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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징비하고 있습니까?

『류성룡, 7년의 전쟁』 이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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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변고가 생겼는데 책임지는 이가 없다면 이 나라는 허깨비가 됩니다. 장차 후학들이 뭘 배우고 뭐가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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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KBS에서 방영되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징비록>에서 류성룡 역을 맡은 배우 김상중이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 언급한 대목이다. 이 드라마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냈던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기록한 『징비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담았는데, ‘징비’는 『시경(詩經)』의 ‘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말하자면, 과거 조정의 잘못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다시는 그런 전란을 겪지 않도록 대비하자는 유비무환의 기록이다. 지난 3월 30일, 서울 신촌의 한겨레문화센터도 류성룡과 징비록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류성룡, 7년의 전쟁』을 집필한 이종수 저자가 독자들과 만났다.

 

이종수, 류성룡을 말하다

 

미술사가인 저자는 왜 류성룡에 관심을 가졌을까. 이 책을 낸 뒤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인데, 그는 2년 전, 조선시대 그림과 역사를 관련짓는 『그림문답』을 낸 바 있다. 그는 이 책에 ‘사림의 시대’였던 16세기의 그림인 ‘독서당계회도(1572년)’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류성룡이 계회에 참석한 기록이 나오고, 류성룡이 전쟁의 참혹한 역사를 어떻게 책임졌는지를 다뤘었다. 특히 류성룡은 임금이 하사한 공신과 초상화를 거부한 유일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호기심이 갔다. 그리고 한 꼭지로 끝내기에 뭔가 아쉬웠다. 류성룡을 대상으로 작업을 더 해보고 싶은 생각에 평전격인 『류성룡, 7년의 전쟁』을 썼다.

 

“이 책을 쓰면서, 역사를 어떻게 무엇으로 볼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 시대 누군가의 삶, 그 생생한 증언을 담고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이 견뎌낸 시간과 시대를 추론해보고 싶었다. 지금도 만족스러운 시대는 아닌데, 역사적으로 힘들었던 시대의 누군가를 불러내서 어떻게 그것을 견뎌냈는지 등을 묻고 싶고 위로를 받고 싶었다.”

 

류성룡은 네 살에 글을 읽고, 여덟 살에 『맹자』를 읽었다. 고향은 안동이지만, 공부는 한양에서 했다. 퇴계 이황 문하에서 몇 달간 수업을 받았다. 퇴계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퇴계의 칭찬을 받은 큰 제자로서 이후 퇴계학파의 한 줄기를 이뤘다. 영민했던 류성룡은 25세에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다. 29세에 경연에 들어가 제일의 강관(講官?경연시간에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던 문관)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당시는 당파 간 갈등이 심했고 류성룡도 이런 갈등의 파고를 타고 고향과 한양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러다 좌의정 재임 중인 1592년 임진년 전쟁이 일어났다. 1년 뒤 영의정에 임명돼 전쟁이 끝나가는 1598년까지 정치와 군사를 책임지는 도체찰사를 겸임했다.

 

류성룡에 대한 평가도 당파의 시선에 따라 크게 엇갈렸다. 광해군 때 기록으로 북인이 주로 썼던 『선조실록』에 의하면, 류성룡은 천하의 나쁜 놈이었다. 이후 서인이 쓴 『선조수정실록』에선 그에 대한 표현이 약간 온순해진다. 다른 기록을 함께 봐야하는 이유다. 당시의 사대부들은 일기를 많이 썼다. 특히 임진왜란에 대해선 다양한 기록과 일기와 각종 문집이 존재한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그 가운데서도 독특한 자리를 차지했다 일기류도 아닌 전쟁이 끝난 뒤의 회고록은 『징비록』이 처음이었다. 저자는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로 류성룡이 영의정이어서 최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징비록』은 정적들에게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공적만 적었다는 이유였다. 

 

류성룡, 7년 전쟁을 기록하다

 

전쟁 당시 조선은 선조/광해군,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나라는 일을 전혀 하지 않은 최악의 황제였다는 만력제가 있었다. 조선에서 전쟁을 수행한 주요 벼슬아치들은 류성룡, 이순신,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등이었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이들은 좌의정(정1품), 좌수사(정3품), 이판(정2품), 대사헌(종2품), 도승지(정3품)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위의 수장이었다.

