 철부지 중학생 소녀가 개를 착실히 훈련교실에 데려다 주고 비용을 지불할 리 만무했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아침 산책을 시키고 사료를 주고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이왕 시작한 김에 나는 경찰견도 취급하는 전문적인 훈련소에 다케를 등록시켰다. 대형 사냥개인 저먼 셰퍼드는 거친 공격성을 통제하는 복종훈련과 공격성을 드러낼 때 이를 신속하게 제어하는 공격훈련이 필수였다. 우리 모녀는 매주 토요일마다 다케를 훈련교실에 데려갔고 위탁훈련도 여러 번 받았다.


초반에는 나나 사라코나 꽤나 진을 뺐다. “기다려!”라고 명령해도 사라코가 가버리면 다케도 벌떡 일어나 쪼르르 따라가기 일쑤였고 훈련사가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모른 척 달아나 내 뒤나 차 안에 쏙 숨어버렸다. 졸지에 문제견의 보호자로 낙인찍힌 사라코는 “다케는 정말이지 구제불능이야. 사춘기라도 온 거야 뭐야!” 하고 짜증 섞인 울분을 토해내다가 결국은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본인이야말로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하던 구제불능 시절이라 다케한테 그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었으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다케는 무사히 초반 훈련을 마스터하고 고난이도 훈련에 들어갔다. 이를테면 악인(개의 공격을 대비해 보호복을 입은 훈련사)을 향해 무섭게 짖어대는 훈련, 악인를 쫓아가서 주인의 칼 같은 명령 한마디로 그를 덮치고 주인의 명령 한마디로 공격을 멈추는 훈련 등등.


다행히 휴일을 반납하며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무섭게 짖어대는 훈련은 손님이 올 때마다 효과를 발휘했다. 악인으로 추정되는 낯선 이에게 덤벼드는 훈련도 딱 한 번 쓸모가 있었다.


어느 날 사라코가 다케를 공원에서 산책시키던 중, 그녀에게 접근해온 공원 경비원 남자를 다케가 문 적이 있었다. 소식을 듣고 내가 한걸음에 달려가서 사태는 금방 진정되었으나 상대방이 횡설수설하는 태도가 영 석연치 않았다. 나중에 사라코에게 직접 얘기를 들어보니, 그 남자는 종종 혼자 공원을 걷는 소녀들에게 접근해 경비원 차림새로 상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뒤에 해코지를 하곤 했다는 것이다. 아찔했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다케가 모든 가족에게 융숭하기 그지없는 영웅 대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한번은 집을 공사하던 중에 집 안에 들어온 전기기사에게 달려들어 문 적이 있었다. 다케가 훈련소에서 배운 매뉴얼에 의하면 공교롭게도 기다란 자를 가지고 집 안에 들어온 전기기사는 ‘무기를 지닌 채 집 안에 무단 침입한 낯선 사내’, 즉 악인의 모습이었던 것. 다행히 피해가 크지 않았고 전기기사도 개를 키우는 사람이라 너그러이 이해해주어 별 탈 없이 넘어갔다.

 

그 시절 덩치가 크고 용감무쌍한 다케는 못하는 게 없었다. 나와 산책을 나갈 땐 공원을 걸었지만 세 딸과 산책을 나가면 두 아이가 탄 자전거를 다케가 끌어서 언덕길을 내려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때문에 아이들이 자전거에서 넘어지고 자빠져서 다치는 일도 더러 있었으나 그만큼 아이들과 다케 사이에 정이 새록새록 쌓여갔을 테니 그 또한 추억이려니 했다.


사라코나 도메가 친구들과 함께 산책을 나가면 다케에게 본능적으로 개의 마음이 작동했다. 다케는 늘 여자아이들의 든든한 백그라운드 역할을 자임했다. 곁에서 지켜보다가 혹 무리에서 뒤처진 아이가 있으면 얼른 그 곁으로 다가가 무리 안으로 이끌기도 했는데, 이럴 때 다케의 모습은 꼼꼼한 인솔자 저리 가라였다. 무리를 휙 둘러보는 다케의 눈동자가 쉼 없이 움직인다.


