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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간

전염병은 인간 세계를 넘어 자연과 우주의 병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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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은 순리의 이탈이 초래한 결과이며, 공동체의 ‘죄’를 증거하고 현시한다. 속수무책으로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간은 인간 공동체 역시 우주적 순리의 일부라는 사실에 대한 망각을 재인식하는 시간이 된다. 그 인식 하에서 그들은 스스로 죄의 연루를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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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시간


자연의 온갖 사물이 서로 조응하던 시절이 있었다. 거기에서 바다는 하늘을 비추고, 별들은 대지의 천장이었으며, 꽃들은 대지의 표정을 이뤘다. 사슴의 뿔과 숲의 나무와 거북의 등껍질이 분리되지 않던 그 세계는 창공의 별자리와도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 세계에서는 사람 역시 자연의 일부였다. 사람의 동공이 창공의 별을 비추는 창이었으며, 사람의 몸은 음양과 오행의 세계운행을 압축하고 있는 작은 우주였다. 종종 인간의 목소리 중에는 우주의 목소리를 매개하는 것들이 있었으며, 사람이 사용하는 문자는 우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졌다. 자연과 자연이, 사람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원환. 하나의 작은 사슬도 끝없는 존재 사슬의 연쇄로 이어져서 한 사슬을 흔들면 우주의 존재 전체가 함께 흔들렸다. 어떤 존재의 한 기미는 우주 전체의 현재 상태를 알리는 기미였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 공동체를 휩쓰는 ‘전염병’은 존재의 이상 증후를 알리는 신호가 된다. 이 전염병은 인간 세계를 넘어 자연과 우주의 병을 암시한다. 그것은 우주적 질서와 순리가 정상적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증후다. 그래서 전염병은 늘 가뭄이나 불임 같은 자연 전체의 불모성과 함께 공동체를 휩쓴다. 그러므로 공동체에 창궐하는 전염병은 우주적 순리에서 이탈한 ‘죄’가 공동체에 있다고 묻는 표지가 된다. 전염병은 순리의 이탈이 초래한 결과이며, 공동체의 ‘죄’를 증거하고 현시한다. 속수무책으로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간은 인간 공동체 역시 우주적 순리의 일부라는 사실에 대한 망각을 재인식하는 시간이 된다. 그 인식 하에서 그들은 스스로 죄의 연루를 되묻는다.


기원전 5세기에 쓰인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푸스 왕은 다음과 같은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대 자신도 보시다시피, 도시가 이미 너무나 흔들리고 있고 죽음의 물결 밑에서 아직도 머리를 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대지의 열매를 맺는 꽃받침에도 목장에서 풀을 뜯는 소떼에게도 부인들의 불모의 산고에도 죽음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불을 가져다 주는 신이 가장 사악한 전염병이 내리덮쳐 도시를 뒤쫓고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카드모스의 집은 빈집이 되어 가고 어두운 하데스는 신음과 눈물이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중에서

 

“불을 가져다 주는 신이” 보낸 “가장 사악한 전염병”은 “대지의 열매를 맺는 꽃받침” “목장에서 풀을 뜨는 소떼” “부인들의 불모의 산고”와 더불어 도시를 덮친다. 인간 공동체를 뒤덮은 “죽음의 물결”은 자연도 예외 없이 뒤덮는다. 한 개인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 ‘전염병’이란 우주적 순리의 이탈을 뜻하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존재는 원환의 사슬에 묶여서 동시에 흔들리고 함께 파탄을 맞는다. 이토록 심각한 죄의 표지는 그러므로 죄에 연루된 자를 찾아 확실히 ‘벌’할 것, 또는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공동체 전체의 숭고한 희생제의를 요구한다. 이 비극에서 죄의 원천은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죄는 양자 모두 생명의 질서를 거스르는 끔찍한 죄였다. 그것은 자연, 나아가 우주적인 순리에 역행한다. 그는 죄의 원장면인 동시에 도시 공동체에 상징성을 띤 ‘왕’이다. 죄의 원장면에 자기 자신이 ‘범인’으로 서 있음을 확인한 후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른 그의 자기 처벌은 그런 의미에서 우주적 질서를 다시 순리로 돌리는 행위이다. 그것은 죄의 원장면에 대한 처벌인 동시에 공동체를 대표하는 자의 희생제의다. 이 처벌은 현대 이전 거의 모든 사회에서 전염병이 돌 때 군중이 ‘왕’의 책임을 물었던 그 희생제의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이 처벌이 가진 윤리적 의미이다. 그의 처벌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희생제의로 공동체는 다시 우주적 운행 궤도에 편입되고 평화를 회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 회복은 신들의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 결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윤리적 결단은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저주를 퍼부었던 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인간적 사건’이다. 이제 회복된 공동체의 평화 속에 신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반항의 시간


