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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봐! 이것은 철벽의 목소리 푸처핸접

철벽에도 출입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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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벽녀/철벽남을 모든 관계나 연애를 거부하는 꽉 막힌 존재로 보면, 그들의 선택과 의도를 무시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어떤 사람들이 연애의 가능성에, 연애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관계에 대응하는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처…ㄹ벽…, 처…ㄹ벽,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철벽!

 

“여러분 세상은 온니 연애로만 가득 차 있지 않아요. 사람이 늘 연애에 최적화된 상태로만 살 순 없어요. 그리고 연애에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가 왜 콧대가 높고 주제 파악을 못하는 것으로 읽히는지 1도 모르겠다.”


별의별 “~녀”가 다 있는 세상이니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식의 라벨링을 겪는다. 2008~2009년 무렵, 누군가가 나를 ‘철벽녀’라고 진단했다. 나의 비연애 ‘증상’에 또 하나의 병명이 붙는 순간이었다. 초록창에 철벽녀를 검색했을 때 오픈국어-유행어/신조어 항목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외모도 괜찮고 학력과 집안도 웬만하나 연애를 못하는 여성으로 마치 철의 장막을 치듯이 연애를 차단한다는 뜻. 연애는 하고 싶지만 연애에 대한 환상이 크고, 자존심이 높아 자신의 이상형에 미치지 못하는 남자들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벽 수비’로 방어하는 여자.”나를 철벽녀라고 진단한 사람은 모든 썸 플래그를 발로 작신작신 밟아버리는 나의 태도에서 ‘철벽’이라는 특성을 추출했을 텐데 제대로 된 정의를 보니 참 어디 가서 철벽녀라고 명함도 못 내밀겠다. 외모에 학력에 집안까지…철벽녀도 쉬운 게 아닙니다, 그려(코 쓱).


본 글에서는 학력 외모 등을 포함하는 앞의 스펙과는 무관하게, “이성의 접근을 차단하는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철벽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굳이 저렇게 다 갖추지 않은 사람이라도, 원하지 않는 연애는 거부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철벽녀의 조건을 저렇게 까다롭게 해놓은 것은, ‘저 정도는 되어야’ 연애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무언의 압력이다. (철벽남 역시 같은 뜻이지만 필자가 여성이라 주로 철벽녀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점을 미리 양해 부탁dream) 누군가는 간절히 연애하고 싶은데 철벽의 재능을 타고 나서 곤란할 수 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갖고 태어난 것을 세상은 재능이라고 부르니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선택형 철벽이다.


이 “철벽녀”의 등장은 딱히 하자가 없는데도 비연애 상태인 사람에게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내려는 욕구의 발현이다. 줄줄이 열거한 까다로운 조건이 그것을 입증한다. 철벽녀/철벽남은 객관적으로 그리 문제가 없음에도 연애를 하지 않기 때문에 연구 대상이 되고, 결국 연애에 대한 애티튜드(ㅋ)가 그 원인으로 지목당한다. 그리고 그들은 주제 파악을 못하고 현실을 잘 모르는 미숙한 존재, 누군가 공들여서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구원과 계몽의 대상으로 구성된다. 철벽녀와 철벽남을 향한 조언과 조롱은 대충 다음과 같다. “누가 사귀재? 밥 한 번 먹자는데 왜 먼저 나서서 오버야?” 철벽녀 입이 있다. 말 좀 하자.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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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번이 싫다고, 쫌!” 

 

흔히 철벽녀는 연애하고 싶지만 순전히 서툴러서, 혹은 눈이 높아서 ‘못’하는 존재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는 눈을 낮춰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상대에게 적당히 응해주고, 썸도 타라고 종용하는 목소리가 깔려 있다. 네가 뭐라고, 니 주제에, 뭐 대단한 사람 만나려고, 원래 만나면서 좋아지는 건데 순진하기는(까다롭기는)….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도대체 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군가에게나 ‘연애의 가능성이 있는’, ‘누군가에게 매력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여지를 남기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이것은 뷰티 프로그램이나 패션 사이트에서 툭하면 “남자들이 좋아하는 메이크업”, “여친 생기는 옷”만 주구장창 반복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도 상통한다. “너 그러고 다니면 남자가(여자가) 안 좋아해.” 아니…내가 뭐 걔들이 좋아하라고 태어났나? 여러분, 세상은 온니 연애로만 가득 차 있지 않아요. 사람이 늘 연애에 최적화된 상태로만 살 순 없어요. 그리고 연애에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가 왜 콧대가 높고 주제 파악 못하는 것으로 읽히는지 1도 모르겠다.