‘하나, 둘, 셋…… 어라, 한 명이 부족하다.’


무리를 통솔하고 인원수를 셈하고 무리에서 벗어난 자를 챙기는 일은 양떼를 돌보는 목양견이었던 저먼 셰퍼드가 지닌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19세기 말에 독일에서 혈통이 개량되어 지역 목양견과 이리 혼합견을 교배시켜 만들어진 셰퍼드는 제1차 세계대전에 군용견으로 활약했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세계적으로 자손이 번성했다. 참고로 전쟁 당시 독일과 적대국이었던 영국은 독일에 대한 반감 때문에 저먼(German) 셰퍼드를 알자스라고 부른다.


내가 읽은 동물책에는 저먼 셰퍼드가 늠름하고 영리하며 충성심이 강한, 한마디로 공격과 수비 모두 탁월한 야구선수 같은 개라고 적혀 있었다. 구구절절 옳은 얘기다. 지금까지 길러온 소형견이나 시바견(일본 토종개), 스피츠 피가 섞인 잡종견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케는 보통의 개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음식과 산책에 관한 무시무시한 집착을 제외하고는, 인간이 사는 모습과 하등 다를 게 없을 정도였다.


중년기에 들어서자, 다케는 무슨 일에든 심드렁하고 세상만사 다 귀찮다는 얼굴로 자기 침대에 드러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 모습을 본 가족이나 친구들은 병원에서 개 항우울제를 처방받는 게 어떠냐며 넌지시 권하기까지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절 다케의 모습은 정말이지 갱년기 우울증을 겪는 중년 여성 같았다. 그러다 더 나이를 먹어 할머니 개가 되더니 우울증에서 다소 벗어났다. 체념하고 포기한 걸까.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도 한동안 공격적인 성향의 우울증 증세를 보이다 병원에 입원하고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진 뒤로는 우울증이 한결 나아져 (손발이 마비된 직후엔 우울증이 도리어 심해졌지만 이것도 금세 극복했다) 평온한 노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 다케도 어머니와 같은 과정을 밟고 있는 게 아닐는지.

 

다케와 산책을 다니는 공원에는 초록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잔디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울창한 유카리 나무숲 뒤편에는 풍성한 자생식물 구역이 있었다. 우리는 집 앞마당처럼 마음껏 그곳을 산책했는데 얼마 뒤 잔디밭은 주차장으로 변했고 유카리 나무숲 절반가량이 깎여 나간 자리에는 노인센터 병설 커뮤니티 센터가 생겼다.


자생식물 구역까지 없어졌다면 상당히 섭섭할 뻔했으나 다행히 그곳은 살아남았다. 대신 도보길이 만들어지고 주변에 울타리가 세워져 내부는 출입이 금지되었다. 우리는 가끔 인적이 드물 때 슬쩍 안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오랫동안 정든 공간이라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 어떤 식물이 자라고 꽃은 언제 피고 열매는 언제 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신비롭고 생명력이 넘치는 이곳을 거니노라면 마치 드넓은 산자락을 휘젓고 다니는 야인이 된 착각에 사로잡혔다.


옛날 옛날 미국의 광활한 산속에 야생마 같은 남자가 홀로 살았다. 인디언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는 사냥을 하거나 군대에게 길을 안내하거나 곰고기 햄이나 사슴고기 육포를 만들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거칠 것 없는 바람처럼 살아가던 그는 어느 날 분신처럼 지니던 총과 함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끝없이 펼쳐진 풀밭에서 뚜벅뚜벅 걸음을 옮길수록 자유로운 야생의 삶에 대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따지고 보면, 이 공원처럼 개의 산책에 최적화된 장소도 드물었다. 늘 주변에는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다케는 아이들과 있을 때는 양떼를 통솔하는 개의 마음에 충실하지만 나와 있을 때는 주인을 지키려는 개의 마음에 충실했다. 그래서 우연히 다른 개를 만나기라도 하면 날카로운 이빨을 곧추세우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공격 태세를 갖췄다.