까뮈는 『페스트』에서 가공할 전염병이 휩쓸고 있는 현대 도시, 그리고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폐쇄된 도시의 봉쇄된 시간을 몇 가지 차원에서 체험하고 있다. 폐쇄된 도시, 질식 상태의 그 세계는 그 공간에 갇힌 사람들에게 세계에 존재하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인식하게 한다. 전염병은 압도적으로 강력하며 폐쇄된 도시의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다. 공동 공간에 느닷없이 찾아온 이 불청객은 육체적이고도 현실적인 고통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환기한다. 도시를 덮고 있는 공포와 고통과 불가항력은 우리 곁에 늘 함께 있으나 망각하고 있던 ‘죽음’을 인식하게 한다. 전염병의 시간은 전염병을 마주하고 있는 육체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의 느닷없음과 불가항력성과 보편성과 인간의 무력함을 극명하게 현시하면서 일상인의 세계에 간단한 방식으로 죽음의 형이상학을 마주하게 한다. 이 형이상학의 내용은 ‘부조리(不條理)’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하는 나 자신의 죽음을 대신하여 힘없이 쓰러져가는 목숨들을 보면서, 우리는 나 자신의 죽음 역시 저와 같이 느닷없이 찾아 올 것이며, 그것이 임박해 있고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앞에서 내가 살아온 생의 근거나 이력은 무의미하다. 세계는 이토록 ‘허약’하고 ‘부조리’하다. 


이런 시간은 인간성에 내재한 다양한 얼굴이 드러나는 시간이다. 도시의 재앙 속에서 ‘신’과 ‘죄’를 상기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앙과 혼란을 틈타 오히려 제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있다. 후자의 경우 공동체의 재난의 시간은 ‘기회’의 시간이다.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이 재앙을 피해 도망가려는 사람이 있으며, 이 재앙을 숙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초월과 회피와 자포자기와 이기심과 야만과 제사장의 얼굴이 한꺼번에 드러나고 공존하는 시간이 전염병의 시간이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간은 공동체를 온갖 인간성의 장터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은 또 다른 방식의 인간성을 확인하게도 만든다.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생명들이 연대하여 죽음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공동체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연대’로 드러나지만, 철학적으로 죽음에 맞서는 생명, 무한에 맞서는 유한성의 ‘반항’이다. 까뮈는 소설 속에서 이 태도를 “이미 창조되어 있는 세계”에 대해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실존적이며 윤리적인 태도로 요약한다. 이 반항적 태도는 부조리로 가득한 우주에 대한 ‘인간적’ 항의이다. 둥시에 이 항의는 전염병의 직접적인 결과인 죽음 자체뿐만 아니라, 이 상황이 초래한 야만의 인간성과 도시의 공포와 감정 과잉, 집단적 광기 같은 것들이기도 하다. ‘반항’은 우주적 부조리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인간성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반항은 전염병의 시간을 두 가지 차원의 인간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전염병이 초래한 여러 인간성의 마스크들과 마주한 인간의 반항인 동시에 창조된 세계의 부조리와 우주적 무한성에 저항하는 인간의 싸움이 그것이다. 그래서 까뮈는 자신이 쓴 어떤 문장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간이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반항적 인간>)라는 명제를 도출하게 하는 ‘철학적 시간’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기록은 다만 공포와 그 공포가 가지고 있는 악착 같은 무기에 대항하여 수행해 나가야 했던 것, 그리고 성자가 될 수도 없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그 대신 의사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 까뮈 『페스트』중에서

 


방제복의 폭력


그러나 영화 <감기>에서 폐쇄된 분당은 폐쇄된 오랑시와는 다른 차원에서 전염병의 시간이 오늘날 갖는 이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간의 가장 간명한 이미지는 ‘방제복’이다. 똑같이 폐쇄되었으나 오랑시와는 달리 ‘분당’은 ‘방제복’을 입은 ‘정부군’에 의해 통제되고 ‘장악’된다. 이 낯선 옷은 동일한 공간 안에서 ‘오염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표지다. 이 옷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침투를 완강하게 막아내는 방어막인 동시에, 방제복을 입지 않은 이들이 구제될 수 없으며 통제되고 곧 제거ㆍ폐기 되어야 할 ‘오염물’임을 보여준다. 방제복을 입은 이들은 예외 없이 ‘오염물’의 제거에 일사불란하고 완강한 ‘폭력’을 행사한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방제복을 입은 이들은 대상을 선별하고 분리하며 배제한다. 방제복을 입은 이들은 외계인처럼 낯설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계처럼 자동적이며 사물처럼 반응이 없다. 방제복의 그들은 ‘의사’지만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염물’을 분리하고 폐기하기 위해서, ‘군인’이지만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통제하고 완전히 ‘살해’하기 위해 투입된다.


그들 앞에서 지금까지 공동공간의 주체들인 줄 알았던 시민은 ‘시민권’의 허약성을 발견하며, 인간 존재가 사물로 순식간에 추락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방제복은 과학기술 문명의 무력함과 법의 허울과 국가의 부재와 폭력을 동시에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더 무서운 것은 전염병이 아니라 ‘국가’이며, 합리성에 의해 조직되고 규제되고 있다고 믿었던 현대문명의 비합리성이다. 까뮈에게 전염병의 시간은 우주의 부조리와 그에 반항하는 인간의 윤리를 드러내는 철학적 시간이었다. 하지만 방제복이 등장하는 <감기>에서 부조리는 인간 문명이다. 폭력적인 것은 우주가 아니라 문명이다. 진정한 질병은 국가다. 오늘날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간은 전염병보다 부조리하고 완강한 문명?국가의 은폐된 폭력이 비로소 민낯을 드러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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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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