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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되돌아오는 시간

유령은 공동체에 죄의 연루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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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은 ‘유령’에 관한 드라마다. 유령은 드라마의 처음 무대에서부터 나타나 수시로 출몰한다. 이 수시적인 출몰이 아니라면 사실 그는 유령이 아닐 것이다. 유령은 ‘되돌아오는 것(revenant)’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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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공동체에 죄의 연루를 묻는다

 

햄릿 ……맹세해.


유령 (땅 밑에서) 맹세하라.
〔그들이 맹세한다〕


햄릿 쉬어라 쉬어, 불안한 혼령 아! 그럼,
내 모든 사랑으로 자네들에게 날 맡기네.
그리고 햄릿처럼 가난한 사람이
사랑과 우정을 표할 길은, 신이 원하면,
부족하지 않을 걸세. 같이 들어가지,
또한 항상 손가락을 입술에, 부탁이야.
뒤틀린 세월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 아, 저주스러운 낭패로다,
그걸 바로잡으려고 내가 태어나다니.
아니, 자, 우리 같이 가세. 모두 퇴장
- 셰익스피어, 『햄릿』, 최종철 역, 민음사, 2006, 1막 5장, 52면.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은 ‘유령’에 관한 드라마다. 유령은 드라마의 처음 무대에서부터 나타나 수시로 출몰한다. 이 수시적인 출몰이 아니라면 사실 그는 유령이 아닐 것이다. 유령은 ‘되돌아오는 것(revenant)’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유령을 보는 이는 왕자 햄릿 한 명만은 아니다. 그것은 유령이 ‘공동 존재’임을 암시한다. 유령은 무언가 ‘공동체’에 할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령의 말을 모두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유령과 마주할 수는 있으나, 아무나 유령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다. 유령이란 공동체의 희생양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령이 되돌아오는 시간이란 공동체에 ‘죄’의 연루를 묻는 시간이다.


예컨대 한국의 귀신(鬼神)들도 되돌아온다. 그런 점에서 귀신은 ‘귀신(歸神)’이다. 한국 귀신들의 대부분은 여자다. 왜인가. 여자들이야말로 전통사회에서 공동체의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따르고, 가문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의 기율에 헌신했으나, 공동체는 그것에 감사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억울한 죽음 중에는 공동체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공모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괴담이 번성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가 ‘여자고등학교’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이, 여자, 학생이 우리 사회 공동체의 가장 약한 고리라는 뜻이다. <여고괴담>이라는 영화에서 여고생?여자고등학교는 우리 공동체를 유지하는 공동의 사회적 억압을 기율을 압축하고 있다. 이 사회적 억압을 만들고 유지하고 묵인하는 데에 공동체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공모한다. 귀신이 되돌아오는 시간이 밤인 것은 밤이 ‘무서운 시간’이라서가 아니다. 밤은 낮의 기율 -그것은 산 자들의 기율을 뜻하는데- 즉, 공동체의 기율이 잠들면서 그 기율이 최대한 약화되고, 그 ‘쌩얼’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같이 가세


다시 햄릿으로 돌아오자.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유령의 출현은 공동체가 오염된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유령의 말을 알아듣는 유일한 자는 왕자 햄릿이다. 그는 유령에 신들려 있다. 햄릿은 유령과 ‘맹세’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함께’ 맹세한다. 햄릿-유령은 ‘함께 존재’다. 이 맹세는 주체의 시간을 타자의 시간과 연결시키며, 이 타자의 시간은 유령이라는 타자뿐만 아니라 주체 행위의 책임을 미래로 내던지면서 책임질 수 없는 시간까지 책임지겠다는 비극적 결단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부터 “우리”가 되고, 행동도 같이 한다(“우리 같이 가세”). ‘땅 밑’은 유령의 근거지이지만, 맹세를 공유하는 햄릿에게는 ‘땅 밑’이 이제 자기 근거가 된다. 유령과 ‘함께 존재’를 맹세한 햄릿의 시간은 땅 위에 있지 않다. 그는 땅 위에 살면서도 ‘땅 밑’의 시간에 속하는 자다. 그는 산 자들의 시간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시간을 (대신) 산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라는 유명한 햄릿의 질문은 이런 점에서 ‘죽느냐 사느냐’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시간의 자기 근거를 산자들의 현행 세계 시간 속에 둘 것인가, 아니면 유령의 시간에 둘 것인가 하는 ‘시간의 근거’에 관한 질문이라고 봐야 한다.


