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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듣는 ECM 앨범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류진현 『ECM TRAV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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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한국을 조용히 울렸던 전시가 하나 있다. ECM의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전시회. 음악과 이미지가 감성을 자극하는 ECM의 감성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됐다. 3주간 연장 전시를 하기도 했던 대단한 호응 속에 이제 ECM은 아름다운 음악을 대표하는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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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재럿, 팻 메시니부터 비제이 아이어까지. ECM은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를 주축으로 다양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클래식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깊이 있는 연주와 사운드, 다양한 변주가 유럽을 지나 이곳까지 날아온 것은 많은 국내 음악 애호가들에게 진정 축복이었다. ECM만의 풍성하고 완벽에 가까운 사운드는 ‘ECM’이라는 이름을 ‘믿고 듣는’ 레이블로 만들었다. 2013년에는 ECM으로서도 드물게 전시와 페스티벌을 한국에 개최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ECM을 알렸고 정명훈과 신예원 등 국내 뮤지션들의 음반이 ECM에서 발매되며 더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ECM 앨범 33장을 소개한 『ECM TRAVELS』의 저자 류진현은 『오리건(Oregon)』을 처음 듣고 ECM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일찍부터 음악을 좋아했지만 ECM이 들려주는 소리에 반해 지금은 ECM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아름다운 선율은 물론이고 예상치 못한 악기와의 만남까지 ECM의 도전과 완벽에 가까운 소리는 저자를 늘 매료시켰다. 한 국내 뮤지션이 커버만 보고 음반을 구매한 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감각적인 음반 커버 또한 ECM 감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언젠가 ECM의 모든 카탈로그를 수집하는 게 목표라고 말하는 저자 류진현, 그가 꼽은 ‘ECM의 명반 33’이 기대되는 이유다.

 

ECM 음악이 주는 특별한 느낌


우리 문화적 토양이 참 협소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새로운, 좋은 음악에 대한 욕구는 있지만 이런 계기가 아니면 접하기 힘든 부분이 많아요. 먼저 ECM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ECM은 쉽게 얘기하면 독일에서 탄생한 재즈와 클래식 음악 레이블입니다. 세계적인 뮤지션들, 예를 들어 키스 재럿이나 팻 메시니 같은 분들이 앨범을 내면서 레이블이 서서히 성장을 해왔고요. 현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아 있으면서 가장 유명한 대형 레이블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지만 아직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최근 국내 전시 등으로 더 많이 알려진 것 같던데요?


네이버에 음원 소개가 되고 유희열 씨 같은 분들이 코멘트를 하면서 조금 더 한국에 소개가 됐고요. 저는 ECM 음악을 80년대부터 알았는데 사실 그 전부터 굉장히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던 레이블입니다. 안타깝지만 국내 라디오에서 팝이나 재즈 프로그램이 거의 사라지고 다른 데서 접할 곳이 없어요. 해외에서는 아직도 생명력 있게 활동하는 레이블인데 한국에서는 왠지 모르게 애호가의 전유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음원을 배포하면서 한 번 소개가 됐고요. 독일을 제외하고는 얼마 없는 일인데, 2013년 한국에서 전시, 페스티벌을 하게 되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시고 있습니다.

 

전시가 흔한 일은 아닌가 보군요?


작은 규모로 동호회 사이에서 펼쳐진 적은 있었지만 ECM에서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아 전시를 한 건 거의 한국이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인 것 같아요. 당시 정명훈 선생님이 ECM과 계약을 하면서 다른 ECM 아티스트들도 소개할 수 있는 작은 페스티벌을 해보자고 처음에 얘기를 했었습니다. 부속 행사로 ECM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전시회를 해보자고 생각 했던 것이고요. 그런데 한국에서 전시를 맡게 된 GLINT 분들께서 오히려 더 생각을 많이 하셨죠. 아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전시를 시작하게 돼서 2013년에 성공적으로 행사가 진행된 것 같습니다.

