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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은 “한국 개신교 상황 이종격투기와 비슷해”

『메가처치를 넘어서』 신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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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처치 논박』으로 교회가 커지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던 신광은 저자가 『메가처치 넘어서』를 썼다. 교회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 크다고 문제인가? 저자는 단연코 문제라고 주장한다. 왜 교회가 비대해지면 안 되는지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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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교회를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시내 한복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건물, 그 건물 안에도 한번에 들어갈 수 없어 시간별로 예배를 보는 장면, 교회 앞에 늘어선 신도를 싣고 온 수십 대의 고속버스 등등. 등록된 교인이 수십 만 명이나 되는 교회도 있다.

 

『메가처치를 넘어서』의 저자 신광은 신학 박사는 이러한 메가처치에 주목한다. 그는 현재 한국 개신교의 많은 문제가 메가처치 현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메가처치 현상이란 교회가 공교회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개교회만의 성장을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 뭐가 문제인가, 신도 수가 많아지면 좋지 않으냐는 반문에 저자는 단연코 아니라고 말한다. 성장만을 좇다 보면 교회는 원자화되고 교인 역시 고립된다는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현재 메가처치가 추구하는 성장지상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도 벗어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메가처치, 윤리적 접근이 아니라 교회론으로 봐야

 

『메가처치를 넘어서』가 교회론으로 메가처치 현상을 바라보겠다는 책인데요. 이게 구체적으로는 어떤 의미인가요.

 

메가처치 현상에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를 한 것은 국내에서는 제가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9년에 『메가처치 논박』이라는 책이 바로 그러한 시도였죠. 그때만 해도 메가처치 자체가 아니라 일부 잘못된 메가처치와 메가처치 목사가 문제라고 인식하는 분위기였어요. 대부분은 건강하지만 몇몇 메가처치의 이탈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건강한 메가처치와 그렇지 않은 메가처치를 구분하는 것은 메가처치 현상을 윤리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윤리적 관점에서는 비교적 건강한 목회를 하셨던 복음주의 4인방이 목회하는 메가처치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거죠.

 

하지만 저는 메가처치 현상 자체를 문제라고 봤습니다. 메가처치 내에서 일어나는 헌금 유용, 교회 내 성 폭력, 비민주적 의사 결정 같은 문제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밑바탕을 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메가처치 현상을 신학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왜 메가처치 현상이 문제인지를 교회론적으로 접근한 책이 바로 『메가처치를 넘어서』인데요. 이 책에서 저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을 진단하고,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교회는 어떤 모습인지, 어떤 교회의 모습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썼습니다. 메가처치 현상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가나안 성도 현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 그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겠습니까. 나갈 교회가 없다는 거죠. 메가처치 교회가 싫어서 다른 교회로 가면, 거기에는 함량 미달의 목회자가 있고, 때로는 헌금 강요가 더 심하기도 해요. 그렇다고 다시 메가처치로 갈 수는 없고요. 어차피 메가처치에 가도 모르는 사람들밖에 없고, 혼자서 예배를 드리다 오죠. 그럴 바에야 굳이 피곤하게 교회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는 거죠.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시고 책을 쓰셨나요.
 
『메가처치 논박』 후속작이다 보니 아무래도 전작의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겠나 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메가처치 논박』이 처음 나왔을 때, “무슨 목사가 그런 책을 쓰나?”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요, 그 분들도 이제는 왜 제가 그 책을 썼는지 동의하게 된 사람들이 꽤 많아요. 그 분들도 제 책을 읽으면서 함께 대안을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대형교회, 초대형교회라는 말 대신 메가처치라는 용어를 쓰셨는데요.