유령은 ‘되돌아오는 것(revenant)’이라고 말했다.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되돌아와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문제가 되돌아와야만 하는 ‘당위’로 전환된다. ‘존재’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기(The time is out of joint)’ 때문이다.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을 바로 잡는 것, 어긋남을 정상으로 복귀시키는 것, 시간을 시간의 본래 궤도로 귀환시키는 것. “햄릿은 그걸 바로 잡으려고 내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유령 역시 그걸 바로 잡기 위해 되돌아온다. 햄릿-유령에게 ‘시간의 귀환’은 소명으로서의 윤리다. 주목할 점은 햄릿이 그걸 “사랑과 우정”의 윤리, “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신이 원하는 사랑과 우정의 윤리, 신적인 시간의 복귀 또는 정상으로 전환되는 시간이란, 곧 메시아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령에 의해 암시되고, 유령에 신들린 자의 것이기에 현실에서 (쉽게) 수락될 수 없는 시간이다. 세계 시간이란 산 자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철학자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따르면, 이 유령은 뼈와 살이 없으므로 보이지 않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사물(thing)’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존재하지만 지각되지 않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그것을 그저 ‘어떤 것(~thing)’ ‘사물(thing)’이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서 유령은 사람들에게 줄곧 ‘~것/사물(thing)’로 불린다.(미셀러스: 어, 그것이 오늘밤에도 다시 나타났어What, ha's this thing? 바나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I haue seene nothing.) 그러나 지각되지 않는 ‘이 사물(this thing)’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The time is out of joint). 햄릿은 시간의 어긋남을 바로잡도록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지금 여기’ 시간의 왜곡을 ‘시간의 올바름’, ‘올바른 길’과 명료하게 대립시킨다. 이 탄식은 역사?시대가 정당한 규칙에 따라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수정의 책임을 떠맡은 자기 운명을 저주한다. 이 저주는 ‘시간의 올바른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서, 사물(유령)의 저주이며, 땅 위에서는 함께 할 수 없는, 지하의 사물과 함께 하기를 지속하려는 맹세로서 “사랑과 우정”에 속하는 일이다.


이 사랑과 우정의 맹세는 마치 소포클레스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가 “나는 산 사람들보다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할 시간이 더 많다”고 했던 수수께끼 맹세를 떠올리게 한다. ‘죽은 사람들의 시간’이란 육체는 사라졌으나 온전히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의 시간이며, 현재 산 사람들의 시간의 정당성을 되물으며 되돌아오는 물음표의 시간이다. 이 물음표는 현재 세계시간에 육체의 몸을 갖고 있지 않은 존재들의 시간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즉 앞으로 태어날 자들의 시간까지를 포함한다. 그 시간은 그러므로 회복되어야 할 시간과 도래할 시간을 지시하면서, 산 사람들의 현재 시간이 특수성에 머무는 좁은 시간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보편적’ 시간이다. 되돌아오는 시간으로서 유령의 시간이란, 이렇게 망령처럼 현재에 틈입하여 ‘시간의 올바름’으로의 회복을 호소하면서, 현재 시간 너머를 환기하고, 현재 시간을 초과한다. 안티고네 역시 햄릿과 거의 유사한 맥락에서 이 ‘죽은 자들의 시간’을 왕의 법에 대비되는 ‘신의 법’이 지배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햄릿이 이 시간의 윤리를 ‘사랑과 우정’의 윤리라고 말했다면, 안티고네는 “우리는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요”라고 말한다. 문학의 시간은 늘 이 죽은 자들의 시간, 유령의 시간에 ‘함께 존재’가 되어 머문다.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함께 하기를 의지하고 욕망한다("우리 함께 가세").


지금 우리 시대 작가들의 시간은 여전히, 아니 이제부터 진도 앞바다, 광화문광장에 ‘그들’과 “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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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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