 

가장 선물하기 좋은 앨범으로 키스 재럿의 《The Melody A Night, Without You》를 꼽으셨어요. 이 앨범의 어떤 면이 대중들에게 편안하게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ECM 음악은 정적인 것들이 많고 멜로디라기보다는 면에 가까운 그런 느낌인데요. 키스 재럿 같은 경우 트리오와 즉흥연주를 하는 솔로 콘서트가 있습니다. 솔로 콘서트 같은 경우 어떤 것은 20~30분짜리 한 곡으로 앨범이 이어져있고 그러다보니까 처음 들으시는 분들이 따라가기는 힘들어요. 반면 이 앨범의 멜로디는 다르죠. 키스 재럿이 등이 상태가 안 좋아요. 공연에 항상 마사지사가 동행했습니다. 공연 시작 전, 쉬는 시간, 끝난 후에 계속 마사지를 받고 그러면서 아픈 몸으로 공연을 하는 거예요. 이 앨범을 내기 전 3년 간은 등이 아파 공연을 못했습니다. 《The Melody A Night, Without You》는 이 사람이 휴식하면서 자기 집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무리하지 않고 만든 앨범이에요. 20~30분 연주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이런 게 없지 않을 수 없잖아요. 아무리 천재고 그냥 음악이 나오는 사람이라도 말이죠. 그런 강박 없이 본인이 좋아한 스탠다드 곡 같은 것들을 편안하게 아름답게 연주한 거라 다른 음반들에 비해서 듣기 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키스 재럿 하면 굉장히 창조적이고 즉흥적인 연주를 떠올리고 그런 걸 더 좋아하지만요, 키스 재럿은 피아노 음을 굉장히 예쁘게 내는 사람이에요. 똑같은 멜로디를 쳐도 이 사람 손끝에서 나오는 게 음의 울림이나 그런 것들이 굉장히 차이가 나요. 이 앨범도 사실 그냥 들으면 뉴에이지 피아니스트가 쳐도 비슷하겠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걸 조용히 듣고 있으면 음을 치면서 울려 나가는 느낌이 굉장히 특별한 느낌을 주죠. 

 

키스 재럿의 《The Koln Concert》는 개인적으로 두통약으로 쓸 정도라고 하셔서 특히 관심이 갑니다. 저자에게 단연 특별한 앨범인 것 같아요.


쾰른은 굉장히 특별한 앨범인데요. 일단 피아노 솔로 앨범으로 제일 많이 팔린 앨범이기도 하고요. 물론 그 전에도 피아노 솔로가 있었지만 그렇게 피아노 솔로로 한 공연을 녹음해서 앨범을 내려는 시도는 없었어요. 공연 당시 컨디션도 안 좋았고, 피아노 상태도 안 좋았고, 온갖 악조건을 뚫고 나온 판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굉장히 명곡이 됐습니다. 음악 안에 그런 기(氣) 같은 게 담긴 것 같아요. 안 좋은 상황에서 뭔가 더 쌓아 올려가며 더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힘 같은 게 담겨 있어서 말이죠. 꼭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걸 쭉 듣고 있으면 머리가 아픈 걸 잊어버려요. 음악에 너무 빠져들다 보니까요. 그러다보면 낫고요.(웃음) 머리 아플 때마다 듣는데 기분이 굉장히 상쾌해지고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요즘도 그러고 있어요.

 

 

 

형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


책에 등장하는 뮤지션들의 면면을 보면 출발이 클래식인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런 음악적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어떻게 보면 유럽과 미국에서 재즈를 대하는 느낌에 차이가 많이 났던 부분도 그런 부분입니다. 미국 재즈 같은 경우 1900년대 전반에 성장을 하면서 정규교육을 받은 연주자들보다는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쳐보고 클럽에 뛰어들면서 몸으로 하는 재즈가 체득이 된 경우가 많아요. 그에 비해 ECM을 대표하는 여러 연주자들은 클래식을 배운 이후에 재즈를 접한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기본기가 상당히 잘 돼있다고 할 수 있죠. 미국 재즈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런 면에서 미국 재즈가 주는 예상치 못한 스윙감 같은 느낌이 덜 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대개 ECM 뮤지션들이 굉장히 안정적고 음악을 전개해 나가는 게 상당히 클래식적인 감성을 많이 담아내는 것 같아요.