 

“선조는 수시로 신하들을 의심했던 임금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전쟁이 일어났고, 선조는 4월 30일 한양을 버리는 파천을 했는데, 이것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한양은 5월 2일, 평양은 6월 15일에 차례로 함락이 됐고, 임금은 의주로 피난을 갔다. 그나마 7월 8일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대승을 거둬 일본의 보급로를 끊었다. 그 와중에 명나라 원군이 내려왔는데, 첫 전투에선 명나라가 졌다.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9월 2일, 명나라 사신 심유경이 평양에 와서 협상이 이뤄졌고, 이듬해 1월 8일 평양을 탈환했다. 4월 20일에 한양을 수복했으나 임금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 수복은 전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협상에 의한 것이었다. 나고야에서 5월 23일 일본과 명나라가 협상을 펼쳤으나 진주성 전투가 있었던 6월 29일을 끝으로 큰 전투는 끝났다. 이후 정유재란까지 강화협상의 시대로 들어섰다. 그 말은 외교 협상만 잘했어도 정유재란은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강화협상 시기(1593.7~1596.8)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에 강화 7조건을 제시하나 명나라의 심유경은 조정에 이를 곧이곧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가짜 국서를 올렸다. 조선은 원칙적으로 강화에 반대했지만 협상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음에도 말이다. 9월 강화는 결렬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을 선언했다. 1597년 2월, 이순신은 탄핵을 받고 투옥이 되고 백의종군하게 됐다.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수군통제사 원균의 수군이 대패했다.

 

“임진왜란과 달리 정유재란의 전투는 남부 쪽에 집중돼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말 조선을 먹는 것이 목적이었을까. 조선을 일본의 영토화하기보다 조선의 복종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는지 추측한다. 칠천량에서 원균이 대패하면서 전라도 곡창 지대가 왜군의 발아래에 놓였다. 조정은 급해졌으나 직산에서 명나라가 왜군을 패퇴시키면서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조선에는 10월에 그 소식이 전해졌다. 마지막 전투는 11월 19일 노량에서 일어났고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다. 실질적으로 전쟁이 끝났다.”

 

그렇다면 류성룡은 전쟁의 시기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저자는 류성룡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이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우리는 왜 이런 전쟁을 맞이해야 했을까.

 

『징비록』에서는 일본을 너무 몰랐다고 말한다. 류성룡은 신숙주가 일본을 알라고 했던 유언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소홀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면서 『징비록』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명, 일본, 여진에 대한 시각을 보면, 선조는 겉으론 명나라의 은혜로 산다고 했지만, 류성룡은 남을 구원하는 것과 남에게 구원을 바라는 것은 사정이 다르다면서 명나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중재에 나섰다고 보았다.”

 

류성룡은 전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백성의 마음이 왜 떠났을까. 민심을 무너뜨린 임금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류성룡은 전투를 줄 세워놓고 이를 분석하면서 하나의 사건이 다음 사건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파악하고자 했다. 다채로운 사건에 대해 자신의 시각과 평가로 체계를 세웠다. 류성룡은 특히 백성들이 나라의 근간이자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며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전투를 수행하지 못함을 강조했다. 전쟁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고민했던 사람이었다.

 

“전투 현장을 샅샅이 봤던 사람으로서 류성룡은 꼼꼼히 정책들을 내놓았다. 전쟁 중이지만 전쟁 중이기에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류성룡은 영의정, 도제찰사, 훈련도감, 안집도감 도제조를 거치면서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을 발탁해서 썼다. 진관제 복구, 곡물을 쌀로 바치게 하는 작미법(대동법의 근간) 시행, 이순신도 같은 생각을 했던 둔전, 염전 등의 건의를 시행했다. 북방 여진족에 대비한 건의도 많이 했다. 이 중 사대부들이 특히 좋아하지 않은 것이 작미법과 훈련도감 설치였다. 또 노비를 군사로 돌리거나 공을 세웠을 때 면천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대부들은 반대했다. 류성룡이 실각한 다음, 다른 것들은 무너졌다.”

