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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운영 선집 『시선』, 소설가 조정래의 추도사

경제학자 고 정운영을 추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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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은 경제학자 정운영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세상 밖으로 꺼내진 선집으로, 이전에 출간된 9권의 칼럼집에서 엄선하여 뽑은 글들만을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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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정운영은 마르크스 경제학자, 경제평론가,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며 좌우를 막론한 최고의 논객이자 당대의 문장가로 호명되었던 인물이다. 『시선』은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세상 밖으로 꺼내진 선집으로, 이전에 출간된 9권의 칼럼집에서 엄선하여 뽑은 글들만을 수록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괄하는 르네상스적 비판정신과 곡조 있는 글쓰기의 멋, 그리고 저자의 사상을 잘 반영하면서 여전히 시의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글들을 가려 뽑은 것이다.

 

『시선』의 서문은 소설가 조정래의 추도사로 시작된다. 출판사로부터 추도사를 부탁 받은 조정래는 “글 쓸 일을 앞에 두고 정 형을 생각하니 온갖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그리움의 깊이는 상투적이고 형식적인 추도사 쓰기를 거부했다”며, 200자 원고지 90매 분량의 긴 추도사를 썼다. 조정래는 고(故) 정운영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생전의 정 형에게 몇 가지 특징을 부여하고 있었다. 글을 가장 책임 있게 쓰는 사람. 책과 독서량이 가장 많은 사람.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경제 이론가이며 평론가. 당대의 대표적인 재사이며 문장가”라고 밝히며, “정 형과 길벗이 되었음은 크나큰 기쁨이고 보람이었다”고 썼다.

 

*아래 글은 정운영 선집 『시선』에 실린 조정래 작가의 추도사 일부입니다. 전문은 책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생하는 영혼의 소유자

 

정 형, 운영 형!
그대를 떠나보내며 써야 했던 조사에 이렇게 호칭했었는데, 이제 다시 10년 만에 추도사를 쓰며 같은 호칭으로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때 그대를 그렇게 문득, 허망하게 떠나보내는 것이 너무 기막히고, 서럽고, 안타까워 ‘정 형!’이라고 한 번 부르는 것으로 모자라 가슴을 억누르며 ‘운영 형!’을 덧붙여 부를 수밖에 없었던 내 심정을 당신은 이제 아시리라 믿습니다.

 

10주기 기념 선집에 추도사를 써달라는 연락을 받고 정 형과 나 사이에 놓인 세월의 강폭이 10년이나 되었다는 것을 ‘아아…… 벌써……’ 하는 놀란 가슴으로 깨달았습니다. 그건 세월의 흐름을 놓치고 살다가 불현듯 깨닫는 일상적 무상감이 아니라 정 형은 나와 내 아내의 가슴속에서 언제나 살아 있어서 10년이란 세월의 간격이 전혀 실감나지 않은 탓입니다.

 

정 형이 우리 부부에게 남겨놓고 간 마지막 글을, 아내는 산책길에서나 여행길에서나 문득문득 읊조리며 말하고는 했습니다.

 

“지금 살아 있으면 서로에게 참 좋을 텐데. 꼭 옆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서둘러 세상을 떠나다니. 당신은 운이 없는 사람 같아요.”

 

이렇듯 정 형을 가슴에 품고 살았으니, 정 형은 표표히 떠났지만 우리는 정 형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정 형은 상대를 다니면서도 소설을 쓰고 싶어 했던 문학청년의 순정을, 우리 부부에게 남긴 마지막 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해 한 편의 눈물겨운 시를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그 가슴에 사무치는 절절함과 목숨의 고적감과 거역할 수 없는 하늘의 무정함이 아련한 시적 운율을 이루어내 집사람은 같은 시인의 감성으로 정 형의 글을 생생하게 암송하고는 하나 봅니다.