 

찰리 헤이든은 특이해요. 정부를 비판하고 저항가요를 연주했거든요. 음악을 통한 사회참여라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들이 재즈 연주자, 음악인이기 전에 한 사람의 세계 시민이니까요. 사실 그런 생각을 가진 연주자들이 굉장히 많은 편입니다. 특히 찰리 헤이든 같은 경우는 70년대 초부터 Liberation Music Orchestra라는 팀을 만들었습니다. 60~70년대에 미국 정부가 라틴 아메리카에 개입을 많이 하면서 그쪽 좌익 정권을 쓰러뜨리는 데도 참여를 했잖아요. 뮤지션들, 특히 찰리 헤이든이 이런 부분을 옳지 않다 생각해서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를 고발하는 음악을 하게 된 거죠. 곡 역시 찰리 헤이든이 작곡한 곡들도 있지만 원래 라틴 아메리카에서 부르던 혁명가요라든가 민중가요 같은 게 있어요. 그런 곡들은 아무래도 재즈하고는 많이 다른 멜로디죠.

 

ECM 음악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무엇보다 ‘자유로움’일 것 같아요. 형식에 있어서도 이국적인 악기 사용, 보컬의 악기적 표현 등 경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프로듀서이자 창립자가 만프레드 아이허인데요. 재즈나 클래식 이런 것들이 그분한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해요. 형식 보다는 누구와 누가 만났을 때 어떤 음악이 나올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한다고 해요. 재즈 뮤지션이니까 누구와 만나면 크로스오버가 되고, 이런 건 절대 생각 안한다고 하더라고요. 단지 자기가 들었을 때 ‘이 음이 누가 연주했던 음악과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한 번 만들어보는 거죠. 연주자들은 아무래도 가까운 사람과 연주하는 게 편하고 항상 해오던 사람들도 있고 그렇잖아요. 그게 오래 쌓이면 너무 똑같은 것만 하는 느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프레드 아이허란 프로듀서는 늘 이걸 형식과 상관없이 재미있게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만들었던 것들이 실제로 상당히 반응도 좋고, 그러다 보니까 이 레이블 전체에 활성화가 된 거죠.

 

만프레드 아이허의 존재감이 엄청난 것 같아요.


사실 ECM보다 중요한 이름이 만프레드 아이허입니다. ECM을 이 사람이 처음 만들 때 이 사람은 돈도 없고,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면서 레코딩 프로듀서로 일한 경험 정도 있었을 뿐이에요. 당시 유럽에는 아직 재즈를 찾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재즈란 음악이 1910, 20년대에 대중음악으로 시작을 했고 당시 미국에 다른 대중음악은 없었어요. 엘비스 프레슬리 등장과 더불어 50, 60년대에 재즈가 비교적 예술적인 음악이다 이렇게 됐지, 사실 30년대를 보면 대중음악은 거의 스윙재즈입니다. 그러니 재즈 뮤지션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가 등장하고 이러면서 이 사람들이 어려워졌어요. 그러면서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유럽으로 갔습니다.


또 미국에서는 60년대 말부터 퓨전 재즈, 그러니까 록과 재즈를 섞은 음악들이 성공하기 시작해요. 미국의 유명 재즈회사들이 다 그런 쪽으로 하게 됐죠. 키스 재럿 같은 사람도 그런 요구를 받다 보니까 차라리 ECM과 같이 일하는 게 낫지 않겠냐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유럽에서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고유의 정체성을 가진 재즈를 만들어 보자는 만프레드 아이허의 아이디어에 키스 재럿, 칙 코리아 같은 이름 있는 연주자들이 동참을 한 거죠. 만프레드 아이허는 ECM의 거의 모든 앨범을 프로듀서 했습니다. 하나도 다른 사람을 시키질 않아요. 녹음, 마스터링, 커버까지 CD가 완전히 나올 때까지 모든 걸 다 합니다. 디자이너가 말하기를 어떤 판은 400번 이상 컨펌 받은 적도 있다고 해요. 글씨의 위치, 크기 하나하나에 모든 정성을 다 쏟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좋은 것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고 음악적으로나 커버나 퀄리티가 계속 유지되는 거죠. 저희가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게 만약 이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이냐(웃음)고 해요. 죽지 말고 100세까지 열심히 해주시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어요.

 

열정도 대단한 분인 것 같네요. 


