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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나는 날

안녕, 엄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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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아가. 냉정한 엄마라서 미안해. 그런데 엄마는 지금 배가 너무 아프구나. 우린 앞으로 오래 볼 사이니까 조금만 이해해줘. 그런 텔레파시를 보내는 동안 나는 천천히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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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중요한 일을 앞두면 긴장되고 떨리다가 막상 디데이가 되면 차분해졌다. 시험을 볼 때도, 중요한 면접이 잡혔을 때도, 결혼하는 날도,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자라났다.


오전에 입원해서 간단한 검사를 한 다음 수액을 맞았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임신 기간을 통틀어 심적으로 가장 편안한 상태에 빠졌다. 붙잡고 있던 원고를 넘긴 뒤라 소설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고, 임신을 확인한 뒤 불안하고 당황스럽던 초기의 날들,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입덧, 다양한 증상 들은 어느새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이제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으며 아이와 부대끼는 삶만이 숙명처럼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엄마와 옆 사람은 금방 끝날 거다, 눈 뜨면 아기가 옆에 와 있을 거야, 푹 잔다고 생각해, 하며 응원했지만, 몇 시간 뒤면 몸이 가벼워질 거라는 기대감과 아이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 때문에 무섭지 않았다. 게다가 트렁크 속에는 조리원에 가서 읽으려고 주문해둔 책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있던 순간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다행히 마취 후 의식이 바로 흐려졌다. 중간 중간에 “이야, 크네” 하는 소리가 들렸고 양수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산모님, 눈 떠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간호사들이 나를 이동식 침대로 옮겼다. 아랫배의 통증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확인시켜줬다.


가족들은 아기를 보러 신생아실에 가고 입원실에는 엄마와 나만 남았다. 무통 주사를 맞는데도 아랫배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끙끙거리며 가슴 밑을 더듬어보았다.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한껏 튀어나왔던 배가 살짝 가라앉았다.


- 애기 보고 싶지?


참아보려 해도 끙끙 소리가 새어나왔다. 엄마가 안쓰럽다는 듯 이불을 덮어주었다.


- 너무 아파서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나.
- 야, 다른 사람들은 눈 뜨면 애부터 찾는다는데 너는 궁금하지도 않냐?
엄마는 냉정한 년, 애기가 불쌍하다,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무통의 황홀함을 기다리며 눈을 꼭 감았다.
- 안녕, 아가. 냉정한 엄마라서 미안해. 그런데 엄마는 지금 배가 너무 아프구나. 우린 앞으로 오래 볼 사이니까 조금만 이해해줘.


그런 텔레파시를 보내는 동안 나는 천천히 무통의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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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서유미(소설가)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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