 

이 추도사를 쓰려니 그 글을 꺼내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만난 사람의 얼굴도 못 알아보고, 조금 전에 둔 물건도 어디 두었는지 몰라 허둥대기 예사인 내가 정 형의 그 글을 단박에 찾아낸 것을 보고 정 형은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지난 10년 세월 동안 정 형을 보내지 않고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것이 결코 소설가적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셨겠지요.


정 형의 그 마지막 글을 다시금 한 자, 한 자 읽으며 가슴에 적어 내립니다. 

 

조정래, 김초혜 선생님께
 
남이 나한테 저지른 잘못은
내가 남한테 저지를 잘못과
비긴다지만 남이 나한테 베푼
은혜는 어쩐다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는
이 발길이
이렇게 무거울 줄이야
혹시 이승을 지날 일이 있으면
두 분 사시는 곳을 내려다보고
환한 미소를 한 대접 보내지요.
 
2005년 7월 9일
정운영

 

우연히 만나 형제보다 고맙게 해주었다면서 마지막 가는 길에 말했습니다.각주)

 

정 형의 글을 읊조리고 난 아내는 꼭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금 정운영 씨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하고는 합니다.

 

그러면 나도 같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럴 때마다 정 형의 훤칠한 모습이 하늘 가득 선연히 떠오르고는 합니다. 그러니 정 형은 늘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정 형과 나의 첫 만남은 저 1986년, 서애 류성룡이 말년을 보냈던 안동의 병산서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출판사가 진보적인 지식인 40여 명을 모은 토론회 자리였습니다. 날마다 벌어지는 가투를 향해 터지는 취루탄으로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야 하는 시대상황이었지요.

 

뒤로는 우람한 산줄기가 에둘러 병풍을 치고, 앞으로는 하얀 모래밭을 거느리며 맑은 내가 흐르고, 병산서원은 그 산자락에 의연한 자태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학문과 경세에 두루 통달한 서애가 찾아냈음직한 명당이었습니다. 50여 명이 넘게 넉넉히 둘러앉을 수 있는 높직한 누정樓亭은 특히 일품이었습니다. 거기에 큰 뜻을 품은 후학들을 불러 앉혀놓고 세상사를 설파하는 서애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어둠살이 퍼지는 백사장에 모닥불은 피어오르고, 돌아가는 술잔을 따라 취기와 대화의 열기가 함께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내 앞에 다가섰습니다. 키가 훌쩍 크다 못해 장대같이 길게 보이는 남자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키가 큰 그 남자는 서 있었으니까요.

 

“안녕하십니까, 조 선생님. 저는 정운영이라고 합니다.”
장대키의 사내가 말했는데, 울림 좋은 굵은 목소리가 너무나 좋아 기분 나쁠 정도였습니다. 나는 빨리 쉬는 내 목소리가 영 좋지 않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백산맥』, 아주 잘 읽었습니다.”

 

악수를 나누며 정 형이 한 말이었습니다.

 

나는 그만 한순간에 정 형이 좋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는 『태백산맥』 1부 세 권을 내놓고 그 반응이 어떨지 내심 불안한 상태에 있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사 사람도 아닌 경제학자가 거침없이 호감을 드러내니 그보다 큰 응원군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나는 그때 어느 분의 몇 마디 말 때문에 심사가 별로 편치 않았던 것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나는 병산서원에 도착할 때까지 평론가 김윤식 선생과 버스의 한자리에 앉아 갔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대화는 자연히 『태백산맥』일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해나가다가, “그런데 조 형, 1부에다가 그 많은 얘기들을 써버리면 앞으로 열 권을 어쩌겠다는 거요?” 김 선생이 불쑥 한 말이었습니다.

 

“앞으로 할 얘기가 열 배는 더 많은데요…….”

 

나는 김 선생의 말뜻이 얼른 잡히지 않아 좀 어물거리는 어조로 말했습니다.