더러 개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대부분 다케의 일방적인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상대 개가 상처를 입고 벌러덩 나자빠지는 일이 늘어날수록, 내가 상대 견주에게 싹싹 빌며 치료비를 지불하는 일도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산책 중에는 다케가 나보다 먼저 다른 개와 맞닥뜨리지 않도록 나는 희미한 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우고 조그만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걸음을 재촉하는, 그야말로 개보다도 예민한 감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걸음을 걸을 때는 항상 “내가 먼저!” 하고 반복했다. 그러면 다케는 그 말을 기억하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공원 곳곳에는 아기자기한 오솔길이 여러 갈래로 나 있고 양 옆으로 무성한 덤불이 이어졌다. 덤불 속에서는 사람이 노숙한 자취가 느껴지기도 했고 심지어 쓰다 버린 콘돔을 목격하기도 했다. 다케는 킁킁거리며 덤불 속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보통 내가 부르면 바로 나왔지만 감감무소식일 때가 있었다. 엄격하게 훈련된 습관과 충성을 바치는 주인을 모두 저버리면서까지 몰두하게 만드는 또 다른 개의 마음이 작동한 탓이리라.


그렇게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 돌아온 다케는 연신 입가를 핥아댔다. 무언가 먹은 게 틀림없었다. 노숙자가 먹다 버린 음식인지 누가 몰래 싼 인분인지 냄새로 대번 짐작이 갔다. 그럴 때마다 “왜 이런 걸 먹은 거야. 더럽게!” 하고 언성을 높이며 나무라도 보지만 다케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끔벅거리며 태연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산책길을 걷다 보면 붉은 흙 표면의 가파른 언덕이 나온다.


다케가 팔팔해서 아무리 달리고 또 달려도 조금도 지치지 않던 시절, 나는 이 언덕 위에 서서 아래로 공을 던졌다. 다케는 이내 다가가 그 뒤를 쫓아갔다. 어디에든 마구 던져도 다케는 언덕 아래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질 듯한 기세로 반드시 공을 찾아오곤 했다. 나는 위에서 다케의 팔딱거리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공의 무엇이 너를 그토록 매료시키는 거냐.


때로는 나뭇가지에 공이 걸릴 때도 있었다. 그러면 다케는 똑바로 서듯이 뒷발에 힘을 주고 서서는 엉금엉금 나무를 타고 올라가 기어이 공을 잡아왔다. 수풀 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릴 때도 있었다. 다케는 적진에 잠입하듯 들어갔다가 붕대를 감은 미라마냥 몸 전체가 허연 거미줄 범벅이 되어 아무 소득 없이 나왔다. 그러나 다시 심기일전하여 몇 번이고 들어가서 집요한 수색 작업을 펼친 끝에 기어이 공을 가져왔다. 이쯤 되면 나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봐도 그저 더럽고 꼬질꼬질한 공일 뿐이다. 공이 너무 지저분해서 손도 대기 싫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다케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로 공을 물고 오면 나는 최면이라도 걸린 듯 덥석 손을 공에 가져가곤 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다케가 도무지 공을 입에서 놓아주지를 않는 것이다.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공을 입에 문 채 의기양양하게 내 곁으로 다가오는 다케. 그런데 공을 놓아주질 않는다. 나는 단호하게 꾸짖는다. 이빨을 억지로 벌려서 공을 빼내려고도 해보지만 다케는 완강히 버틴다. 날카로운 이빨이 야무지게 앙다물고 있어서 웬만한 어른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것만은 뺏기지 않겠다는 듯 이빨로 다부지게 공을 문 채 내가 먼저 포기하기를 기다린다.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잘 훈련된 다케가 유독 공에 관해서는 이토록 거리낌 없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는 사실에 나는 화가 치밀었다. 분노마저 느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따위 공이 뭐라고. 공의 어디에 주인의 명령보다 중요한 게 있단 말이냐.


결국, 백기를 든 것은 나였다. 시답잖은 공 하나로 개와 실랑이를 벌이며 혼자 씩씩거리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개와 티격태격하다 체면을 구긴 뒤로, 나는 다케의 입에서 공을 빼내는 방법을 궁리하다 한 가지 비책을 떠올렸다.


