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소설가에게 여행과 맥주란

김연수의 여행 에세이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나는 여행 중에는 소설을 쓰지 않는데, 그러면 도대체 뭘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자연스레 낮부터 술을 마시게 된다는 논리라면, 다들 이해하시려나.

김연수ⓒ이천희.jpg

PHOTOGRAPH : LEE CHUN-HEE

 

 

소설가에게 여행과 맥주란


규슈 여행의 마지막 날, 나가사키 인터내셔널 호텔에서 TV를 켜니 여행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한 남자가 에노덴(江ノ電)을 타고 가마쿠라(鎌倉) 지역을 둘러보는 내용이었다. 에노덴은 가마쿠라와 후지사와를 오가는 10킬로미터 길이의 단선 협궤 전철로, 가마쿠라 고교 앞을 지날 때 해변을 배경으로 T자형 교차로를 가로지른다. 전철이 이곳을 지날 때 바다 쪽을 바라보고 서서 자동차가 철로 신호등 앞에서 대기 중인 모습을 촬영하면, 애니메이션 <슬램덩크> 오프닝에 등장하는 장면과 똑같아진다. 그런 곳인지라 ‘해마다 1,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에노덴을 탄다’는 자막이 화면 하단에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장발에 트렌치코트를 걸친, 펑퍼짐한 인상의 중년이다. 그는 전철에 타자마자 캔맥주 꼭지를 따더니 시원스레 들이켠다. 하긴 여행자에게는 언제라도 캔맥주의 꼭지를 딸 수 있는 특권이 있으니까. 고토쿠인(高?院, 일본 정토종 사찰)의 대불 같은 가마쿠라 관광 명소를 둘러보는 동안, 조금씩 밝혀진 남자의 정체는 연극배우였다. 아무래도 예술가여서일까, 그는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면 술부터 찾았다. 그렇게 차수를 늘려가며 동네 술집을 돌아다니는 사이 여행 프로그램은 자연스레 음주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가마쿠라 술꾼 기행’인 셈이었다. 동병상련일까. 어쩐지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의 입장에서도 여행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술을, 아니, 술만 마시게 된다. 그 원리는 이렇다. 사실 나는 낯선 장소에 있는 걸 그다지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사실은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그럼에도 여행할 기회가 남들보다 많았다. 오로지 소설가가 됐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는 한, 나는 낯선 곳에 있는 걸 직업적으로 즐겨야만 한다. 소설관에서 비롯된 지론이다. 소설에는 욕망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 한다. 욕망하는 목표가 생기는 순간부터 그는 헤매게 돼 있다. 이 ‘헤맨다’는 말을 그럴 듯하게 표현하면 여행이 된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는 일상의 시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시공간을 찾아가는 여행담이라고 할 수 있다.

 

3-0008.jpg

PHOTOGRAPH : LEE KWA-YONG

 

이 여행담을 쓰기 위해서 소설가는 실제로 여행을 하기도 한다. 중국 옌볜(延邊)이 배경이라면, 주인공을 따라서 실제 그곳을 방문하는 식이다. 그간 나는 캘리포니아, 베를린, 레이크 디스트릭트, 옌볜 등을 방문했고, 그 결과 어떤 식으로든 그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출판됐다. NHK의 그 여행 프로그램을 보게 된 것도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일본을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소설을 잘 쓰자면, 본래 좋아했든 그렇지 않았든 여행을 자주 다녀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소설을 잘 쓰려면 더 자주 여행을 가야만 하는데, 여행을 가게 되면 소설가는 소설을 쓸 수가 없다는 것.

 

소설가는 평소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 주간 회의를 통해 팀원을 이끌면서 목표를 하나씩 달성해가는 일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게 바로 소설 쓰기다. 그래서 훌륭한 소설가가 되려면 가능한 한 소설을 쓰는 방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편이 가장 좋다. 하물며 해외여행 같은 것은 삼가는 게 소설을 잘 쓰는 지름길이다. 그걸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여행을 자주 한다. 이 칼럼을 쭉 따라 읽은 독자는 잘 알겠지만, 대개 취재나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차 혹은 번역본이 출간돼 행사가 있을 때 여행을 떠난다. 나는 여행 중에는 소설을 쓰지 않는데, 그러면 도대체 뭘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자연스레 낮부터 술을 마시게 된다는 논리라면, 다들 이해하시려나.