 

“아……, 그래에요오…….”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는 그 어조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 긴 어조는 긍정과는 거리가 먼 부정이 분명한데, 그 부정이 ‘넌 10권짜리 소설의 구성을 잘못한 거야’ 하는 뜻인지, 아니면 ‘뒤로 갈수록 이야깃거리가 궁해져 10권을 못 채우고 흐지부지 될 거야’ 하는 의미인지 모호하고 막연해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게 평론가와 작가라는, 그리고 고상한 지식인 간의 대화 품격이라는 것 아니던가요.

 

그런 찜찜한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던 판에 정 형의 그런 흔쾌한 반응을 접했으니 정 형이 얼마나 예뻐 보였겠습니까. 작가란 이렇게 모성애 강한 여자처럼 이성적이지 못한 존재랍니다.

 

그런데 정 형은 젊은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핼쑥한 몰골이었고, 혁대 풀고 맘껏 마셔도 될 분위기 속에서 술을 한 잔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큰 수술의 뒤끝이었던 것입니다. 위를 다 들어내다시피 한 대수술의 와중에서도 정 형은 『태백산맥』 1부 세 권을 다 읽은 것이었습니다. 그 치열한 독서열은 그 뒤로 정 형과의 사귐이 깊어질수록 감탄하고 감탄하게 된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 그 자리에 온 모든 분들이 책 읽는 것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데도 “지금 『태백산맥』을 읽고 있다”고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 권을 다 읽은 사람은 정 형과 김윤식 선생, 두 분이었던 거지요.

 

술잔이 오가며 모두 불콰해지고 있는 속에서 안주만 축내고 있던 정 형이 나직하게 그러나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태백산맥』을 완성할 때까지는 제발 다른 일은 하지 마십시오. 우리 문학도 이제는 무어 하나쯤 후세에 자랑거리로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습니다. 김윤식 선생의 말처럼 난해해서가 아닙니다. 너무 명료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큰 기대였기 때문입니다. 너무 과분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끝까지 잘 써나가면 후세에 자랑거리로 남겨질 수 있어.’ 이런 뜻이 아닙니까. 이보다 더 큰 칭찬, 이보다 더 큰 격려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글을 쓴 이후로 최초로 받은 가장 뜨겁고, 가장 무겁고, 가장 진한 인정이고 위로였습니다. 김윤식 선생한테서 받았던 찜찜함이 말끔하게 씻겨져 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키 크고 선한 인상이 갈데없이 식물적인데, 대수술로 피 많이 흘려 핼쑥한 얼굴에 마른 체구는 더욱 정적이고 사색적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그런 정 형과 이틀을 더 보내고 헤어지면서도 나는 더 얘기를 나누진 않았습니다. 첫 만남에서 지식인들이 으레 보이기 마련인 ‘거리 두기’와 ‘거리 재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내 머릿속은 정 형의 그 말을 끝없이 되새김질하는 소의 위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하고도 말을 섞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매달 보름씩 집을 떠나 『태백산맥』과 샅바를 잡고 혈투를 벌이느라고 정 형 같은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다리가 열 배쯤 퉁퉁 부어오른 것 같은 착각에 놀라 불현듯 장단지를 감싸 잡고 주무르고, 밥때가 되어 5층에서 아래 식당으로 걸어 내려가다가 복도며 계단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출렁거려 가까스로 벽을 붙들고 위기를 넘기고, 밥을 먹고 나면 꼭 가슴속 저 깊은 데서부터 들떠 오르는 것 같은 먹먹한 통증이 신경성 위궤양 때문이라는 것도 모른 채 끅끅거리며 다시 원고지 칸을 메우려고 기를 써대고 있었으니 정 형을 생각할 틈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몇 년이 지나 『태백산맥』 열 권을 끝냈습니다. 기진맥진하여 온몸이 쑤시고 결리고, 아무리 값진 음식이라고 해도 입맛이 없고, 그 누구나 반가운 사람이 없고, 좀 과하게 체력이 소진되어 있었습니다. 아니, 체력만이 아닙니다. 『태백산맥』에 시비를 거는 심야의 협박 전화까지 걸려오고 있었으니 내 정신마저도 피폐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즈음에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정운영이라는 사람이 「문예중앙」에 『태백산맥』 작품평을 썼으니 한 번 읽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운영!
장대같이 키 큰 사나이의 실루엣이 기억 저편에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우리 문학도 이제는 무어 하나쯤 후세에 자랑거리로……” 하는 울림 좋은 굵은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예중앙」이면 문학 전문 계간지인데 어떻게 경제학자의 글이 실릴 수 있는 것인가. 경제학자가 ‘작품평’을 써……? 경제학적 입장에서 작품을 분석했다는 것인가. 못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글이 얼마나 감칠맛 없이 무미건조할까. 한순간에 떠오른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문과 궁금증은 곧바로 책을 사들게 만들었습니다.
1990년 「문예중앙」 가을호에는 정말 ‘작가에게 띄우는 편지’라는 글의 종류가 표시되어 있고, “우리를 대신하여 역사에 사죄를” 하는 제목과, 그 아래 “- 趙廷來 형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밑에는 ‘鄭雲暎’이라는 필자 이름과 함께 ‘경제평론가’라는 직함이 박혀 있었습니다.