다음 날 나는 공을 두 개 준비했다. 다케가 공 하나를 물고 왔을 때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또 다른 공 하나를 보란 듯이 던졌다. 그 순간, 다케는 조건반사처럼 입에 물고 있던 공을 톡 떨어트렸다. 오호라!


나는 언덕 위에서 다케와 공놀이를 하면서 몇 번이고 생각했다. 죽자 사자 공을 쫓아다니고 어르고 달래고 혼내도 공을 놓지 않다가도 다른 공을 던지면 허망하리만치 훌쩍 떨어뜨리는 행동에 대해서. 아마도 그것은 본인의 의지도, 경찰견이었던 조상으로부터 전해진 유전도 아닌, 다케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개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언덕을 내려왔다. 그리고 다케에게 공 대신 작은 나뭇가지를 던지고 그것을 가져오게 하는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다케가 중성화수술을 하면서 아줌마로 불리던 때부터다. 다케는 뚱뚱해졌다. 나도 뚱뚱해졌다. 사라코는 대학에 입학하자 집을 떠났고 (나중에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다케의 산책은 아침과 저녁 모두 내 담당이 되었다. 저녁때는 도메도 따라왔지만 지나가는 개와 마주치고 벌어질 위험천만한 상황을 생각하면 도메 혼자 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언덕 아래로 유카리 나무들이 우뚝 서 있다. 유카리는 신진대사가 무척 활발해서 잎사귀부터 나뭇가지, 나무껍질이 자라나기 무섭게 부슬부슬 벗겨져나간다. 덕분에 다케에게 던질 만한 나뭇가지는 늘 차고 넘쳤다. 내가 나뭇가지를 슬쩍 손에 쥐기만 해도, 다케는 하반신을 바싹 낮추고 출발 호루라기를 기다리는 달리기 선수처럼 내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그렇게 놀았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어두워진 다케는 이제 나뭇가지를 물어오지 못한다. 언덕 아래까지 내려가지도 못한다. 내려가면, 다시 위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경사가 급하고 짧은 오르막길과 평평하고 긴 오르막길. 언덕길은 두 갈래로 나뉘지만 두 곳 모두 다케에겐 힘에 부친다.

 

차 키는 언덕 아래 내려가는 좁은 길 입구에 있었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을 다케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었다. 간간이 숨이 끊어지듯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다리와 허리 관절이 상한 데다 과도하게 걸은 탓에 고통스러웠으리라.


본래 저먼 셰퍼드는 관절이 좋지 않은 개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온 다케지만 나이 앞에선 장사가 없는 법. 유구한 세월 동안 대를 걸쳐 이어진 질병이 서서히 본색을 드러낸 것일까. 업병(전생에 지은 악업으로 인한 업보로 생긴 병)은 아닐까.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어머니와 사별하고 구마모토 집에서 홀로 늙어가고 있는 아버지. 다케는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어 여기서 나와 함께 걷고 있다.


다케가 나에게 오고부터, 나는 산책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공원에 갔다. 다케가 오기 전에는 근처에 공원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다케를 만난 건 여름 끝자락 무렵이었는데 공원 식물들이 죄다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나는 그곳을 ‘황무지’라 이름 붙였다.


겨울이 되고 눈이 내렸다. 봄이 오고 비가 내렸다. 을씨년스럽던 황무지에 하나둘씩 꽃이 피었다. 황량했던 잿빛 땅에 오색찬란한 비단을 깔아놓은 듯 찬란한 생명력이 넘실댔다. 그러다 모든 것이 서서히 말라비틀어져 이내 죽음에 이르렀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났다. 비가 오고 꽃이 피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언제나 다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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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마음 이토 히로미 저/나지윤 역 | 책비
반려견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 지금 함께하고 있는 반려견을 언젠가 떠나보내게 될 사람, 개를 키울지 생각 중인 사람, 지금 키우고 있는 개가 버거워 고민 중인 사람… 비단 꼭 개가 아니라 해도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과 교감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하고픈 책이다. 반려견을 키운다면 누구나 겪을법한 일상적인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지만,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삶과 죽음’에 대한 담담하지만 따뜻한 통찰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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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마음

<이토 히로미> 저/<나지윤> 역11,7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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