 

TV 속 그 남자처럼 시작은 맥주다. 아무리 마셔도 맥주는 정말 맛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로컬 비어가 있다. 조선족이 사는 옌지에서는 ‘빙천(氷川)’이라는 맥주를, 독일의 작은 도시 밤베르크에서는 ‘라우흐비어(Rauchbier)’라는 맥주를 마셨다. 빙천은 조금 센 ‘소맥’ 맛이고, 라우흐비어는 고기 불판의 그을음을 맥주에 푼 것 같은 맛이다. 맥주를 마시고 나면, 차차 도수를 높여나간다. 로컬 비어처럼, 도수가 높은 술 역시 지역마다 유명한 것 하나쯤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모스크바에서는 벨루가(Beluga)를, 시안에서는 시펑지우(西鳳酒)를 마시는 식이다.

 

10여 년 전, 무척 좋아하는 소설가 두 분의 낭독회가 베를린에서 열린다고 해서 브뤼셀에서 베를린까지 찾아간 적이 있다. 일러준 호텔에 도착한 것은 초저녁이었다. 일정 때문인지 다들 호텔에 안 계셨다. ‘그럼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호텔 옆 인도 식당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한국인 남자들을 찾는다고 하니, 스리랑카 출신의 종업원이 매일 저녁마다 찾아와 술을 마시는 이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럼 그렇지. 외국에서 소설가가 뭘 하겠는가?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맥주부터 시켰다. 그 식당에서 이틀 내내 선생들과 술을 마셨다. 밤이 깊어 술이 취할 대로 취하니 그곳이 서울인지 베를린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지막 날, 선생들은 동물원(Zoologischer Garten) 역 앞에서 나흘을 묵었는데 동물원 입구도 못 가봤음을 한탄하며 베를린을 떠났다.

 

김연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며 쉬지 않고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하는 부지런한 소설가다. 그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를 통해 꼭꼭 숨겨두었던 특별한 여행의 추억을 풀어놓는다.


 

 

img_book_bot.jpg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lonely planet (월간) : 9월 [2015]안그라픽스 편집부 | 안그라픽스
지구촌 여행지를 다룬 여행전문지


 

 

[관련 기사]

- 교토 48시간 여행
- 군포 당일 여행
- 스위스 그랜드 투어
- 브라이튼, 푸트라자야, 상하이, 방콕 여행
- 마카오 48시간 여행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ㆍ사진 | 론리플래닛매거진

론리플래닛 매거진은 세계 최고의 여행 콘텐츠 브랜드 론리플래닛이 발행하는 여행 잡지입니다. 론리플래닛 매거진을 손에 드는 순간 여러분은 지금까지 꿈꿔왔던 최고의 여행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을 포함 영국, 프랑스, 스페인, 브라질, 인도 등 세계 14개국에서 론리플래닛 매거진이 제안하는 감동적인 여행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lonely planet (월간) : 9월 [2015]

안그라픽스 편집부6,300원(10% + 1%)

지구촌 여행지를 다룬 여행전문지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의 대표작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이 오마주한 시집. 황유원 시인의 번역으로 국내 첫 완역 출간되었다. 미국 20세기 현대문학에 큰 획을 그은 비트 세대 문학 선구자,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스타일을 최대한 살려 번역되었다. 도시 패터슨의 역사를 토대로 한, 폭포를 닮은 대서사시.

본격적인 투자 필독서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경제/재테크 최상위 채널의 투자 자료를 책으로 엮었다. 5명의 치과 전문의로 구성된 트레이딩 팀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 최신 기술적 분석 자료까지 폭넓게 다룬다. 차트를 모르는 초보부터 중상급 투자자 모두 만족할 기술적 분석의 바이블을 만나보자.

타인과 만나는 황홀한 순간

『보보스』, 『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 신간. 날카로운 시선과 따뜻한 심장으로 세계와 인간을 꿰뚫어본 데이비드 브룩스가 이번에 시선을 모은 주제는 '관계'다.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와 만나는 순간을 황홀하게 그려냈다. 고립의 시대가 잃어버린 미덕을 되찾아줄 역작.

시는 왜 자꾸 태어나는가

등단 20주년을 맞이한 박연준 시인의 신작 시집. 돌멩이, 새 등 작은 존재를 오래 바라보고,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시선으로 가득하다. 시인의 불협화음에 맞춰 시를 소리 내어 따라 읽어보자. 죽음과 생, 사랑과 이별 사이에서 우리를 기다린 또 하나의 시가 탄생하고 있을 테니.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