 

‘경제학자’도 아니고 ‘경제평론가’라니……. 내 눈길은 한동안 그 다섯 글자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 다섯 글자는 얼마나 딱딱하고 비문학적입니까. 무릇 모든 예술가는 ‘평론가’라는 것에 아무런 친근감도 매력도 못 느끼는 법입니다. 그런데 ‘문학’도 아니고 ‘경제평론가’라니요. 요즈음에는 ‘글 품팔이’니 ‘지식 노동자’니 하는 별 희한한 직함들을 스스로 만들어 쓰는 게 예사가 되었습니다만, 25년 전 그 시절에 그 직함은 막 대중화하기 시작한 컴퓨터만큼이나 생소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거리감은 글이 시작되면서 이내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글이 정답고 부드러웠으며, 문장이 바뀔 때마다 감칠맛 나게 사람의 마음에 감겨드는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어어, 이 사람 글 쓸 줄 아네.’
이게 내 마음에 떠오른 첫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니 글이 줄줄 읽혀 나갈 수밖에요.

조 형으로서는 다소 듣기에 면구스런 언사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태백산맥』에 민족문학의 거봉이란 명예를 아낌없이 선사합니다.

 

정 형은 이 문장을 네 페이지째 상단에 쓰고 있었습니다. 이 용감무쌍한 찬사와 정의 앞에서 내가 맞닥뜨린 감정은 놀라움과 당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열 권짜리 대하소설을 몇 달 전에 완성시켜 세상에 내놓고 꽤나 불안한 정신 상태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건 ‘무언가를 보여 주고, 평가받아야 하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겪어야 하는 불안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내려진 평이 ‘민족문학의 거봉’이었으니 내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심정에 대해서는, 정 형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십 번을 만나고,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했으면서도 이제야 겨우 입에 올리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깊이란 이런 것임을 정 형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정 형의 그 평에 더할 수 없이 큰 무게가 실렸던 것은 정 형의 글이 단순히 서간문이 아니라 그 어떤 문학평론가의 글에 견주어도 아무 손색이 없는 논리 정연하고 예리한 분석의 본격적 문학평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문학평론가들은 한창 읽고 있을 상황에서 정 형은 가장 먼저 첫 발언을 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정 형은 경제학자로서의 전문적 식견을 발휘해 『태백산맥』의 핵심이며 분단 요인인 ‘생존과 토지 문제’를 명쾌하게 투시하고, 제시해 객관성을 확보한 것이었습니다. 그 부분은 문학평론가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정 형 특유의 탁월함이었습니다. (사실 그 후로 수십 명의 평론가들이 평을 썼지만 그 부분에서는 모두 정 형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사회 전반에 침투하지 않은 시기이고 더욱이 소작관계가 생존과 생산을 좌우하던 지역이란 그 배경의 특수성을 십분 고려하면서도, 정치사회적 현상의 설명변수를 우직하리만큼 집요하게 토지소유관계에서 찾아내려는 조 형의 고집에 처음에는 나도 상당히 냉담한 눈길을 보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차근히 책을 읽어가면서 작가가 도처에 치밀하게 쳐놓은 음모의 덫과 함정에서 벗어나기가 무척 힘들다는 사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이론 무장이 그처럼 미미했다는 점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조 형의 세뇌 공작(!)이 그만큼 치열했다는 사실에 더 큰 책임을 돌려야 할 듯합니다. 여하튼 나는 어쩔 수 없이 조 형의 설득에 백기를 들고 말았지만, 이와 같은 전향(?)에 별로 유감이 없으니 당분간 안심하기 바랍니다.
 
