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권력 지향적 사회에서 자유는 가능한가”
이진우 교수의 서재
철학을 전공하는 인문학자다 보니 책이 주위에 없으면 불안해질 정도니까 늘 읽는다고 할 수 있어요. 연구를 하다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잠들 때까지 늘 책을 읽는 셈이지요. 그렇지만 진정한 의미의 독서는 사이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사이 사이’에 읽어요. 책을 손에서 내려놓는 적이 별로 없으니까 특별히 책을 읽는 시간이 따라 정해진 것은 아니에요. 철학을 전공하는 인문학자다 보니 책이 주위에 없으면 불안해질 정도니까 늘 읽는다고 할 수 있어요. 연구를 하다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잠들 때까지 늘 책을 읽는 셈이지요. 그렇지만 진정한 의미의 독서는 사이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지방에 있는 관계로 서울을 갈 때면 기차를 이용하는데 차를 타고 도착할 때까지의 ‘사이’에 책을 읽어요. 한 줄 읽고 차창 밖 풍경 한번 보고, 멍하니 먼산 바라보다 다시 한 줄 읽고, 이런 식이지요. 예전에는 화장실에서 일 보는 사이에도 책을 읽었어요. 저녁에 TV를 보다 잠들기 전에도 책을 읽어요. 이 경우 독서는 집중하였던 머리를 이완시키는 수면제죠. 이렇게 중간 중간에 읽었던 책들은 나중에 불현듯 떠오르곤 해요. 저는 독서가 ‘여유로운 사이’의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요즘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면 책을 읽을 수 있는 ‘겨를’과 ‘사이’가 없어서일 거예요.
저는 정치철학자로서 늘 ‘권력’과 ‘자유’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어요. 비교적 다양한 문제들에 관해 연구하고 글쓰기를 해왔지만 사실 모두 권력 문제로 귀결된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권력과 자유를 대립적인 관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예컨대 권력은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에 자유를 원하면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인류역사를 돌이켜보면 권력이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권력은 필요해요.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과 자유를 실현하는 권력이 있을 뿐이지요. 제가 요즘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구체적 문제에요.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는 여전히 집단주의적이고, 그만큼 권력 지향적이에요. 많이 바뀌긴 하였지만 가정도 여전히 권위주의적이고, 직장과 사회관계에도 위계질서가 상당히 강해요. 우리사회가 제도적으로는 민주화되었지만 삶 구석 구석에는 개발독재시대의 권위주의적 군대문화가 깊숙이 스며들어 있어요. 제도와 문화가 어긋나 있는 이런 사회관계에서 자유를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최근 저의 관심사에요. 사회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인데 사람들은 점점 더 이기적이 되어가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자유의 문화를 실현할 수 있을까? 왜 우리 사회에는 ‘개인’이 없는가? 이런 관점에서 한 때 많이 읽었던 미셸 푸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등의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려고 해요.
제 서재는 ‘소성헌’(素惺軒)입니다. 마음이 조용해지고 조그만 깨달음을 얻는 곳이지요. 바깥에서 어떤 일을 겪었던 서재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안정되고 차분해져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좋은 곳,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본래의 마음을 되찾는 곳이 저에겐 서재에요.