 

메가처치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생겨난 용어인데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출석 신자 2,000명 이상을 말합니다. 아직 학문적으로 정의가 이루어진 개념은 아니죠. 한국에서는 주로 대형교회, 혹은 초대형교회라고 불러왔습니다. 제가 대형교회, 초대형교회가 아니라 굳이 메가처치라는 말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1~3세기에는 교회가 20~30명 정도로 구성되었습니다. 건물보다는 가족 공동체의 이미지였죠. 4세기 콘스탄티누스가 성당을 처음 건축하면서부터 교회는 건물이라는 이미지가 생기죠. 그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교회의 크기는 대충 200~300명선을 넘기지 않았지요. 대도시의 대성당 같은 경우는 수천 명이 모이는 큰 교회이기도 했지만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어요.

 

그러다가 1950년 정도부터 2,000명이 훌쩍 넘는 초대형교회들이 등장합니다. 한 두 개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숱하게 많이 등장합니다. 대충 1970년대쯤에 이들 교회를 가리켜 메가처치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도 큰 교회(big church), 대형교회(large church)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런데 왜 메가처치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 냈을까요? 이것은 기존의 교회와는 매우 다른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생겨났음을 말합니다. 일단 크기면에서 200~300명이 아니라 기본 신도 수가 2,000명 훌쩍 넘습니다. 심지어 단일 교회가 80만 명에 이르기도 하니까요. 이런 교회는 옛날 교회 이미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거죠. 새로운 기의가 등장하니까 새로운 기표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고, 메가처치는 그러한 새로운 기표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메가처치는 단순히 크기만 커진 교회가 아닙니다. 신도 수가 많아지면서 교회의 구조, 건물 형태, 교회 조직, 설교 패턴, 목회자 리더십도 모두 바뀝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 리더십은 CEO 형으로 변합니다. 대규모의 신도를 관리하다 보면 그렇게 갈 수밖에 없어요. 예배당은 오페라홀이나 스포츠 경기장 형태로 바뀌고, 예배는 퍼포먼스 형태로 바뀌고, 방대한 자원봉사자 조직이 생겨나며, 모든 것을 콘트롤하기 위해서 첨단 테크놀로지도 동원됩니다. 이런 교회는 완전히 새로운 교회죠. 이런 새로운 교회 형태를 그냥 대형교회라 불러버리면 새로운 교회적 현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은폐되죠. 또한 대형교회라는 말은 작은 교회에 대한 상대적 개념인지라 곧바로 방어 논리가 생겨버립니다. “교회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는거지, 좀 크다고 뭐가 문제냐?” 이런 반박이죠. 저는 이런 문제점 때문에 메가처치라는 용어를 계속 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도의 첨단 테크놀로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교회와 첨단 테크놀로지, 잘 연상은 안 됩니다만.

 

옛날에는 2,000명이 한 장소에 모이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2,000명이 매주 모여서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다양한 교회 활동을 하려면 테크놀로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마이크가 없다고 생각해 봐요. 목사님이 고래고래 소리 질러도 뒤에서는 잘 안 들리겠죠. 마이크가 있다고 해도 맨 뒤나 기둥 뒤에서는 목사님 얼굴이 안 보이죠. 그래서 대형 스크린도 있어야 하고, 모니터도 있어야 하는 겁니다. 또 먼 거리를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 수단도 있어야 합니다. 대개 메가처치는 지역성을 뛰어넘은 초지역교회(trans local church)인데요, 먼 지역에서 본 교회로 오려면, 대중교통이나 자가용, 교회버스 등 뭐든 이동성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이런 단순한 기술 말고도 정교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여러 부로 나뉘어 예배를 드리려면 시간을 잘 지켜야 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 감동적인 예배를 드리려면 잘 짜여진 큐시트가 필수죠. 2부 예배 때 성령이 임해서 예배 시간이 2~3시간 길어지면 3부 예배는 어떻게 드리나요? 그래서 철저하게 분 단위로 예배를 기획해서,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데 무리가 없도록 기획을 해야 합니다. 찬양 팀도 굉장히 전문가들이죠. 찬양 인도자는 예배 전에 어떤 찬양을 불러야 하고, 코드 진행은 어때야 하고, 기도는 어디서 해야 하고, 어디에서 절정감을 주어야 하는지 사전에 치밀하게 계산합니다. 예배 현장은 보통 방송용 카메라로 중계하는데 카메라 한 대로만 하면 좀 지루하니까 몇 대를 돌려요. 1번, 2번, 3번 카메라, 파워포인트, 영상, 이런 것들 스위칭하고 스크린에 띄우죠. 예배 실황은 녹화해서 그걸 또 인터넷으로 띄우고요. 이런 모든 것을 일반 신자는 잘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저 불편하지 않게 예배를 향유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대단한 테크놀로지가 동원되는 겁니다.