정 형의 이 분석과 진단은 적중했습니다. ‘당분간’이 아니라 25년 세월이 흘러간 지금까지도 그 ‘백기’를 바꾸어 든 평자들이 없으니까요.

 

(중략)

 

정 형, 운영 형!

 

세상 사람들은 생전의 정 형에게 몇 가지 특징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글을 가장 책임 있게 쓰는 사람. 책과 독서량이 가장 많은 사람.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경제 이론가이며 평론가. 당대의 대표적인 재사이며 문장가.

 

정 형에 대한 이런 평가들을 다시 되새기다 보니 내가 조사에다 ‘죽음이라는 것이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의 느닷없는 비보는 허망하고 또 허망하여 그저 기막힐 따름입니다. …… 남자 기대수명이 여든이 넘은 세상에서 예순한 살도 나이라고 이렇게 황급히 떠납니까’라고 썼던 그 슬픔이 다시금 사무쳐 옵니다.

 

정 형은 「한겨레신문」의 한 회 분 칼럼을 쓸 때마다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고 소문나 있었습니다. 동업자로서 그건 이해하겠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망각할 만큼 치열한 열정으로 집중한 것도 모자라 정 형은 다음날이면 신문사 윤전기 옆을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는 필자로 유명했습니다. 윤전기를 본격적으로 돌리기 직전까지 정 형은 자신의 칼럼을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는 미련스러운 성실을 다했던 것입니다. 쇠만 두들길수록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은 고칠수록 좋아진다는 말은 동서고금의 진리화된 말입니다. 시성 이백이나 두보가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까지 백 번 넘게 고치고, 독일의 문호 괴테가 『파우스트』를 50년이 넘도록 고치고, 미국 문학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는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장면을 11번이나 고치고, 우리나라의 고결한 시인 조지훈이 「승무」를 30년 넘게 고쳤다는 것은 글은 다듬을수록 좋아진다는 것을 실증해주는 좋은 사례들 아닙니까.

 

정 형이 으뜸가는 칼럼니스트로 꼽힌 것도, 글 한 편 한 편이 발표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화젯거리가 되곤 했던 것이 어찌 우연의 일이겠습니까. 하나의 명검을 만들어내기 위해 대장장이가 쇠망치질을 수천 번씩 되풀이하는 그 장인정신처럼 정 형이 윤전기가 돌아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어 하나하나를 갈고 다듬은 것은 글 쓰는 모든 사람들이 본받고 우러러야 하는 모범이고 사표였습니다.

 

“그 미련스러운 뚝심 아무도 못 당해요. 그러니까 아무도 당할 수 없는 글을 써냈던 거지요.”

