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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비가 내릴 때

비와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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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거리, 도시의 삶에서는 ‘비’ 하나만으로도 사람들 각자가 지닌 내밀한 상처가 환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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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비 내리듯
내 가슴에 눈물 내리네
이 울적함 무엇이기에
내 가슴 깊이 스며드나?

 

땅에 지붕 위에
오 포근한 빗소리여!
울울한 마음을 위한
오 비의 노래여!

 

내키는 것 없는 이 가슴에
까닭 없이 눈물 내리네
무어라고! 돌아선 것은 없다고?...
이 슬픔은 까닭이 없네.

 

가장 몹쓸 아픔은
웬일인지 모른다는 것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 가슴이 그리도 아프네!

 

- 폴 베를렌느, <거리에 비 내리듯> 

 

내 가슴에 내리는 ‘눈물’이 ‘비’가 내리는 것에 비유된다. 바꿔 말해 비가 내릴 때 내 가슴에 눈물이 내린다. “까닭 없이”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리는 눈물은 비가 내릴 때면 ‘늘’ 내 가슴의 “슬픔”이 자동적으로 자극된다는 뜻이다. 비는 사람들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자극한다. 비와 ‘내 가슴’의 “아픔”이 갖는 이 예민한 연관성은 전통 세계의 반응 체계가 아니다. 이 비는 “거리” 즉 현대 도시의 비다.


20세기 전후 도시의 비 내리는 풍경에서 촉발된 이 시는 ‘거리의 비’에서 “내 가슴”을 ‘찌르고’ 들어오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감수성을 포착함으로써, ‘비’를 자연으로부터 떼어내고 전통사회로부터도 분리한다. 화자는 비가 내리는 시간이 이제 더 이상 옛날의 시간에 속하지 않음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비를 맞는, 비를 보는 느낌이 이제 옛날과는 달라졌다. 이 비는 ‘거리’의 비, 도시의 비다. 비는 ‘도시인’의 감성과 밀접한 화학적 운동을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도시의 거리, 도시의 삶에서는 ‘비’ 하나만으로도 사람들 각자가 지닌 내밀한 상처가 환기된다. “까닭이 없”다는 것은 상처의 내밀성으로 인해 상처가 자기도 기억 못할 만큼 “내 가슴 깊이 스며” 있다는 뜻이지, 상처의 허황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몹쓸 아픔”이란 치명적인 아픔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깊숙하고 치명적인 동시에 ‘비’ 하나만으로도 울컥울컥 가슴 위로 솟아오를 만큼 예민한 상처들이다. 비가 내릴 때 환기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내밀한 상처들이지만, 보편적으로는 이 비를 맞고 비의 감성에 ‘젖는’ 도시인 각자의 상처들 전체다. 이 ‘까닭 없는 슬픔’은 비의 시간이 ‘이제’ 도시적 시간의 일부임을 암시한다. 도시의 시간이란 도시인의 숨겨진 상처들을 억압하고 기워냄으로써 유지된다.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 넘어
온 몸을 적십니다

 

- 이성복, <비1>

 

창가에 부딪히는 한밤중의 빗소리는 그래서 ‘당신의 울음’ 소리가 된다. 비는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포석을 치고” 결국 “담벼락을 치고” “창문을 열면 창턱을 뛰어 넘어/온 몸을 적”신다. 비는 밖에서 내리지만, 젖는 건 “온 몸”이다. 비는 자연의 시간에 속하지 않고,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다. 어떤 만남과 헤어짐, 누군가와의 피치 못한 이별의 기억은 삶의 현실에 내재된 치명적인 상처며, 우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다. 여기서 진정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은 비가 아니라 “당신”이며, 넘은 것은 “창턱”이 아니라 내 가슴이다. 당신의 울음소리로 바뀌어 “창턱을 뛰어 넘어” 내 방으로 난입한 이 비는 역시 전통 사회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도시에 속한 것이다. 이 빗소리-울음소리에 깃든 아픔은 도시인의 기본 존재 조건인 고립과 고독 속에서 어떤 만남의 엇갈림이 더욱더 회복 불가능한 것으로 전화되는 세계와 관련이 있다. 비가 내리는 밤은 고통스럽게 창을 두드리는 “당신”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삶의 고독을 더욱더 몸서리치게 경험하게 하는 시간이다.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여들고 싶게 하는


- 황인숙, <비>

 

도시에 비가 내릴 때 우리는 “찰박 찰박 찰박”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건 터벅터벅 운동화 소리도 아니고, 또깍또깍 구두 소리도 아니다. 물기 어린 바닥과 맨발이 만나는 소리다.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것은 빗방울들과 아스팔트와 시멘트 바닥이지만, 이 맨발 소리는 비를 매개로 ‘신발’ 없이 육체가 세계의 어떤 것과 ‘만나는’ 소리다. 도시의 빗소리는 바쁜 일상에 휩싸여 들리지 않던 ‘맨발’ ‘맨 살갗’의 소리를 들리게 한다. “티눈 하나 없는/작은 발들”,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던, 그러나 망각하고 있던 감성을 촉발시킨다. 세계와 제 안에 있는 어떤 예민한 소리를 듣게 되는 시간이 회복된다. 이 감성은 도시인의 ‘가슴’에 내재한 아픔을 환기시키기도 하지만, 갑옷 같은 옷으로 감싸고 있던 감성의 방어막이 스르르 해체되는 시간을 선사함으로써, 우리의 무딘 감각을 깨운다. ‘아프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 이것은 ‘살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가 내리는 날은 죽었던 ‘맨발’의 감성이 다시 살아나는 마법의 시간이다. 아프다 하더라도 우린 ‘살아 있어야’ 한다. ‘생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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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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