 

메가처치와 첨단 테크놀로지가 어느 정도로 밀접하냐 하면 새들백교회의 예를 들 수도 있을 텐데요, 그 교회에서는 목표 대중을 추적하는 마케팅 기술을 전도 전략에 활용했습니다. 즉 그 교회 주변에서 가장 전도하기 쉬운 사람의 평균 모습을 뽑아내서 가상의 캐릭터로 만들어 그걸 ‘새들백 샘’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리고 교회는 그 가상의 캐릭터를 공략하는 전도법을 개발하죠. 이런 기술은 방송에서 주요 시청자나 청취자를 추적하는 기술인데, 그걸 교회에서 쓰는거죠.

 

전세계적인 메가처치 현상 뭐가 문제인가

 

새들백교회를 말씀하셨는데, 흔히 메가처치 하면 한국 교회에 유달리 많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메가처치는 미국에서 먼저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메가처치 현상이 굉장히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는데요, 미국의 메가처치 비율이 약 0.5%라면 한국은 1.7%나 됩니다. 3배도 넘는 비율이에요. 미국의 최대 교회가 약 5만명 가량인데, 한국의 최대 교회는 80만명이나 됩니다. 이처럼 한국의 메가처치 현상은 밀도나 강도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하지만 메가처치 현상이 한국만의 독특한 모습도 아니고, 미국만의 모습도 아니에요.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남미,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 유럽, 호주에서도 메가처치 현상이 보고되고 있어요. 메가처치 현상을 한국의 문제로만 보면 원인 진단이나, 해법이 한국적 상황 안에서 이루어지겠죠. 하지만 메가처치 현상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개신교 신학 틀 안에서, 특히 개신교의 교회론에서 문제 원인을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개신교 교회론에 어떤 문제가 있나요?
 
메가처치 현상이 전 세계적인 영역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신학적으로 보자면 대단히 개신교적 현상입니다. 최근에 한국 개신교회가 문제가 심각하니까 수혜를 가톨릭교회가 얻고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 가톨릭교회도 본당의 비대화 문제가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톨릭교회는 다른 교구의 본당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또 성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성장이 가져다주는 이득을 주임 신부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주임 신부는 언제 다른 성당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구요. 그러니 굳이 자기 본당을 성장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죠. 또 타 교구 신자를 자기 교구 본당으로 전도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회는 이런 게 없죠. 다른 교회 신자도 상관없이 전도(?)의 대상입니다. 바로 옆 교회와 성장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성장을 하면 그 유익이 거의 대부분 고스란히 담임목사에게 돌아갑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모든 교회들이 성장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겁니다.


교회론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개교회 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교회 중심주의는 지역교회를 하나의 독립된 교회로 보고, 지역 교회 결정권에 누구도 간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독립된 개교회들이 개교회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 교회의 모든 자원을 쓴다는 것인데요. 그러다 보니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교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에 대한 모든 교회의 투쟁”이 벌어지는 거죠.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과 다릅니다. 저는 책에서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교회론을 제시했습니다. 만일 교회들이 그러한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추구한다면 메가처치 현상에 어느 정도 브레이크 장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메가처치 현상의 배후에는 복음주의 영향도 있을까요?