 

정 형의 빈소에서 「한겨레신문」의 어떤 논설위원이 했던 말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원고지 10장이 미처 못 되는 한 회 분 칼럼에 관계 서적 대여섯 권씩이 등장하기가 예사인 것이 정 형의 칼럼이었지요. 한 회의 칼럼을 쓰기 위해 그 많은 책들을 다 읽고, 완전 소화를 해서 명칼럼을 탄생시키고는 했으니 그 노고는 얼마이며, 그 치열함과 성실을 누가 당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 형의 칼럼을 곱씹어 읽으며 정 형에게 무한의 신뢰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 형의 칼럼들은 하루살이 생명인 신문에 실렸다 사라지는 1회성 글이 아니라 의식 깊이 아로새겨야 하는 경제 지도서였고, 사회 인식서였고, 역사 판단서였습니다.

 

그리고 정 형의 또 한 가지 유명한 점은 장서가 제일 많은 학자이며, 속독의 독서광이라는 사실입니다. 정 형의 집에 처음 갔다가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요. 책 많은 사람들을 적잖이 보아왔지만, 책이 많아도 어찌 그렇게 많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파트 현관 초입에서부터 천장까지 빽빽하게 차 올라간 책들이, 온 집안 벽이란 벽은 그 어디든 빈틈이라고는 없이 차 있었습니다. 심지어 침실의 벽까지도 책꽂이로 가득 차 있었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그런데 딱 두 군데만 책꽂이가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식당과 화장실이었습니다. 거기도 습기와 물기가 아니었더라면 두말할 것 없이 책으로 채워졌겠지요.

 

그런데 책 많은 사람들 집에 가보면 책이 책꽂이에 꽂히지 않고 여기저기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건 책꽂이가 부족해서만 생기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때그때 책 정리를 하지 않은 주인의 게으름이 그렇게 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높이가 높을수록 그 주인의 독서의 게으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 형의 집에서는 그렇게 쌓인 책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책들이 분야별로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책꽂이 칸칸마다 해 지난 달력들이 정성스럽게 잘려 책 위를 덮고 있었습니다. 책에 먼지 내려앉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지요. 책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한눈에 보게 하는 정 형의 알뜰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정 형 집을 나오며 큰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책 무게 때문에 아파트가 괜찮을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게 무슨 잠꼬대냐고요? 입바른 말이 될까봐 정 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입니다만, 그럴 위험은 다분했었던 거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몇 년 전에 국가 문서들을 보관하는 5층 빌딩이 그 무게 때문에 층마다 쩍쩍 갈려져 임대해 쓰던 그 건물에 나라가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고 텔레비전이 보도했었습니다. 그런데 정 형과 내가 사는 우리 분당의 아파트들은 처음 지을 때 간기가 다 빠지지 않은 바닷모래를 써서 크게 사회문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는 분당으로 이사를 할 때 아파트를 피해 굳이 빌라를 택했던 것입니다. 정 형에 비해 난 책을 반에 반도 못 가진 형편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바보같이 정 형이 너무 급히 떠나버려, 내가 겁쟁이인지 정 형이 무모한지는 판가름 나지 않았지만 말이오.

 

예로부터 장서가들이 갖는 공통점은 책탐일 것이오. 우리나라에서 책탐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소문난 사람이 육당 최남선인데, 정 형도 그에 못지않을 듯싶소. 어느 날 정 형이 쑥스러운 듯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소. 체 게바라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한 때에 마침 유럽에 갔다가 서점에서 그의 평전을 대하게 되었는데, 눈에 띄는 대로 뽑아놓고 보니 쉰네 권이었고, 그 어느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아 다 사고 말았다고 했소. 그런데 귀국해서 보니 카드 한도 초과가 되어 일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는 얘기 말이오.


