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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유민들이 운영한 신라방과 신라소

신라방ㆍ신라소ㆍ신라촌ㆍ신라관ㆍ신라원 등의 의미를 곰곰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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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방ㆍ신라소 등이 생긴 원인은 신라의 해상 능력에서 찾을 게 아니라 백제 멸망과 관련해서 찾는 게 마땅하다.

백제 유민들이 운영한 신라방과 신라소

 

현실 속의 한국과 교과서 속의 한국은 지정학적인 측면에서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현실 속 휴전선 이남의 대한민국은 사실상 섬나라나 다름없다. 한국인이 주변의 대륙으로 가려면 배(또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육로를 이용하는 것은 북한을 가로질러 가야 하니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에 비해, 역사 교과서 속 한국은 사실상 대륙과만 관련되어 있다. 역사 교과서 속의 한국은 주로 대륙만 상대했고 또한 대륙 진출만을 지향한 민족이었다. 바다 건너 일본과 교류한 일도 있지만, 다른 서술에 비하면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또 백제나 가야의 해상 활동이 어느 정도 소개되고 있지만, 이 역시 부차적인 서술에 그치고 있다. 역사 속 한국이 주로 마주한 상대는 대륙의 중국이나 유목민족이다. 그래서 역사 속 한국은 사실상 대륙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 우리 역사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우리가 과연 오로지 대륙 세력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대륙 세력으로서의 모습 못지않게 해양 세력으로서의 모습도 우리 역사 속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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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 사신


백제는 서해를 가로질러 중국 땅 요서를 지배한 적이 있는 제국이었다. 또 동지나해를 가로질러 양자강 이남의 중국 땅을 공략한 적도 있는 제국이었다. 백제가 서해 너머, 동지나해 너머의 국가들을 공략했다는 사실은 곧 백제가 서해나 동지나해를 지배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만약 바다를 지배하지 못했다면, 서해나 동지나해를 가로질러 중국 땅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 건너 뭍을 지배하는 것은 바다를 안정적으로 지배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신라방ㆍ신라소ㆍ신라촌ㆍ신라관ㆍ신라원 등의 의미를 곰곰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 국사》에서는 신라의 해외무역을 설명하면서 “통일 후 당(唐)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무역이 번성하였고, 공무역뿐 아니라 사무역도 발달하였다”라고 한 뒤 “무역 확대로 산둥 반도와 양자강 하류에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과 신라촌, 신라인을 다스리는 신라소, 여관인 신라관, 절인 신라원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가 당나라와의 관계를 발전시킨 결과로 신라방ㆍ신라소 등이 중국 동해안에 만들어졌다고 서술한 대목이다. 찬찬히 뜯어보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가 이 속에 담겨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는 전통적으로 바다에 취약한 나라였다. 이 점은 신라가 툭 하면 바다 건너 왜국의 공격에 시달린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를 읽다보면, 왜국 군대가 신라 본토를 침공했다는 기록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제14대 군주인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때는 왜군이 자기 안방 드나들 듯 신라 영토를 유린했다. 제16대인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때는 경주 남산 서쪽의 금성을 왜군이 포위 공격한 적이 있다. 이처럼 신라는 해안에서 왜국을 상대하지 못하고 내륙에서 상대하는 예가 많았다.


유례이사금과 흘해이사금은 서기 3세기, 4세기 때 왕이다. 이때만 해도 일본은 해상 활동에 취약했다. 섬나라이기는 하지만, 해양 활동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나라였다. 서기 8세기에도 일본은 가까운 한반도 남해안을 항해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을 정도다. 이런 나라가 서기 3세기나 4세기에 신라를 마음대로 공략했다는 것은 신라의 제해(制海)능력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례이사금과 신하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왜군의 압박에 시달린 유례이사금은 ‘백제와 동맹하여 왜국에 쳐들어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해법을 내놓았다. 동해를 건너는 연합 군사작전을 제안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제1등급인 서불한(이벌찬)이란 품계를 가진 홍권(弘權)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본래 해상 전투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멀리 쳐들어갔다가 뜻하지 않은 위험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또 백제는 속임수를 잘 쓸 뿐만 아니라 항상 우리를 삼키려 하고 있으니,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홍권은 백제와 동맹하는 것도 반대하고 해군을 동원하는 것도 반대했다. 신라는 본래 해상 전투에 약하다는 게 홍권의 반대 사유였다. 이렇게 해상 전투에 약하기 때문에, 해상이나 해안가에서 왜군을 상대하지 못하고 내륙에서 상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신라의 모습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도 나타났다. 서기 9세기 초반이면, 신라의 왕권이 여전히 강성할 때였다. 그런데도 신라는 남해안에서 일본 해적을 제어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일본 해적들이 한반도 연해를 노략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해적들은 연해 주민들을 납치해서 당나라에 내다 팔기도 했다. 신라 정부는 이런 인신매매에 속수무책이었다. 신라는 해상 강국인 가야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합병했지만, 두 나라의 해상 능력을 제도권 안으로 흡수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반도 주변의 해적 활동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야ㆍ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가 해상 강국이 되자면 가야ㆍ백제 사람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9세기 초반까지도 신라가 해상 지배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은, 가야ㆍ백제 출신의 바닷사람들을 제도권으로 제대로 포용하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가야 출신의 제철 기술자들이 신라에 흡수된 것과 달리, 가야ㆍ백제의 바닷사람들은 신라에 쉽게 흡수되지 않았다. 이것은 가야ㆍ백제 유민들이 바다 공간에서는 신라의 지배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본 해적 때문에 골치를 썩는 신라 정부를 돕겠다면서 등장한 구원투수가 있다. 한반도 서남해안의 관리를 자처하면서 한국 역사에 등장한 장보고(張保皐)가 주인공이다. 장보고가 등장하자 신라 흥덕왕(興德王)은 청해진대사라는 특별 관직을 주었다. 이것은 정부의 기존 지휘체계에서 독립된 직책이었다. 장보고는 이 직책을 갖고 1만 명의 군사를 지휘했다. 그가 828년부터 846년까지 18년 동안 특별 관직을 받고 청해진을 지켰다는 것은, 그와 그의 부하들이 신라 정부의 기존 지휘체계 아래에 있지 않았음을 뜻한다. 해상 관리에 관한 한, 장보고가 독자적인 권한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장보고 집단에게 독자적 권한을 주지 않고는 해상을 관리할 수 없을 정도로 신라 정부의 해상 지배력이 매우 취약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는 가야ㆍ백제ㆍ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한반도 해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멸망한 나라들의 해상 세력이 신라에 협력하지도 흡수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국 동남해안에는 신라방이니 신라소니 하는 것들이 많이 설치되었다. 특히 동지나해와 양자강이 만나는 주산군도(舟山群島, 저우산군도) 쪽에 이런 곳이 많았다. 이것은 신라인들이 한반도 해역과 동지나해를 장악하지 못했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바다에 약한 신라가 어떻게 저 멀리 양자강 입구까지 장악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당나라에 신라방과 신라소 등이 생긴 것은 백제가 멸망한 뒤였다.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는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백제가 멸망하기 전이나 후나 신라의 해상 능력은 별달리 개선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라방ㆍ신라소 등이 생긴 원인은 신라의 해상 능력에서 찾을 게 아니라 백제 멸망과 관련해서 찾는 게 마땅하다.