 

네, 맞습니다. 메가처치들은 대부분 복음주의적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워낙 복잡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잘못 쓰면 비판을 받을 수 있어요. 복음주의의 의미가 하도 복잡해서, ‘과연 복음주의라는 정체가 있느냐?’ 이런 말이 나올 정도니까요. 저는 복음주의라는 표현을 쓸 때에 특정한 맥락 안에서 쓰려고 노력합니다. 저에게 복음주의는 전도와 교회성장을 최우선적 관심으로 두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러한 복음주의가 교회 성장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요.

 

성장한 메가처치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메가처치 논박』에서 저는 메가처치의 문제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주로 메가처치 현상을 다루었습니다. 제가 볼 때 메가처치도 문제지만 메가처치 현상이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메가처치는 1.7퍼센트 밖에 안 됩니다. ‘이러이러한 문제 때문에 메가처치가 문제다,’ 이렇게 해버리면 메가처치 아닌 교회는 문제 없다고 착각할 수 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메가처치 배후에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 진짜 문제인 겁니다. 메가처치는 메가처치 현상의 빙산의 일각인 겁니다. 메가처치 현상이 문제인데요, 메가처치 현상 속에 포함되지 않은 교회를 찾을 수가 없어요. 메가처치든 비메가처치든 거의 모든 교회가 메가처치 현상 안에 포섭되어 있습니다.
 
그럼 메가처치 현상이 뭐냐? 한 마디로, 내가 살기 위해서 내 교회가 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전도해서 교회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회적 현상인거예요.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신도를 모으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전도해야죠. 옆 교회 신도라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설득해서 우리 교회에 나오도록 합니다. 이 교회만 그러나요? 다른 교회도 똑같이 합니다. 그러다 보니 메가처치 현상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메가처치든 메가처치가 아니든 어느 교회든 이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정글이 되고 말죠. 정글이 되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남들 교회는 신경을 안 쓰게 됩니다. 오직 내 교회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죠. 강남 모 교회는 주변의 숱한 반대에도 엄청난 건물을 새로 지었어요. 내 교회만 성장하면 되니까요. 작은 교회라고 다를까요? 다 똑같습니다. 동일한 논리로 움직여요. 그 논리는 투쟁 논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다보니 교회가 점차 이기적이 되고 자기 중심적이 되는 거에요. 본 회퍼는 교회가 남을 위하지 않으면 그건 교회가 아니라고 말했어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냐?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런 분의 몸인 교회는 당연히 이웃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힌 교회로서는 이것이 불가능하죠. ‘내 교회가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남을 위해 활동하느냐?’ 이렇게 묻는 거죠.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단 내 교회부터 성장시키고 단 뒤,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하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성장을 위해서 교회는 끊임없이 더 이기적이 됩니다. 성장하려면 건물 지어야죠, 건물 지으려면 융자 받아야요, 은행에 빚졌으니 이자 갚아야죠, 그러려면 새로운 신자들이 더 만이 들어와야죠... 영영 교회는 남을 위해 존재할 수 없게 되죠. 교회가 원자화되면서, 교회들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교회가 되어가구요, 그러다보니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고 있어요. 이게 메가처치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런 메가처치 안에서 신자들도 자기 중심적이 되어 가게 되지요.

 

교회가 커지고, 신자가 많아져도 한 교회 안에서는 신자들끼리 서로를 위하지 않나요?

 

교회의 원자화와 신자의 원자화는 분리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교구제가 무너지고 모든 신자는 자신이 원하는 교단과 교회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는 어떤 기준으로 교회를 선택할까요?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좋으냐, 나쁘냐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확실한 건 선택은 자신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선택하도록 이끈다는 겁니다. 소위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건데요, 합리적 선택이란 결국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게 하죠. 다수의 합리적 선택을 받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메가처치죠. 근사한 시설, 감동적인 설교와 프로그램이 좋은 교회. 그러다 보면, 합리적 선택을 한 소비자의 모임이 교회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는 사이 교인은 원자적 개인, 원자적 소비자가 되는거죠. 그러면서 교회의 본연의 모습인 공동체성은 뒤로 밀립니다. 교회는 종교적 욕구를 소비할 수 있는 월마트 같은 곳으로 인식되고 마는 거에요.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이기적이라고 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교회가 이기적이 되어가고, 신자도 이기적이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교회와 신자는 본질을 잃고 마는 겁니다.

