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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별 장르소설 읽기 프로젝트 – 마니아 1

복선과 미스디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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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마니아는 복선과 작가가 연출한 미스디렉션 사이를 효율적으로 헤쳐 가는 요령을 안다. 독서 경험이 풍부해서라기보다 미스터리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단계별 읽기 입문편에서 미스터리의 3요소로 흥미로운 수수께끼, 논리적 전개, 그리고 뜻밖의 결말을 꼽으며 “하나라도 빠지면 미스터리로 불릴 수 없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적 전개다. 논리적이지 못하면 이미 미스터리가 아니다. 독자가 사건의 동기와 사건의 과정, 그리고 해결에 이르기까지 모두 합리적으로 ‘납득’-국립국어원은 ‘납득’을 ‘이해’로 순화하도록 안내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느낌 때문에 ‘납득’을 사용하기로 한다-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독자들이 사건의 진상을 다 확인한 뒤에나 납득하고 무릎을 탁 치기 바란다. 그래서 열심히 복선을 깔면서도 미스디렉션(원래 마술에서 사용하던 용어)이라는 연출을 통해 착각과 오해를 유도한다. 독자의 합리적 납득을 위해 필요한 것이 복선이고, 이 복선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연출하는 장치가 ‘미스디렉션’이다.


복선은 크게 암시적 복선과 데이터적 복선으로 나눈다.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에서 계속 발견되는 토막시체는 데이터적 복선이다. 데이터적 복선은 퍼즐 미스터리에서 많이 제시된다. 암시적 복선은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교환살인에는 어울리지 않는 밤』(이하 『교환살인』)에 나오는 프로야구 구단에 대한 언급을 들 수 있다. 엘러리 퀸의 『X의 비극』에서 장갑, 어떤 인물의 특성 등은 암시적 복선일 테지만 시체에 남은 흔적은 데이터적 복선이다. 얼마 전에 출간된 나가오카 히로키의 『교장』 같은 연작 단편은 각 단편의 도입부마다 암시적 복선을 노골적으로 깔기도 한다.


문제는 『교환살인』 같은 경우다. ‘프로야구 구단’ 문제가 슬쩍 끼어드는데 히가시가와 도쿠야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약간 위화감이 들지는 몰라도 중요한 복선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반면 같은 작가의 작품을 여러 권 읽은 독자는 그가 어느 작품에서나 즐겨 프로야구 이야기를 끼워 넣으며, 그것이 암시적 복선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미스터리 마니아는 복선과 작가가 연출한 미스디렉션 사이를 효율적으로 헤쳐 가는 요령을 안다. 독서 경험이 풍부해서라기보다 미스터리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마니아는 끊임없이 장르의 본질에 더 접근한 작품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마니아라도 외톨이 독서로는 복선과 미스디렉션을 완벽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살육에 이르는 병』을 처음 읽은 초보 독자는 작가가 펼쳐놓은 복선과 힌트, 그리고 연출된 미스디렉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어지간한 독자는 서너 번 읽을 때까지 계속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 복선과 힌트를 다른 독자와 함께 확인하고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어느 독자가 단계별 읽기 심화 단계로 들어가는 조짐이 ‘논리성’에 대한 인식이라면 마니아가 되어가는 징조는 합리적 납득을 통한 ‘공감’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단계별 읽기의 마니아 단계는 이 ‘공감의 확대’에 무게를 두고 이야기한다.

 

 

미스터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한 번은 접했을 ‘로널드 A. 녹스의 십계’, ‘밴 다인의 20칙’, ‘챈들러의 9가지 명제’ 등은 ‘합리적 공감’을 연출하기 위한 규칙으로 제시되었다.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으니 전체 항목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이 규칙들은 만들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유효한 항목이 많다.


녹스는 ‘십계’를 제시한 글에서 “탐정소설이란 초반에 호기심을 끄는 수수께끼가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하며, 끝에 가서는 그 호기심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말문을 연다. 독자의 호기심이 충족되려면 논리에 입각한 합리적 공감이 필수다.


인터넷상에 보이는 여러 메모들은 녹스가 십계를 ‘반드시 지켜야 할 계율’로 내세운 것처럼 여긴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넘어가면 단계별 읽기로 따졌을 때 입문 단계에 해당하는 태도다. 어떤 독자는 녹스의 십계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면 ‘어떤 나라 사람을 등장시키면 안 된다’는 계율에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 배경을 더듬고 진의를 파악한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 같은 소설에서도 녹스의 십계를 두고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심화 단계에 있거나 마니아 단계로 접어드는 독자가 보이는 태도다.


마니아는 이 계율 전체에 대해 호기심을 품고 십계가 실린 원문 전체를 찾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시도한다. 녹스가 십계를 이야기할 때 쓴 글은 짧지 않다. 인터넷에서 찾아 읽을 수 있는 열 가지 항목 각각에 대한 설명은 더 풍부하다. 앞뒤 문장을 읽지 않고서는 녹스의 십계가 지닌 뉘앙스를 이해하기 힘들다. 풍자를 곁들인 작품을 즐겨 쓴 작가라는 점을 감안하고 전체 문장을 읽어야 뉘앙스가 파악된다.


