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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길이와 속도 <위 아 영>

물리적 나이가 다른 친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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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생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쉽게 상처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 같다. 물론, 상대의 일상을 존중하며, 몇 발 짝 떨어져 응원해줄 수 있는 거리를 지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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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나이가 다른 친구에 대하여

 

철없던 시절이라 해봐야 불과 몇 년 전이지만, 나는 우울한 부류의 인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혹독한 지병을 앓거나, 사업에 실패했거나, 가정이 깨져버린 것도 아닌데, 마냥 우울한 인간들의 심리에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언제나 즐거웠고, 머릿속엔  아이디어가 넘쳤고, 몸속엔 새 원고를 쓸 에너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듯, 이 시기는 벚꽃이 지듯 끝나버렸다. 생의 봄이 지나자, 여름처럼 뜨겁게 일해야 했던 시절이 왔고, 그 바쁨의 대가가 ‘금세 사라질 통장 잔액 뿐’이라는 걸 깨닫자, 모든 것에 그만 무덤덤해지고 말았다. 크게 흥분할 일도 낙담할 일도 없어져, 무기력해지고 만 것이다. 그러면서 아득하게 느껴진 부류의 인간들, 즉 우울한 족속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내가 그 중의 한 명이 돼버렸으니까. 

 

부모는 늙어가고, 나 역시 늙어간다. 일상은 변함없이 가혹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속에 내재된 분주함의 무게는 줄지 않는다. 과거에 기뻤던 일들에 서서히 무감각해지고, 벅찼던 일에도 힘들어지지 않는다. 감정의 파도가 잔잔해졌다. 청신호인지, 적신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생은 이토록 잔잔하고 지루하게 흘러갔다. 그러다보니 ‘인생이 참으로 길다’고 생각에 이르렀다.

 

<위 아 영>에 등장하는 중년 부부는 이 긴 생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 아기를 가지려고 노력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하며 삶의 동력을 잃어버렸다. 지친 이들에게 표준적인 삶의 속도로 살아가는 또래 친구들은 따라가기에도 벅찼다. 또래 집단이 가지는 장점과 단점이 늘 그렇듯, 삶의 속도가 다른 친구는 점차 멀어지기 마련인지라, 아기를 낳은 친구 부부와의 대화는 이 둘에게 버겁기만 하다. 게다가 나이에 비해 변함없이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신들의 일상은 잔잔함을 넘어 지루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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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다음 문을 열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이들은 이제 찬란했던 과거로 돌아가려 한다. 마침, 이 중년의 부부 앞에 젊고 활기찬 부부가 나타난다. 또래 부부들에게 느끼지 못했던 발랄함에 빠진 이 둘은 서서히 젊은 부부와 가까워진다. 힙합 댄스를 배우고, 자전거를 타고, 페도라를 쓰고, 불편해서 처 박아뒀던 패션 슈즈를 꺼내 신는다. 이들은 이렇게 물리적으로 젊음의 활기를 되찾고자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속도에 맞는 느리고 긴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실 이 영화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영화의 만듦새가 개인적 기준치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며 이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젊음이란 무엇인가. 언제나 그것은 내게 ‘고속 주행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막상 타고 있을 때엔, 속도를 온전히 실감치 못한다. 오히려 다른 차 들이 늦게 달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질주의 순간은 잠시 뿐이지만, 간혹 그 순간들이 고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 질주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답답한 신호체계와 다른 느린 차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차에게 내리고 나서야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찰나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렇게 질주의 순간은 지나간다. 

 

아울러 조금 범위를 넓히자면, 인생 전체를 ‘길이와 속도’의 개념으로 바라본다. 즉, 어떤 이에게 인생은 길고, 어떤 이에게 인생은 짧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빠르게 살며, 어떤 이들은 느리게 산다. 대개 인생이 짧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빠르게 살 것이고, 길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느리게 살 것이다. 나는 인생을 짧다고 생각하는 부류에서, 길다고 생각하는 부류로 이동했다. 즉 빠르게 살다가, 느리게 살게 된 것이다. 대개 젊은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이 이 절차를 각자의 방식대로 밟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나이 차가 꽤 나는 사람들에게 느꼈던 불편한 감정은 대개 생에 대한 이 인식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간혹, 나이 차이가 날 뿐이지, 영혼이 몹시 닮은 사람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경험상 이런 관계에서 주로 상처 받는 쪽은 나이가 많은 쪽이었다. 내 경우엔 대개 앞서 언급한 생에 대한 인식 차이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흔치 않은 존재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려 할 때 중요한 것은 생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쉽게 상처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 같다. 물론, 상대의 일상을 존중하며, 몇 발 짝 떨어져 응원해줄 수 있는 거리를 지키면서 말이다. 

 <위 아 영>은 이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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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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