한국에 왔을 때도 그런 모습을 봤어요. 그분이 불교나 선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들어서 일주일 넘게 있었으니까 한국에 오면 가까운 절이라도 구경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전시장으로 나와요. 인터뷰를 하거나 전시장 돌아보고, 온종일 있다가 오후 되면 공연장 가서 사운드 체크하고, 끝나면 아티스트들과 저녁 먹고 호텔로 오고,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어요. 관광, 쇼핑 이런 건 전혀 관심 없어요. 어떻게 ECM이 한국에서 좀 더 정확하게 알려지냐 그런 것밖에는 말이죠. 제가 독일에 갔을 때 주말에 한 번 ECM 사무실에 갈 때가 있었는데 회사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었어요(웃음). 녹음하러 갈 때만 사무실에 없다고 해요. 아픈 것도 없고, 쉬는 것도 없고, 휴가도 없고 무조건 사무실 아니면 녹음, 둘 중 하나라고 하더군요.

 

경영자와 음악가가 완전히 분리된 레이블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했는데요. 장단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재즈는 굉장히 자유로운 음악이기 때문에 뮤지션들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게 제일 좋지 않으냐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부분은 있는 거죠. 본인이 하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해도 누군가 거기에 대해 좋은 제안을 해줘서 더 좋은 성과가 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걸 만프레드 아이허가 하는 거예요. 어떻게든 가이드를 해줬더라면 더 좋은 음악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연주자들도 몇 명 있어요. 이름을 말할 순 없지만 어떤 유럽 연주자는 본인이 프로듀서를 하는데, 피아노도 잘 치고 멜로디도 정말 잘 만들지만 그간 낸 앨범 다섯 장 컨셉이 전부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앨범은 괜찮다가 다른 앨범은 뭘 하려고 한 건지 의아하고요. 만약 ECM에서 가이드를 받고 음악적 방향을 설정했더라면 지금 있는 위치보다 더 성숙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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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RAMP> 앨범 커버 이미지

 

“ECM 앨범의 감상은 항상 커버를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143쪽) 라고 하실 정도로 커버아트가 특징적입니다. 책에서도 많이 언급하셨지만 ECM만의 커버아트 철학이랄까, 일관된 정체성이 있을까요?


‘음악과 어울리는 커버를 만들자’고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께서 노력하는 건데요. 만났을 때도 이야기를 하시는 게, 디지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음악은 커버를 보고, CD를 꺼내고, 속지를 읽어보면서 곡을 살피는 모든 게 다 음악 감상인 거지 단순히 컴퓨터를 틀고 음악이 나온다고 그게 음악 감상은 아니라는 거예요. 특히 자신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모두 의미가 있는 거지 괜히 어떤 것을 끼워 넣은 게 아니라고도 했어요.


ECM 커버에 변화가 있었는데요, 처음 69년에 나타났을 때는 LP시대였잖아요. 그때는 그림을 많이 썼어요. 80년대 후반, 90년대에 LP를 그만하기 시작하면서는 디자인의 중심이 좀 바뀐 거죠. 작은 CD 커버에 옛날에 LP에 넣었던 그림을 담으려니 느낌이 아무래도 달라지니까요. 예전에는 커다란 회화였는데 세밀화가 되어 버리니까요. 그래서 방향이 바뀐 거죠. 가장 최근에는 사진 등을 사용해서 레이블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는 거죠.

 

사진을 말씀하셨는데, 책 커버 역시 ECM의 느낌을 잘 반영한 것 같아요. 안웅철 작가님의 사진인데요.


안웅철 작가님이 워낙 ECM을 좋아하세요. 그분이 찍은 사진이 ECM 커버로도 사용됐고요. 작가님이 ECM에 대해서 무척 애정을 가지고 계시고 저희 쪽과도 잘 알고 그래서 한국에서 공연할 때는 항상 안웅철 작가님께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런 부탁 없어도 외국에 나갔을 때 ECM 공연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가서든 찍으시더라고요. 언젠가 그분과 ECM 아티스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커버도 그래서 안 작가님 사진 중에서 골랐어요. 이런 느낌의 사진들이 ECM에서도 많이 있어요. 하늘과 땅을 담은 사진들이요. ECM에서도 좋아하는 느낌의 사진이라 사진 자체는 ECM 앨범에 그대로 실어도 무리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책도 책이지만 ECM의 정체성과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이 사진을 골랐어요.