그 아름다운 책탐 때문에, 남에게 신세지거나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정 형이 나한테 꼭 한 가지 부탁한 것이 있었소. 내 책을 내고 있는 출판사에서 몇 십 권 시리즈물로 발간하고 있는 책을 한 30퍼센트쯤 할인해서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지요. 나는 즉각 전화를 해서 한 질을 그냥 기증하라고 조처를 했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지요. 정 형이 부득부득 60퍼센트쯤은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대학 시간강사에, 원고료 적은 신문사의 칼럼니스트로서 수입도 영 시원찮으면서도 그 깐깐한 결벽증은 소문난 그대로였지요. 그러나 조 가에, 반 곱슬머리에, 옥니인 내 고집도, 이미 소문난 것 아니던가요. 결국 정 형은 그 책들을 내가 주는 선물로 받아들이기로 했지요. 그때 어찌 그리 기분이 좋았던지요. 그리고 그런 부탁을 또 받기를 바랐는데 정 형은 더는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예의 깍듯하게 잘 갖추고, 좀 지나치리만큼 겸손해서 자기를 내세우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는 정 형이 나한테 꼭 한 번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성님, 내 글이 그 중 하나로 뽑혔어요.”

 

못내 부끄럽고 쑥스러운 기색으로 정 형이 나직하게 한 말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수십 명 지식인들이, 수많은 칼럼 중에서 ‘100대 명문장’을 뽑은 것이었습니다. 그중에 정 형의 글이 들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데, 정 형은 그 말 하기를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쑥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말을 굳이 나에게 하고 싶어 하는 내심……. 나는 정 형의 속마음을 환히 짚고 있었습니다. 글 쓰는 나에게 특히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그 심정!

 

자기의 글이 명문으로 꼽히고,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건 글 쓰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소망일 것입니다. 그 꿈이 이루어졌으니 아무리 겸손한 정 형이라도 자기의 값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 기쁨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겠지요. 그때 나는 내 일처럼 기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축하를 했었습니다.

 

정 형은 대학 강단에서는 구태의연한 주입식 강의가 아니라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토론식 강의로 인기 있는 교수였고, 언론계에서는 예리한 투시력과 균형 잡힌 통찰력을 앞세우면서 문장은 문학적 미감으로 엮어내 만인의 신뢰를 받는 명칼럼니스트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 형은 탤런트 기질까지 요구하는 텔레비전 스크린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했습니다. 「MBC 100분 토론」이 그것입니다. 프로그램을 신설하며 정 형은 사회적 위험도가 칼날처럼 예리한 시사프로그램의 사회자로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나나, 정 형을 아끼는 사람들의 염려나 걱정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막힘 없는 해박한 지식, 부드럽고 균형 잡힌 매너, 굵고 묵직한 울림 좋은 목소리로 이끌어가는 100분의 토론. 그 프로는 단연 인기 으뜸의 자리를 차지했고, 정 형은 일거에 대중스타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아아, 저 사람 저거 타고난 재주 아닌가!’

 

그 특급 탤런트 기질에 나는 마침내 시샘과 질투심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수만 권을 읽었다는 독서량에 감히 미칠 도리가 없으니 그 박학다식은 범접할 수 없는 데다가, 목소리까지 그리 아나운서 뺨 치고 있으니 나쁜 목소리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배가 아프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 내 검은 속을 간파했던 것인지 정 형은 나를 그 프로에 토론자로 끌어냈습니다.

 

“…… 우리의 민족작가 조정래 선생…….”
정 형은 거침없이 나를 이렇게 소개해 나갔습니다. 나는 당황했고,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회 상황으로 보아 나를 그 프로에 출연시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위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빨갱이’로 고발당해 수사를 받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민족작가’라니요. 그 저돌성은 정 형이 치밀하게 짠 각본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는 나를 공인된 프로에 출연시키고, 그렇게 호칭함으로써 ‘죄인’ 혐의를 벗기고, 적극적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뜻이었지요.