신라방ㆍ신라소가 가장 많은 곳은 주산군도 쪽이었다. 최치원이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곳은 백제의 영향력이 미치던 지역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백제 멸망 후에 이곳에서 신라방ㆍ신라소 등을 운영한 주체는 원래의 신라인들이 아니라 백제 유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당나라에서 신라인으로 알려진 이유를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백제는 이미 멸망한 나라였다. 그리고 백제는 신라에 흡수됐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인들로서는 그 들을 신라인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해상 거점이 신라방이니 신라소 등으로 불렸던 것이다. 따라서 가야ㆍ백제가 사라진 뒤에도 두 나라 유민들이 여전히 한반도 해역과 동지나해를 장악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쪽으로 뻗은 내륙의 비단길 경영에 주력했던 중국은 전통적으로 해상 활동에 취약했다. 바다에 취약한 점은 섬나라인 일본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가까운 바다를 돌아다니는 것은 몰라도, 조금만 먼 바다로 나오면 일본은 약했다. 그래서 일본 역시 동아시아 해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신라 국적을 가진 가야ㆍ백제 유민들이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옛 백제 땅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이는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중국, 한반도, 일본과 연결되는 한반도 서남해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동지나해에서의 가야ㆍ백제 유민들의 활약은 적어도 14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중국대륙에서는 몽골족의 원나라가 물러가고 한족의 명나라가 세워졌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집권 초기에 주산군도 쪽에 있는 해적들을 소탕했다. 당시 명나라의 수도는 남경(난징)이었다. 양자강 연안의 남경은 상해(상하이)에서 서북쪽으로 직선 270킬로미터 정도 되는 곳에 있다. 그래서 상해 남쪽 해역의 주산군도에 대한 해적들을 소탕하는 것은 수도 남경의 안보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주산군도 쪽 해적들이 가야ㆍ백제 유민들이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증거가 있다.


주원장이 해적 소탕에 나서자 주산군도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반란을 일으킨 섬 중 하나가 주산군도에 속한 난수산도(수산도)다. 이들의 반란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반란에 실패한 이들이 어디로 도주했느냐는 점이다. 명나라 중서성에서 고려 주상에게 보낸 공문서나 《고려사》 공민왕(恭愍王) 세가 등에 따르면, 해적들은 탐라를 거쳐 한반도 서해안에 있는 전라도 고부와 수도 개경으로 도주했다. 이들의 숫자는 무려 100명이 넘었다. 주산군도에서 본거지를 잃은 해상 세력이 멀리 탐라와 한반도까지 도주한 것은 이곳들과 깊은 연관이 있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공민왕 세가에서는 이들이 고려인들 사이에서 숨어 살았다고 했다. 이는 이들의 외모가 한민족과 같았음을 의미한다. 또 한민족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들이 탐라와 한반도로 도주한 사실은 이들이 옛 백제나 탐라 출신의 해상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14세기까지만 해도 한민족은 한반도 주변 해역은 물론 동지나해에서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도 오랫동안 해양민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역사 교과서 속 우리 민족은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를 좋아하지 않는 민족이다. 잘못된 역사 서술이다. 우리 교과서에 나오는 것은 왜구가 동아시아를 시끄럽게 했다는 이야기뿐이다. 하지만 일본 해적이 두각을 보인 것은 14세기부터다. 이 점은 뒤에서 설명된다. 왜구가 두각을 보이기 전에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것은 우리 한민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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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김종성 저 | 역사의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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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종성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또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문화유산채널》(구 《헤리티지채널》)의 자문위원과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오마이뉴스》에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 읽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웅진씽크빅의 《생각쟁이》에 글을 싣고 있다. 《문화유산채널》에 명사 칼럼을, 《민족 21》 등에 역사 기고문을 연재했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에서 기업인들에게 한국사를,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외부 강사로 삼성 신입사원들에게 역사를 강의했다. 기독교방송(CBS)의 〈김미화의 여러분〉에서 역사 코너에 출연했고, 교통방송(TBS)의 〈송정애의 좋은 사람들〉에서 역사 코너에 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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