 

그럼 선택의 자유를 구속해야 하느냐?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죠. 자유는 강제로 억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이기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선택은 고쳐져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경에서는 자유는 자유로만 억제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즉 자유는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 사용되어야 하거든요. 다시 말해 형제자매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도록 스스로 결정하는 게 성경적 의미의 자유입니다. 성경은 ‘서로 복종하라’고 하는데 바로 이런 뜻이죠. 하지만 메가처치 안의 신자는 자유를 이런 뜻으로 쓰지 않아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 쓰죠. 그러니까 메가처치 안에서는 자기중심적 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남과 억지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도 힘들어요. 생일만 외워도 1년이 훌쩍 갈 걸요? 그러다 보니 관계도 선택적으로 맺습니다. 저 사람 괜찮네. 내 아들과 학벌도 비슷하고 학번도 비슷하네. 우리 가게 단골하면 좋을 사람이네... 이러면 명함 주고 받습니다. 취미, 특정한 사회 활동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서 폐쇄적 사교, 이기적 사교로 이어지죠.
 
개신교를 향해 쏟아지는 비판 중 하나가 정치적, 계층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건데요. 메가처치 현상의 연장선이라 보나요?
 
그럼요. 책에서는 메가처치를 총 4세대로 구분했는데, 1세대는 월남자, 2세대는 이농민 같은 이주민들에 의해 커졌습니다. 그런데 3세대 강남형 메가처치는 중산층이 주로 모이면서 계층적 특징이 강하게 생겨납니다. 사실 이것도 교회 선택의 자유 때문에 생겨난 현상인데요, 모든 선택을 개인에게 맡기면 어떻게 될까요? 이질적인 사람과 만날까요? 유유상종이라고 아무래도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겠죠. 그러니까 교회가 계층적으로 균질화되는 겁니다. 그 안에 끼지 못한 계층은 열패감을 느끼고 헤매고 나가떨어지죠. 그러면서 균질화는 더욱 강화되죠. 옛날 미국 남부 지역의 어떤 교회는 ‘흑인 출입 금지’라는 표시를 달아놓았다고 하죠.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교회 분위기가 푯말 붙인 거랑 다를 바가 없어요. 계층 균질화는 설교자로 하여금 그들 계층을 위해 발언하고 설교하게끔 동기부여를 시킵니다. 심지어 그런 계층의 이익을 위해서 사회적 활동을 하는 교회들도 생겨나게 되죠.

 

제가 책에서 개교회 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교회성을 강조했는데요. 공교회성이란 가톨릭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고요, 교회가 계층, 성별, 민족, 문화, 이데올로기 등 모든 이 땅의 장벽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이 한 데 어울릴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보편적 교회여야 한다는 의미죠. 최고 부자와 가장 가난한 사람이 한 곳에서 예배할 수 있는 교회, 이게 공교회성인데 선택을 개인에, 개교회에 맡겨버린 지금에서는 불가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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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메가처치 신학이 필요한 때

 

실제로 메가처치에서 사역하기도 했는데요. 그 때 경험으로 비판 의식이 가지게 되었나요?

 

꼭 그렇지는 않고요. 어렸을 때부터 의문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땐가 누구한데 들은 얘긴데요, 어떤 교회에는 주일 예배 때 은행에서 헌금을 걷으러 차를 보낸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환전상을 내쫓았는데 교회가 헌금 걷어 예금하려고 은행 차를 부르는 게 말이 되나? 어린 나이에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졌죠. 대학부 생활을 하면서도 과연 대형교회가 맞는지, 교회 형들이나 누나들과 토론을 벌였는데요. 그때 선배들은 큰 교회가 훌륭한 일도 많이 하지 않느냐며 반박했어요. 그때에는 그게 맞는가보다 하고 수긍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의문이 드는 거에요. 그럼 다시 또 질문하고, 선배들이 또 다른 반박을 하고,... 뭐 이런 질의-응답 과정이 반복되었죠. 그러면서 문제의식을 계속 키워나갔습니다.