최근에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썼습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위대한 사상가는 ‘동일한 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자이다. 좋은 독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모든 책은 똑같다. 그리고 모든 책은 다르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처음 읽은 것은 권력 문제를 연구하던 30여 년 전인데 지금 읽은 책과 그때 읽었던 책은 똑 같은 책이지만 느낌이 전혀 달라요. 우리는 종종 저자 이름, 제목과 목차에 유혹을 당하긴 하지만 책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우리는 같은 책을 읽더라도 전혀 다른 책과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명사의 추천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저/이진우 역 | 한길사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못마땅할 때 "세상이 왜 이래?"라고 묻지요. 이런 놀라움으로 시작하는 정치철학은 종종 이 세상과는 다른 유토피아를 그립니다. 이 세상과는 다른 유토피아를 실현하겠다는 시도가 종종 더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히틀러의 전체주의를 온몸으로 겪은 아렌트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천착한 이 책이 저에게 준 지적인 충격은 엄청났어요.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에요.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저/전양범 역 | 동서문화사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까지 존재라는 하나의 문제를 갖고 이렇게 집요하게 물고늘어진 책을 본 적이 없어요. 하이데거라는 이름을 따라다니는 온갖 정치적 오류와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를 20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만든 책이에요. 독일 유학시절 첫 여름방학에 독일어로 완독하면서 느꼈던 희열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책을 많이 읽기보다는 하나의 문제를 치열하게 사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군주론
니콜로마키아벨리 저/강정인,김경희 공역 | 까치(까치글방) | 원제 : IL PRINCIPE
두말할 나위 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책이에요. 그때까지 사람들이 입에조차 올리길 꺼려했던 권력 문제를 담론의 한 복판으로 끌어들인 책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책으로 여겨지지만, 권력 문제를 천착하려면 반드시 먼저 읽어야 할 책이에요. 좋은 책을 쓰려면 거꾸로 지금 가장 위험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거에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저/이재룡 역 | 민음사 | 원제 : L'insoutenable legerete de l'etre
제목만으로도 읽고 싶어지는 책들이 있는데, 쿤데라의 이 책이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중심을 잡아줄 의미와 가치를 찾지만, 삶 자체가 영원히 반복되는 가벼움의 연속이라면 어떨까요? 1968년 러시아 장갑차가 프라하에 진주하였을 때 공산주의 독재 시대를 살아가는 한 부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은 자유에 관한 책이에요. 삶은 반복될 수 없기에 우리 삶을 스스로 작곡해야 한다는 니체의 메시지를 던져요. 이 삶이 나의 것이 되려면 우선 삶의 가벼움을 참아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소설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이에요.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저/홍석영 역 | 풀빛
쿤데라의 책을 읽으면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들어요. 윤리학에 관한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도덕, 양심, 선과 같은 진부한 내용을 늘어놓지는 않아요. 인간이 갖고 있는 온갖 결점, 악덕, 본성에도 불구하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균형 있게 다루고 있어요. 너무 중도를 추구하면 지루하고 재미 없을 수 있지만 균형을 잡기 위해 필요한 양 극단에 대한 서술이 재미를 더해주는 책이에요.
영화
리바이어던
감독: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 소니 픽쳐스
러시아의 조그만 바닷가 마을에서 부패한 시장에 대항하여 자기 집을 지키려는 평범한 아버지의 처절한 생존싸움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결코 약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드러내지 않아요. 이 영화가 주인공 콜랴의 두 번째 부인과의 위태로운 결혼생활, 반항하는 아들, 서로를 이용하는 친구관계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할수록 시장으로 대변되는 괴물 같은 국가권력이 얼굴을 드러내지요.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사회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희망이 안 보이는 북극 지방의 해안 풍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고래의 형해가 괴물처럼 보이네요.
윈터 슬립
감독: 누리 빌게 제일란
러시아 영화 <리바이어던> 위선이 권력과 결합하면 끔찍한 괴물을 낳는다고 역설한다면, 터키 영화 <윈터 슬립>은 위선이 무관심과 결합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를 보여줘요.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조그만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공 아이딘은 실제로 산아래 동네 사람들을 다스리는 지주같지만 늘 양심과 도덕을 운운하며 자신이 상당히 공정하고 자비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어느 날 세입자의 아들이 아이딘이 탄 차에 돌멩이를 던지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아이딘의 기만적인 삶이 양파처럼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해요. 그런데 아이딘의 기만과 위선을 폭로하는 것은 자신과 자기 부인, 그리고 누이 동생 사이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에요. 이 영화에서도 출구는 보이지 않아요. 진심을 담지 않는 대화는 무관심만 강화할 뿐이에요. 겨울 잠이 끝나고 새 봄이 오더라도 무의미한 대화만 계속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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