 

류성룡이 아쉬워한 순간도 많았다. 전쟁 발발 전의 대비책, 평양 사수 포기, 평양성 탈환 이후의 유영경과의 갈등, 백제관 패배 후의 이여송 후퇴, 김성일의 죽음과 제2차 진주성전투 패배, 수상 발목 잡기(조정안의 시비들), 이순신 탄핵 등이 그것들이었다.

 

『징비록』 이후 징비했을까?

 

그렇게 전쟁이 끝난 뒤 세 나라는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동북아 질서도 바뀌었다. 일본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쟁이 끝나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군에 승리하면서 에도 정부가 수립됐다. 이후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도쿠가와 막부 시대가 열렸다. 중국은 만력제 이후 제국이 흔들렸다. 명나라는 전쟁 지원 등으로 국력이 소모된 탓인지 1616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후금(청)을 건국하고 1644년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 청이 중원의 제국으로 들어섰다.

 

반면 조선은 세 나라 가운데 정권이 유일하게 유지됐다. 그러나 전란 수습의 과제가 남았다. 중국과 일본의 정부가 바뀜으로써 새로운 동북아 정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에 휩싸였다. 류성룡은 불충, 주화오국, 무능과 탐욕 등의 공격을 받고 탄핵을 당했다. 류성룡 탄핵의 이면에는 각자의 입장이 있었다. 선조 입장에선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고 북인은 주전파의 명분으로, 서인은 어부지리였으며 남인이라고 류성룡을 전부 돕진 않았다. 류성룡과 사이가 나빴던 조목 계열이 남인의 권력을 잡았다.

 

“류성룡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돌아봤을까. 『서애문집』을 보면 죽기 전 일주일 전에 쓴 詩가 있다. 이 詩에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징비록』을 보면, 한 시대의 전쟁을 겪어낸 사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를 추측할 수 있다. 류성룡은 이런 것을 반복하지 말라며 『징비록』을 썼는데 조선은 과연 징비했을까?”

 

산은 말이 없고 두견새는 우는데
두견새 울어대도 산은 답하지 않네
산은 비록 말 없으나 뜻은 이미 족하니
희부연 달 떠올라 매화가지 끝이 희구나
_ 류성룡, 1607년 4월 30일

 

Q&A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유럽보다 조총수가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일본이 세계 최고 군사력을 가졌다고 하더라. 일본은 명나라까지 가서 세력을 확장하고 싶었던 것인지, 동북아정세 상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최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최근의 연구 흐름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망상으로 일으킨 것이라는 견해도 있는데, 그가 당시 전황을 잘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이래저래 간을 보면서 정유재란 당시 일본 국내용 멘트로 내가 조선을 치겠어, 라고 말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벚꽃놀이를 갔다. 명나라까지 치겠다는 것보다 조선을 일단 치고 (여건이) 된다면 그렇게 해보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이것은 내 의견이다.

 

임진왜란을 서양에서는 ‘중일 전쟁’이라고 말하던데, 일본과 중국이 전쟁을 하지만 무대는 한반도였다. 임진왜란 후에도 조선은 징비를 하지 않았고 청일전쟁 때는 결국 나라를 잃는 상황까지 왔다. 지금 우리는 징비를 하고 있을까?

 

지금 상황을 보면, 징비를 않고 있다. 어려운 시기다. 국내에서 수습이 안 되면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쉽지 않다. 사회가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도 받지 못한다. 갈등 상황도 심하고 국가 전체가 새로운 꿈을 꾸거나 젊은 사람에게 꿈을 꾸도록 하는 것 같지 않다. 『징비록』이 지금 대두되는 것도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따라 한 나라의 힘을 볼 수 있는데, 임진왜란처럼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국난에 닥쳤을 때 이를 해결하고 책임지는 자세가 중요하다. 다음 세대에게 그렇게 어려울 때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나는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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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7년의 전쟁이종수 저 | 생각정원
저자 이종수는 류성룡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전 생애가 아닌, 그를 ‘류성룡’으로 기억하게 해준 임진왜란에 집중했다. 선조를 대할 때마다 가슴 아파했던 마음의 거리, 당파가 달랐지만 이덕형을 향한 깊은 신뢰, ‘그의 바다’를 지킨 이순신을 향한 마음, 무엇보다 전란을 가장 고통스럽게 견디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 《류성룡, 7년의 전쟁》은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차마 다 말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의 전쟁을 따라간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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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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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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