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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회] 열여섯 달의 기록, 홋카이도의 수다

에필로그 - 내 인생의 아주 달콤했던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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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창가 자리로 부탁했다. 지난 열여섯 달이 알알이 이슬로 맺히고 있었다. 계절 닮은 길을 거닐던 발에서 느껴지던 진동을 기억했다. 고요함이 내던 소리를 떠올려 귀를 간질여 봤다. 언제든 여기에 있을 나의 섬, 나의 도시를 떠나오고 있었다. 크고도 어여뻤다. 오래도록 이 모습 간직하고 있어 줘, 나직이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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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의 숨

 

홋카이도의 수다는 여기서 끝이 난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생겼지 뭔가. 떠나올 수 있어 설레었기에, 다시 떠남을 택했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아쉽다. 북쪽의 작은 섬에서 태어나는 들꽃 빛깔은 무엇인지, 여기서 만난 사람들 사연이 어찌나 시시콜콜한지, 일본의 매뉴얼 정신에 답답해 미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쉰아홉 번째 즈음의 눈 내리는 소리는 어떠했는지…….

 

여행 같은 일상, 일상 같던 여행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뒤바뀌는 이 섬의 날씨처럼, 홋카이도의 삶은 예측 불가능한 일로 가득했다. 내일도 이곳에서 살 것처럼, 마지막 날을 보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아쉬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사람들과 웃으며 안녕을 하고, 사진을 찍고, 팔 근육이 떨리도록 짐을 쌌다. 그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래 못할 것들을 골랐다. 마지막 월요일의 술잔, 화요일의 버스 정류장, 수요일의 눈 밟기, 목요일의 나무 냄새, 전깃줄이 바람에 흔들릴 때 나던 금요일의 울음 같은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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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마지막 밤엔 희한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그간의 시공간 속에서 들이마신 기운이 몸 곳곳을 맴돌고, 말끔히 소화되었구나. 그렇게 내신 숨이 밤하늘에 하얗게 퍼지는 거구나. 지금 이곳처럼, 세상 모든 마을도 다 같이 숨 쉬고 있겠구나. 산, 들, 바람, 물, 생명 모두 그렇게 생동하는구나…… 밤이 왔고, 창문을 열어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에서 들고 난 숨이 홋카이도의 찬 공기에 섞여 들었다. 들숨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달을 찾아냈다. 반은 밝고 나머지는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가려진 반쪽이 훤하게 밝혀질 때쯤 나는 서울에 있었다. 무언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한 알싸한 기분이었다. 딸려온 박스와 짐 가방을 보니 문득 두려움이 엄습했다.

 

사회적 바보의 즐거운 불안함

 

낯선 곳에 한번 살아보는 건 생각만큼 어렵지도, 그리 간단하지도 않았다. 모든 게 새롭고 좋아 보이던 감성은 두어 달 정도로 끝이 났다. 결국엔 먹고 사는 이야기였다. 어떤 날은 은근한 차별을 겪기도 했고, 이기지도 못할 언쟁을 해야 하기도 했다. 곳곳에 있기 마련인 나쁜 사람들도 만났다. 몇 시간을 한자와 씨름해야 살 집을 구할 수 있었고, 추위에 벌벌 떨며 장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내려놓았다. 타국의 맨땅에 헤딩했던 선택의 결론은? 반반이었다. 후회한 적도 있다. 다만 결과가 아닌 소중한 과정을 얻은 여행이었다. 행복의 순간은 감사히 여겼고, 슬픔의 감정은 차분히 지나가길 기다리면 됐다. 불행이 찾아왔을 땐 스스로를 가엽게 여겨야 했는데, 그 과정은 무척이나 길고 지독히 어려웠다. 사람 사는 일 모두 이런가 싶다. 과정도, 결과도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지난 열여섯 달이 우리 집 울타리의 한 부분이 됐다. 언젠가는 기름진 양분이, 뜨거운 심지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모든 생의 극적인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걸까. 열여섯 달이 지난밤 꿈 같다. 깨어나니 어쩐지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다. 몇 년 전까지 나는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이었다. 야근과 주말근무로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온종일 의자와 씨름하곤 했다. 효율성에 대해 가장 비효율적으로 논하느라 지쳐 있었다. 뻔한 미래에 불안해하면서도 제도의 안정성에 몸을 기댔다. 나와 남편이 많은 걸 내려놓고 떠났을 때 어떤 사람들이 물었다. 허송세월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고.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지 모르냐며 나무랐다. 그때 망설였던 대답을 지금 할 수 있다면, ‘전혀’라 답하고 싶다.

 

버리길 망설였던 짐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런 것 없이도 세상 사람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잘만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원 없이 놀았으니 괜찮다. 많은 이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삶의 단맛을 나는 이제 모른다. 그런 사회적 바보가 되었다.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해 익숙해지는 ‘즐거운 불안함’이 뜻밖의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통장에 찍힌 숫자가 마이너스를 향해 가고, 빌딩 속에 내 자리 하나 없지만, 후회 없다면 된 거 아닐까? ‘정녕 날짜와 요일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 (윤대녕,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찬다. (자, 이제 돈을 벌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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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들어준 이야기

 

뒤늦은 고백을 하자면, 이곳에 오기 전 나는 삶에 자신이 없었다. 쿨하게 사표를 던지고 나니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자유로운 영혼 행세를 했지만, 스스로가 못나게 느껴졌다. 별볼일 없이 늙어 죽는 건 시간 문제인 것 같았다. 자괴감이 응어리져 사람들을 피했고, 작은 일에도 움츠러들었다. 소중한 인연들을 흘려 보냈고, 시간은 버려졌다.

 

그때 찾은 북쪽의 섬은 내가 주절대던 이야기를 한없이 들어줬다. 그 지질한 사연은 하얀 눈 무덤 속에 잘 파묻혀 있을 거다. ‘홋카이도의 수다’는 기행문을 빙자한, 뒤늦은 방황의 고백이었다. 또한 이방인이 머금고 있던 외로움의 배출구였다. 한국을 떠나올 때 차마 버리지 못해 가지고 왔던 짐 꾸러미는 삼분의 일 수준으로 줄었다. 나도 그만큼 가벼워진 것 같다. 속 썩이던 모멸, 자괴, 허영의 부끄러운 감정들을 오래도록 끓여 올렸다. 홋카이도의 바다로, 하늘로, 숲으로 날려 보냈다.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창가 자리로 부탁했다. 홋카이도에서 보낸 지난 열여섯 달이 알알이 이슬로 맺히고 있었다. 계절 닮은 길을 거닐던 발에서 느끼던 진동을 기억했다. 새하얀 겨울, 고요함이 내던 소리를 떠올려 귀를 간질였다. 언제든 여기에 있을 나의 섬, 나의 도시를 떠나오고 있었다. 크고도 어여뻤다. 오래도록 이 모습 간직하고 있어 줘, 나직이 인사했다.

 

내 인생의 아주 달콤했던 한 조각이 어느 북국의 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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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서툴게 다룬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 아끼지 않고 인내와 응원을 주신 편집자님 외 채널예스에게도 고마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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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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