 

일본의 월광다방을 설명하면서 ‘언젠가 완벽한 카탈로그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셨어요.

 
십 년만 일찍 태어나으면 하는 생각을 해요. ECM 앨범들이 한국에 많이 들어올 때가 80년대 초반인데 그때 제가 너무 어렸어요. 중학교 들어가고 할 때라 수입 앨범들을 사 모을 형편이 못 됐거든요. CD로 나온 것들은 대충 다 가지고 있는데 70년대에 나온 ECM 앨범 중에 CD화가 안 된 작품들이 있어요. LP로만 있는 작품들은 진짜 고가의 중고판을 뒤져서 사 모아야 하죠. 지금도 어디 갈 때마다 살피긴 하는데 저도 직장이 있는 몸이니까 남는 시간 쪼개서 하나 두 개씩 사 모으고 있습니다.


월광다방 사장님은 정말 별 걸 다 모으셨더라고요. 70년대에 방송국에 보도자료로 썼던 비디오테이프 같은 것들까지 다 모으셨더라고요. 이걸 어디서 구했냐 했더니 돈 많이 썼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가지고 계신 희귀앨범이나 앨범을 찾아 헤맸던 추억이라든지 들려주실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제일 찾아헤맸던 게 ‘sun bear concert’라고 있어요. CD는 여섯 장 짜린데 LP는 열 장짜리거든요. 한국에서 구하기 힘들어서 일본에서 열심히 뒤졌죠. 우연히 공연이 있어서 요코하마에 갔다가 근처 중고음반점에서 적당한 가격에 파는 걸 발견했어요. 상당히 무거웠지만 기쁘게 사왔죠. 전시하면서 ECM에 요청도 했는데 ECM 본사에도 없는 앨범들이 많았어요. 본사에 모든 게 하나씩 꽂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아직 젊으니까 언젠가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LP와 CD가 얼마나 다른가요?


아날로그 LP의 느낌이 있어요. LP를 CD로 만들면 담을 수 있는 정보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폭을 줄여요. 그 부분은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소리거든요. 가청범위를 넘어가는 것들이니까 잘라도 아무 영향이 없다고 이야기를 해요. LP를 아주 괜찮은 느낌의 시스템에서 들으면 그게 들리는 건지는 몰라도 느낌이 달라요. 음을 이야기하는 게 굉장히 힘든데요. 이론상으로는 파일로 들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죠. 못 듣는 소리니까요. 하지만 좋은 공간에서 좋은 기계로 들으면 정말로 확연 느껴지는 게 있어요. 아무래도 CD로 들을 때는 좀 따뜻한 느낌 같은 것들이 없어지고 심플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사운드가 특히 MP3로 하면 아무래도 좋지 않겠죠. 사실 CD로만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저는 디지털로는 안 듣습니다. 편하긴 하지만 좋지는 않은 것 같아서요.

 

추운 겨울 차가운 바람에 얼어버린 하늘의 별들이 모두 내게로 쏟아져 내려오는 듯했다. 가바렉이 직접 연주한 영롱한 키보드에 마주르와 카체의 야성적인 타악기 연주가 가세한다. 여기에 가바렉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고음의 매끄러운 색소폰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마치 열두 개의 달에서 뿜어나오는 빛의 고리가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양이다. (97쪽)

 

사운드에 공을 많이 들인다는 느낌입니다. 공연실황 사운드에도 깜짝 놀랐어요.