 

그래도 좀처럼 해소될 기미가 안 보이는데, 대안은 있나요.

 

책에서는 개교회는 자기 자신이 공교회, 곧 그리스도의 보편교회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웃 교회와 상생을 길을 모색하자. 또 개교회 내의 신자들은 참된 공동체성을 위해 한 몸을 이루도록 노력하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반론이 들어오겠죠. 좋은 말이긴 한데, 현실적으로 가능하냐? 저도 사실 의문입니다. 제 예상에는 교회가 그렇게 하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한다고 해도 신자들도 별로 원치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금 한국 교회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공멸할 수 있다고 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교회 분위기가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어요. 어제도 한 후배한테 전화가 왔더라구요. 도대체 요즘엔 갈 교회가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 많은 교회들이 다 똑같은 설교만 하는지,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다 이상합니다. 제가 책에서 이종격투기 예를 들었습니다. 1960년대 미국 도박사들이 태권도가 세냐, 무예타이가 세냐, 유도가 세냐, 권투가 세냐... 이게 궁금해서 여러 종목의 선수를 모아서 링 위에 올렸어요. 어느 무술이 가장 센지를 보고 싶어서 경기를 했는데요, 경기를 하다 보니까 선수이 모두 비슷해지는 거죠. 선수들 입장에서는 자기 무술을 충실히 지키는 것보다 경기에서 이기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러니까 가장 효과적인 타격 기술, 그라운드 기술을 찾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전부 똑같이 경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아예 ‘이종격투기’라는 새로운 무술이 생겨버립니다.

 

이게 지금 메가처치 현상과 비슷하거든요. 지금 어느 교회 신자가 장로교, 감리교 같이 교단이나 신학보고 교회를 정하나요. 담임 목사가 누구냐, 프로그램은 어떠냐, 시설은 괜찮으냐, 한 마디로 신앙 생활하기 좋으냐? 이거 한 가지 기준 놓고 교회를 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그런 신자들을 끌어 올 수 있는 방향으로 최적화되는 거구요. 결국 교회는 전부 성장을 지향하고, 소비자를 끄는 데 최적화된 설교, 프로그램, 시설 등을 갖춥니다. 그러니까 결국 다 똑같아집니다. 교단, 신학 차이 없고 메가처치라는 하나의 교회가 생겨나고 만 겁니다. 그러니 교회들이 다 똑같이 설교하고, 똑같이 활동하는거죠. 메가처치 현상 속에서 교회는 성장지향적 교회, 이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심각한 문제죠. 성경 가르침에서도 벗어났고, 공멸이 눈앞에 온 거죠. 저는 과연 한국교회가 한 세대를 버틸 수 있지 걱정입니다.

 