오래전 일이다.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서 합숙을 갔는데, 우리가 들어간 방은 그 전날 남녀공학 대학에서 사용했는지 화이트보드에 지난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꽤 큰 문화충격을 받았다. “오늘 밤 목표 : 3커플 성사!” 화이트보드에는 각종 술 게임과, ‘썸’을 일으킬 만한 벌칙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일명 ‘연서복’이 유행하면서, 그룹에서 비교적 우위를 점한 상대(남성/선배)로부터 원치 않는 그린 라이트를 받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최근에는 단체 카톡 방에서 고백을 한 학생 때문에 과대 학생이 카톡방을 나가버리고, 남은 이들이 “우리 이제 공지 누가 하지?”하고 황망해 하는 짤이 유행했다. 세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누군가에게 연애의 대상이 되는 가능성/타인이 내가 원하지 않는 상대와 연애 관계로 몰아갈 상황과 그로 인한 곤란함이다. 연애는 얼마나 뻔뻔한지, 웬만한 행동(스토킹, 데이트 폭력)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거절당한 사람의 상처에 몰입하여 거절한 사람을 일방적인 가해자로 몰기도 한다. 구애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염산 맞는 여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한고은은 TV 프로그램 <황금어장-무릎팍 도사>에서 사람은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모질지 않”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누군들 자기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모질게 대하고 싶을까. 그렇다고 친절하게 대하면? 그대로 “어장 관리하는 썅X” 익스프레스 타는 거. 얼마 전 CGV 트위터는 “이런 애는 만나면 안 된다”는 취지의 영화 소개를 하면서 <건축학개론>의 여자 주인공을 썅X이라고 불러 물의를 일으켰다.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과 사귀는 것도 뭣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살다 보면 외모나 학벌 등의 조건과는 무관하게, 철벽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기혼자(혹은 이미 애인이 있는 사람)의 들이댐이나, 둘 사이의 건덕지조차 남기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혹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늘밤 3커플 성사 목표!”를 외치며 몰아가는 분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말이다. 사실 철벽을 검색했을 때 자동 검색어에 상위로 ‘철벽 치는 법’이 쓰여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기승전연애의 시대에서 원치 않는 관심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나 걸리라는 심정으로 사방으로 그린라이트를 쏘는 연애 밀렵꾼(!)부터, 자기들이 연애를 하고 싶은 것을 넘어서 전혀 상관없는 타인들까지 마구 엮어대는 연애 브로커(!)까지 넘쳐나니 원.  


당신이 철벽녀/철벽남에게 조언하기 전에 숙지해야 할 것 하나. 일단 그들 자신이 철벽을 치면 연애하기 힘들다는 것을 가장 잘 안다는 사실. 결국 연애 감정이란 미묘한 공백과 어느 정도의 착각에서 자라나는 버섯 같은 존재니까. 많은 사람이 철벽 바깥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연애 못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연애를 하고 싶은 욕망보다 ‘굳이’ 연애의 대상으로 분류되기 싫은 마음이 더 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즉 연애의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두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고, 그보다는 인간관계의 쾌적함, 불특정 다수의 호감보다는 특정 소수와의 친교를 더 중시하는 취향 말이다. 같은 감정을 돌려줄 수 없을 때 누군가의 호의를 고맙게 여기며 일단 받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고, 부담스럽고 미안해서 거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권장할 만하고, 후자는 조롱당하고 교정되어야 하는 태도인가? That’s No No. 사람들의 성격과 가치관, 행동, 삶의 우선순위, 관계를 맺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이성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태도나 정서적 허용도, 다를 수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만 지킨다면, 그런 차이는 존중되어야 한다.


게다가 철벽의 안쪽은 매우 쾌적하다! 뜬금없이 내가 모르는 자리에서 썅X으로, 어장주로 소환 당할 위험이나,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감정 노동할 필요도, 어장 속 물고기로 취급 받아, 헤어졌거나 심심해진 어장주에게 주기적으로 지분거림을 당할 일도 없다. 뜻밖의…개이득?! 그렇다. 개이득이다.


철벽녀가 주제 파악 못하고 왕자님을 기다린다거나 눈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라. 분명히 말하지만, 철벽에도 출입구가 있다. 그들이 원할 때는 마음의 문을 열고 철벽을 무장해제하니까. (물론 본심과 달리 원하는 상대에게도 자꾸 철벽을 치는 본투비 철벽녀/철벽남은 상황에 따라 노력을 해야겠지만.) 철벽녀/철벽남을 모든 관계나 연애를 거부하는 꽉 막힌 존재로 보면, 그들의 선택과 의도를 무시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어떤 사람들이 연애의 가능성에, 연애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관계에 대응하는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요란할 것도 없는, 사실은 ‘어떤 때만’ 철옹성처럼 단단하고 어떤 때는 우유에 담근 카스타드처럼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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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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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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