내한공연 당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솔로 콘서트 녹음을 한 적이 있어요. ECM은 공연 녹음을 할 때 꼭 관객석 2층 위에서 마이크를 내려 거기서도 소리를 잡아요. 보통 천장에 꽂는 게 있어야 하는데 세종문화회관에는 꽂는 게 없었어요. 한국 엔지니어들이 대안으로 2층에 마이크를 세워서 녹음을 하자고 했는데, 키스 재럿과 같이 온 엔지니어가 그건 죽어도 안 된다고 하는 거죠. 300미터짜리 줄을 구해서, 밑에서 들고 올라와서, 천장에 연결해서, 거기서 내려서 녹음을 했습니다.(웃음) ECM은 원하는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해서 녹음할 때 타협이 없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경험한 바대로 제일 좋았던 걸 해야지 마이크대를 세워서 위치 똑같이 하면 어떻겠느냐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ECM이 굉장히 독특한 게 프로듀서부터 일하는 사람들, 뮤지션들까지 다 생각이 그래요. 돈을 좀 버릴 수 있고 그렇다고 해도 타협이란 게 없는 거죠. 만프레드 아이허가 처음 레이블을 만들 때부터 레이블을 만들어서 돈을 벌겠다 생각을 했으면 이렇지 않았을 겁니다. 사무실이 뮌헨인데 항상 녹음하러 오슬로까지 가거든요.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그냥 뮌헨 아무데서나 녹음하면 되죠. 이 사람은 처음부터 큰돈을 모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이 앨범을 녹음해서 다음 앨범을 녹음할 수 있을 정도의 돈만 벌 수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작게 시작한 게 1,500장까지 나올 수 있게 된 거고요. 항상 똑같은 퀄리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안 되면 될 때까지 하고 말이죠.

 

음악을 국가나 지역에 따라 구분하거나 거기에서 차이를 찾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이탈리아의 관현악 경향을 이야기하시는 걸 보면 아무래도 경향성이라는 게 있긴 한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는 유명한 게 성악이잖아요. 유명한 성악가도 많고요. 그러다보니 피아노 보다 목을 쓰는 악기들, 트럼펫, 트럼본, 이런 것들이 아무래도 좀 더 발달을 한 것 같습니다. 노르웨이 같은 데는 해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밝은 느낌 보다는 어두우면서 서정적인 느낌이 많이 들어가는 음악을 해요. 프랑스는 너무 크니까 여러 가지 측면이 있지만 그곳은 전통 자체가 집시 재즈의 영향을 받아서 다른 데보다 집시 재즈 스타일의 음악을 하고요. 독일은 재미있는 게, 너무 클래식이 강해서 그런지 몰라도 재즈 쪽에 유명한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독일은 일단 잘한다 싶으면 클래식 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ECM은 독일 레이블인데 독일 연주자들이 별로 없어요.(웃음) 뉴시리즈 통해서 발표하는 클래식 연주자들은 종종 있는데 재즈 쪽에는 그다지 많지가 않더라고요.

 

앞서 잠깐 언급하셨지만 미국과 유럽의 재즈 양상에 좀 차이가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현재 미국 출신 뮤지션들은 얼마나 있나요?


70년대 초반에는 미국 연주자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때와 지금이 비슷한 상황이에요. 지금도 소위 메이저 레이블들이 재즈 연주자들을 다 잘라냈어요. 블루노트도 유니버설이랑 합쳐져서 조금 올라가고 있지만 워너 재즈는 아예 없어졌고요. 미국의 재즈 음악 시장이 예전보다 작아지니까 좋은 연주자들이 유럽으로 와서 많이 활동을 하는 편입니다. 70년대도 똑같았잖아요. 한창 록, 메탈 전성시대로 가는 시기에 재즈가 돈이 안 되니까 연주자들이 유럽 레이블에서 많이 발표를 한 거거든요. 70년대 중반까지 ECM에서 미국 연주자들이 많이 작품을 냈다가 다시 미국 재즈 시장이 살아나면서 미국으로 돌아간 거죠. 70년대는 유럽 연주자들이 오히려 많지 않았어요.


ECM 안에서 유럽 연주자와 미국 연주자의 차이를 둘 수도 있겠지만 더 나타나는 차이는 ECM에서 내는 연주자와 그렇지 않은 연주자의 차이입니다. 왜냐면 다른 레이블에서 내는 미국 연주자들은 미국에서 할 때와 똑같은 음악을 하니까 굉장히 흑인풍의 음악을 하는데요, ECM은 그런 음악 중에서도 더 진지하고 생각할 수 있고 아방가르드한 음악들을 주로 하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느낌이 다른 것 같아요.

 

사실 ECM을 떠난 뮤지션들에 대해서도 ECM 시절을 더 많이 기억하는 부분도 있잖아요?