 

정 형은 나를 ‘민족작가’로 호칭한 최초의 사람이었고, 그 뒤로는 모든 매스컴이 그 호칭으로 통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둘이는 그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고 먼 이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불가에서 말하는 ‘이심전심의 비법’이라는 것을 체감했고, ‘마음과 마음을 나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정 형, 운영 형!
당신은 ‘진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다 갔습니다. 그런데 분단된 조국에서 그 이름은 무겁기 이를 데 없는 형틀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이름을 지키다가 두 번이나 신문사와 대학에서 쫓겨나는 가시밭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거듭 생각하건데 진보라는 것이 뭐 유별난 것입니까. 지식인으로서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함으로서 진실을 밝혀내고, 그 진실을 옹호해 나아가자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분단된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가 왜곡되고, 그 왜곡에서 탄생한 권력들은 진보를 죄악시하고, 더 나아가서는 범죄시까지 합니다. 그 흉악스러운 폭력 앞에서 계속 고난당하면서도 당신은 그 외롭고 힘겨운 길을 평생 꿋꿋하게 묵묵히 걸어왔습니다.

 

당신은 한국이라는 풍토에서 쉽게 출세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진보’ 그런 것에 굳이 눈 돌리지 않고 현실순응적으로 살았더라면 그 일생이 더없이 순탄하고 풍족했을 것입니다.

 

“저 친구 대학 때는 안 그랬는데……. 대학 동창이거든요.”

 

어느 날 텔레비전에 비치는 경제부총리를 가리키며 정 형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출세한 대학 동창을 향해 한숨을 쉬는 정 형, 그 차이는 영원히 메꾸어지지도 않고 좁힐 수도 없는 간격입니다. 정 형은 사람의 사람다운 세상을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길을 택했고, 한 번 택한 그 길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이 세상의 빛이고자 했습니다.

 

그 선택의 삶을 한평생 살고 떠난 정 형이 남겨놓은 것은 전세 아파트라는 가난이었습니다. 정 형의 삶이 그토록 고달프고 외로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이 안 될 것입니다. 위 수술 이후에 줄곧 병앓이를 해왔다는 사실도, 당신이 몇 번씩 입원 퇴원을 거듭하면서도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하고 마지막 길을 떠난 것처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큰 키에 깃 올린 바바리코트가 잘 어울렸던 그 멋진 모습이 화장터에서 백골 한 줌으로 변해 나오는 것을 보고서는 정 형이 영영 떠났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벌써 10주기라니, 세월의 허망감 앞에서 잠시 망연해집니다.

 

10주기를 기념해서 정 형의 글모음집이 나오니 추도사를 써달라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반가웠던지요. 이 세상은 산 사람들이 것이고, 죽은 사람은 금새금새 잊히게 마련인데 정 형은 10년이 지났는데도 사회적으로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천문학」이란 문학지 여름호에도 정 형에 대한 긴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건 오로지 정 형의 글이 세월을 초월해 살아 있기 때문에 발휘되는 힘인 것입니다. 간 것은 정 형의 육신이었을 뿐 정 형의 영혼은 우리와 함께 생생히 살아 있다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다른 글과는 다르게 첫마디에 정 형의 추도사를 쓰겠노라 응답을 해놓고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얼마만큼의 길이로 써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글 쓸 일을 앞에 두고 정 형을 생각하니 온갖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 그리움의 깊이는 상투적이고 형식적인 추도사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두 번을 쓰게 될 것 같지 않은 글인데 길이에 구애되지 말자.’

 

정 형, 내가 정 형보다 잘하는 것이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무작정 길게 쓰는 것입니다. 정 형이 『태백산맥』에 대해 쓴 글이 대충 원고지 45매 정도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두 배인 90매를 쓴 것입니다.

 

정 형, 운영 형!
거친 세월의 바다를 노 저어 가며 정 형과 길벗이 되었음은 크나큰 기쁨이고 보람이었습니다. 먼 이별이 가까운 만남이 되는 그날까지 평안하시기를…….

 

조정래(본문 아래쪽에 넣어주세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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