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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본에 대하여

그럼에도 사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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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사인과 날짜, 낯간지러운 카피가 들어간 사인본은 그간 많이 받아봤어도 수신자로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사인본은 처음이었다. 삼초간 심장이 쿵,했다. 그 때 알았다, 아 내 이름으로 사인받을 때 이런 기분이구나.

남들이 열광하는 것들 중 내가 함께 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사인본이다. 사인 받으려고 긴 줄을 선다거나 냅킨에라도 사인을 받겠다는 열의가 신기했다. 책에 사인을 ‘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부터 그랬다.

 

가까운 예로 열 여섯 살, 일본 오사카에서 재일교포 위문공연을 하러 온  가수 조용필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관계자를 아버지로 둔 학교친구 덕에 몇몇 친구들은 백스테이지 방문도 모자라 공연 후 전 스텝들과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식후 디저트가 나올 즈음 친구들은 반짝반짝한 여고생 눈망울로 종이와 펜을 가지고 조용필씨 자리로 가서 사인을 요청했다. 사인을 마친 조용필씨는 ‘사진도 같이 찍자’며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포즈를 취했고 급기야는 저쪽 테이블에서 등 돌리고 혼자 앉아있던 나까지도 불러서 같이 찍었다. 모두들 내가 내성적이라 자리를 지켰다고만 생각했다.

 

조용필임경선.jpg

27년 전의 조용필씨와 나

 

근래에 사인본이 더욱 시큰둥해진 이유는, 대놓고 말하면 중고서점에 내다팔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집은 이래저래 사들인 책들로 초토화될 지경인데 여러 출판사에서도 끊임없이 홍보용으로 책들을 보내주신다. 물론 불평해서는 안 되는 고마운 일이지만 게 중에는 내 취향이 아닌 책이나, 재미없는 책이나, 읽더라도 소장하고 싶지 않은 책들도 있다. 그럴 때는 파는 게 좋은데 저자 사인이  있으면 아무래도 팔기가 난감하다. 정성껏 사인해서 증정한 자신의 책을 중고서점 매대에서 발견하면 분명 신나진 않을 것 같다. 일부러 자기 책은 갖다팔지 말라고 사인을 책의 면지가 아닌 본문에 하는 작가도 있다고 한다. 사인 부분만 교묘히 잘라내서 파는 것도 못할 짓이다. 책들은 이래저래 쌓여만 간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엄마와 연애할 때』『나라는 여자』, 두 개의 에세이를 내면서 친필사인본 5천 부씩을 준비해야만 했다.


“왜 해요? 대체 누가 이런 걸 원한다고?”
미간을 찌푸리며 편집자에게 내가 물었다.


“저자의 친필사인을 좋아하는 독자분들 의외로 많아요.”눈이 작은 나의 담당 편집자는 딱 잘라 말했다. 팔목 아픈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나라면 지저분해서 싫을 것 같은데…’라며 사인면지를 만드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출판사가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을 보내왔다. 통상적 홍보를 목적으로 보냈겠거니 했는데 면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임경선님께, 2012 여름비행 김애란’

 

저자의 사인과 날짜, 낯간지러운 카피가 들어간 사인본은 그간 많이 받아봤어도 수신자로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사인본은 처음이었다. 삼초간 심장이 쿵,했다. 그 때 알았다, 아 내 이름으로 사인받을 때 이런 기분이구나. 어머, 김애란씨가 나를? 얼마 후 출판사의 빈 회의실에서 내 신간을 백여 권 쌓아놓고 얼굴도 모르는 ‘관계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이름과 사인을 휘갈기는 영혼없는 의식을 치루고 나서야 진상을 알게 되었다. 혼자 ‘김애란이 나를 아나?’라며 우쭐했던 게 얼마나 민망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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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심쿵 사인, 김애란의 『비행운』


그렇다해도 강연이든 독자와의 만남에서든, 독자 한 분 한 분께 사인을 해드리는 일은 즐겁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 책을 사는 행위는 ‘사랑’이니까.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꾹꾹 사인에 매진한다. 회사 팀사람들에게 주욱 돌린다며, 친구들에게 하나씩 선물로 돌린다며, 네다섯 권씩 품에 쌓아 일괄사인 받으러 오시는 분들이 참 고맙다. 이름이나 메시지 없이 오늘 날짜와 사인만 해달라면 더욱 고맙다. 아이 돌잔치때 봉투만 보내는 이들을 향한 마음 같달까. 한 남자분은 자기 차례가 오자 사인과 함께 달콤한 사랑의 메시지를 친필로 써달라고 주문했다.

 
“받으시는 분 기분 좋으시겠네요. 운 좋은 여자친구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고개를 숙인 채 제일 위에 마지막으로 쓸 이름을 물었다.
“아, 그게…미래의 여자친구에게 줄 거라서요… 이름은 아직…”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 남자분을 올려다보았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속으로 빌었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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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경선 (소설가)

『태도에 관하여』,『나의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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