대표적인 게 팻 메시니인데 그분은 ECM 떠나서도 잘 됐으니까요(웃음). 이 이야기를 다시 해야 하는데요. ECM을 떠난 연주자들은 결국은 본인이 프로듀서를 하잖아요. ECM에 있을 땐 만프레드 아이허가 프로듀서를 하고요. 그 차이가 좀 있습니다. 그런 불만 때문에 떠났을 수도 있어요. 나가서 한 음악도 나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요. 음악에 우열이 있나요. 팻 메시니 같은 경우도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죠. ECM, 유럽 레이블에서만 활동하기에는 너무 위상이 높아졌으니까요. ECM에서 마지막으로 낸 세 장이 모두 그래미를 받고, 미국 쪽에서 오퍼도 더 좋은 걸 불러오고, 음악도 더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한 거죠. 근데 저는 사운드는 확실히 이쪽 것이 좋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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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반 더 소개하고 싶어


33개의 앨범을 소개하셨는데 아쉬움이 있으실 것 같아요. 

 

33개 앨범은 제가 제일 좋아한 앨범을 골랐습니다. 처음 계획은 세 파트로 나눠서 열한 장 씩 맞추자고 했었는데요, 하다 보니 한쪽에 더 소개해야 하는 앨범들이 생겼어요. 편집자께서도 그런 부분을 이해해주시고 제일 중요하고 좋은 앨범들을 싣자고 해서 지금의 구성이 됐습니다. 그래도 아쉬워서 뒤쪽에 간략하게 더 넣었고요. 마음 같아서는 100개 하고 싶지만 33개 쓰는 것도 힘들어서 100개를 쓰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았어요(웃음).


만프레드 아이허가 처음에는 재즈를 중심으로 했죠. 목표한 게 재즈 음악을 클래식 녹음 방식으로 다루자고 했던 거니까요. 그러다가 아르보 패르트라는 작곡가를 알게 됩니다. 아르보 패르트가 지금처럼 유명하지는 않은 상황이었는데 이 사람을 소개하려니까 지금 ECM이 가진 재즈라는 틀에서 벗어나야겠다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뉴시리즈가 탄생했습니다. 이것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ECM 클래식’이라고 이름 붙였겠죠. 그러나 아이허 생각에 뉴시리즈는 클래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어요.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누가 클래식이라고 하겠어요. 그렇지만 재즈와 클래식을 나누는 게 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는 거죠. 뉴시리즈는 기존의 재즈가 아니라 새로운 음악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ECM의 가장 큰 매력은 뭘까요?


어떻게 보면 재즈 연주라는 게 그냥 들어보면 똑같은 음악이 계속 나오는 느낌이 있잖아요. 물론 재즈 연주에서 제일 중요한 건 거기서 어떻게 연주를 잘하느냐, 즉흥 연주를 어떻게 하느냐 이런 것도 중요하겠지만 말이죠. ECM은 여러 가지 새로운 느낌들을 가미해요. ECM이 아니면 별로 들어볼 일이 없었던 그런 음악들을 끊임없이 들어볼 수 있으니까 그게 굉장히 매력적인 부분입니다. 여러 재즈 레이블을 듣고 있지만 ECM만큼 이렇게 다양한 음악을 내면서도 퀄리티는 유지하는 곳이 많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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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M TRAVELS 새로운 음악을 만나다류진현 저 | 홍시커뮤니케이션
최고의 아티스트, 최상의 프로듀싱과 레코딩,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 앨범 아트워크가 빚어낸 아름다운 걸작들의 탄생 스토리. 이 책은 그가 고른 명작 음반 33선에 대한 산문이며, 그가 만나고 경험한 ECM의 모든 것들(아티스트, 프로듀서와 엔지니어, 공연과 녹음 현장) 사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비밀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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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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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연선

읽고 씁니다.

ECM TRAVELS 새로운 음악을 만나다

<류진현> 저14,400원(10% + 5%)

최고의 아티스트, 최상의 프로듀싱과 레코딩, 예술적 커버 아트 ECM 레코드의 아름다움을 책으로 만나다 1969년 단골 음반가게 주인의 도움으로 첫 음반을 낸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와 그의 음악 레이블 ECM은 어떻게 40여 년간 1,500여 장의 앨범을 내며 오늘날 정상의 재즈 및 클래식 음악 레이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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