‘공감’을 확인하는 도구는 대화다. 주변에 대화를 나눌 미스터리 독자가 없다면 인터넷 커뮤니티를 이용한다. 자기에게 맞는 커뮤니티를 찾아 다른 회원이 쓴 글을 읽으며 납득과 공감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커뮤니티마다 내세우는 주제는 다르다. 분위기와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도 꽤 다르다. 그래서 가입하기 전에 회원들의 글을 읽으며 환경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도 어느 커뮤니티나 나름의 관점과 기준을 통해 미스터리, 스릴러 작품에서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복선을 찾고 공유하며 공감의 범위를 넓히려는 노력들이 모여 있다.

 

마니아 단계에서 즐기기 좋은 작품은 초보 단계를 위한 소설보다 훨씬 많다. 작품의 난이도나 길이 같은 물리적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합리적 납득의 공감이 중요한 작품의 성격이 더 중요한 기준이다. 그리고 이전에 작품을 대하는 독자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


마니아를 위한 작품이라면 흔히 야마구치 마사야의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이나 일본 미스터리 3대 기서(『흑사관 살인사건』, 『도구라 마구라』, 『허무에의 제물』) 등을 먼저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평은 미스터리 커뮤니티에 매우 많이 올라와 있다. 여기서는 논의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렌조 미키히코의 ‘화장(花葬) 시리즈’를 추천하고 싶다. 여덟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는 『회귀천 정사』『저녁싸리 정사』에 실려 있다.


화장 시리즈의 주제는 일본 문고판 표지를 보면 고스란히 드러난다. ‘꽃’이다. 작가 스스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꽃입니다.”라고 했다. 우리말 판 표지 뒤에도 적혀 있다. 이 시리즈 여덟 편은 일본 미스터리 역사에 남을 명문장으로 꼽힌다. 애초에 작가가 작심하고 ‘문장’을 쓴 미스터리다. 끔찍한 사건이 이어져도 소설은 아름답다. 꽃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라는 표면적인 이유 뒤에는 여러 ‘빛깔’이 있다.


『회귀천 정사』 맨 앞에 실린 「등나무 향기」를 펼치면 홍등가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데, 이 부분부터 벌써 머릿속에 색깔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마 화장 시리즈만큼 색에 몰두한 미스터리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아래의 글은 우리말 판 회귀천 정사』를 꺼내 아무렇게나 펼친 221쪽의 첫 번째 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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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싸리 정사』 일본 원서 표지                                             회귀천 정사』 일본 원서 표지


“소녀는 붉은색 정자(井字) 무늬 기모노를 입고,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썼습니다. 푸른 풀밭의 둑길을 미끄러져 내려와 하얀 돌이 깔려 있는…….”

 

각 단편의 제목이 되는 주인공 꽃의 색깔 말고도 도처에서 꽃과 다른 사물의 색깔들, 빛깔들이 펼쳐진다. 읽은 뒤에 한동안 그 ‘빛깔’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읽어야 한다. 보이지 않던 색깔들이, 그 색의 조화가 빚어내는 풍경들이 틀림없이 떠오를 것이다. 이런 빛깔에 싸여 이 시리즈의 죽음들을 마주해야만 우리말 판에 실린 해설에 있듯이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명화’가 완성된다.


평론가 센카이 아키유키가 “명화가 완성된다.”고 한 까닭은 이 색깔, 빛깔의 배합에서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는 논리성이 발견되기 때문일 것이다. 회귀천 정사』의 맨 마지막 부분에 강물 위로 흘러가는 꽃이 왜 그 색이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면 화장 시리즈를 제대로 즐겼다고 보기가 곤란하다. 납득이 되어야 공감할 수 있고, 작품과 공감해야 그런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유를 통해 미스터리를 보는 시야를 더 넓고 깊게 만들어갈 수 있다.

 

어떤 작품을 예로 들어도 마찬가지다. 요리 솜씨가 있는 분들은 기타모리 고의 『꽃 아래 봄에 죽기를』, 『벚꽃 흩날리는 밤』에 나오는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으며 납득과 공감의 경로를 걸어도 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의 배고팠던 데뷔 시절을 알게 되면 더욱 애틋한 감정이 느껴질 것이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같은 작품에 나오는 음식들에서도 미스터리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정한 시기에 데뷔한 작가들의 첫 작품만 골라 집중적으로 분석해보는 일도 재미있다. 창작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그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분석을 통해 작품을 보는 논리를 다듬다 보면 작품에 대한 평가 또한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고 미스터리의 시대적 흐름도 파악된다. 모치즈키 료코의 데뷔작인 『신의 손』을 예로 들자.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두 사건에 대한 서술이 어떻게 합쳐지며 그 과정에 구성상의 무리는 없는지, 시점의 이동이 적합한지, 등장인물의 비중이 균형을 이루는지 등등을 자연스럽게 검토하다 보면 작가가 생각하는 미스터리의 특성을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런 다음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데뷔작을 함께 읽어보면 일본 미스터리의 현주소가 눈에 들어올 수 있다. 그런 뒤에 작가의 다음 작품, 모치즈키 료코를 예로 든다면대회화전』을 읽을 때 이 작가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지 나름대로 전망이 선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다른 이들과 공유한다.


마니아란 무엇을 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로 구별되는 독자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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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일영

전업 번역자. 중앙일보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번역을 업으로 삼고 있다. ‘일본미스터리즐기기’ 카페 운영자이며 아직 창작은 하지 않지만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 기리노 나쓰오의 《다크》, 《IN》,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과 존 딕슨 카의 《셜록 홈즈의 미공개 사건》을 비롯해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오리하라 이치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또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나니와 몬스터》을 비롯한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와다 료의 《노보우의 성》, 《바람의 왼팔》을 비롯한 시대·역사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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