가나안 성도가 진짜 100만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갈 교회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요. 교회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야 해요. 우선 병을 자각해야 병원을 가든지 할 텐데, 지금 본인들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고쳐질리 만무하죠. 자꾸만 메가처치 현상이 병이 아니라고 말하니까 저는 병이 맞다고 말을 하는 거예요. 저는 이 책에서도 얘기했지만 교회 지도자들이 연합해서 ‘반-메가처치 신학 선언’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쪽 방향은 옳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어느 방향이 맞는대?하고 질문을 하지 않겠어요? 그때 교회가 대안적 방향을 함께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고도성장을 달릴 때는 메가처치 현상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저성장이고 절대 인구도 안 늘 테고, 도시로 집중 현상도 둔화된 상황입니다. 신학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조건도 메가처치에는 안 좋게 작용할 듯합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한국교회는 성장 고점을 1995년에 찍고 이후는 완만하게 하락 추세입니다. 대세 하락 추세가 바뀔 거 같지는 않습니다. 이대로면 꾸준히 추락하겠죠. 그러면서 교회의 동질화와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겠죠. 그러나 신자들은 여전히 메가처치를 찾을 것이고, 교회들은 성장을 하려는 관성을 바꿀 것 같지 않습니다. 1세대 메가처치 지도자들이 떠나겠지만,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재능 있는 신규 목회자가 등장해서 새로운 형태의 메가처치를 만들어내겠죠. 분명 상황은 메가처치 현상에 타격을 가하는 쪽으로 바뀌겠지만 메가처치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도리어 미국 같이 완만한 상승세를 유지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되겠습니까? 시장 자체가 줄어드는데... 제가 볼 때 이 추세는 한 세대 이상 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길게 잡아야 30년 이내에 한계가 올 텐데, 그 한계가 오기 전에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하기는 할 겁니다. 메가처치가 미자립 교회와 협력을 강화하기도 할 것이구요, 분립 개척도 더 많이 시도하겠죠. 그러는 사이 많은 교회는 문을 닫을 거예요. 근본적인 갱신이 일어나야 할 텐데... 기존 패러다임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면 결국 한국 교회는 더 추락하고, 더 망신을 당하고, 더 수치를 당하게 될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합니다.

 

끝으로 두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선생님에게 신앙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성경에 전도서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은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흙에서 왔다 흙으로 가는 존재잖아요. 진짜 인간의 본질이 흙이라면 인간의 삶이라는게 다 뭘까요? 과연 삶에 의미와 가치는 있는 걸까요? 인간은 존엄한 존재일까요? 무슨 근거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는 제게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제 존재가 신의 영광으로 둘러 싸인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제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흙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심어줬어요. 본회퍼가 죽음 앞에서 ‘이것은 끝이 아니다’라고 했다죠. 기독교는 죽음을 넘어선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제게 주었습니다. 영생이라는 게 천당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는 오해가 있는데요, 영생의 진짜 의미는, 내 삶이 흙으로 흩어지지 않으리라는 소망, 영원한 가치로 보존되리라는 기대입니다. 저는 기독교 이외의 이론이나 설명 체계에서도 저의 이러한 소망을 대체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이죠.

 

끝으로 선생님께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지 말씀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오셨거든요.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정치 지도자, 대기업 사장도 무릎을 꿇어야 하는 최고 권력자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가장 낮은 자의 발을 씻으셨고, 자신의 생명을 비루한 인생들을 위해서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참된 왕의 통치 행위라고 말씀하셨어요. 십자가는 왕의 통치 행위의 절정이라는 것이죠. 저는 그 어떠한 종교 지도자나 정치지도자 중에서도 그러한 왕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왕의 모습으로 새로운 통치를 실현하셨고, 그러한 통치가 구현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이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군림과 지배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으로 왕노릇 하는 나라구요, 그래서 그 나라는 남을 섬기는 모든 사람이 다 왕이 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 그 분과 함께 섬김으로 왕 노릇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새 나라에서 새로운 방식의 통치를 행하고, 또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신 분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타개할 수 있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 뿐이며, 을(乙)들에게 갑(甲)질하는 한국 사회가 고쳐질 수 있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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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처치를 넘어서 신광은 저 | 포이에마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메가처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욕망하고 지향하며 따르고자 하는 ‘메가처치 현상’에 있다. 메가처치 현상이 왜 유독 한국 교회에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는지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 대안을 모색한다. 교회론적 개인주의가 낳은 부정적 현상들을 ‘공교회성’과 ‘공동체성’의 회복으로 극복할 것을 요청하는, 한국 교회를 향한 반(反) 메가처치 선언문! 균형 있는 신학적 반성과 치열한 성경적 실천으로 메가처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교회에 처방전을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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