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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본 축구경기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를 보려면 되도록 구석에 앉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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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정말 위험한 경기다. 특히, 응원하는 팀이 지는 경기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위험하다. 제일 위험한 점은, 도대체 어느 경기가 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즘 아시안 컵 경기를 보다 보니,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를 봤던 게 생각난다. 사실 나는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당시 같은 숙소에 묵었던 여행자들을 그렇지 않았다. 축구의 성지,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를 본다는 것에 들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경기당일 별달리 세워둔 계획이 없었기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축구를 보러 따라나섰다. 숙소에서 뒹굴 거리는 것 보단 낫지 않을까 싶었다. 여행을 시작하고 한 달쯤 되는 시점이라 피곤에 절어 매우 느긋한 일정을 보낼 때였다. 반은 쉬고, 남은 반은 숙소 주위를 슬렁슬렁 둘러보는 정도로. 하지만 그 날의 일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일단 표를 구하기 위해 아침 일찍 라 봄보네라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표는 9시부터 판다고 했는데 우리가 8시쯤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설마, 못 사겠어.’ 싶은 심정으로 기다렸지만, 역시나 우리 앞에서 표가 동나 버렸다. 그늘도 하나 없이, 햇빛 아래 한 시간도 넘게 서 있었는데 말이다, 바로 그 때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 여기저기서 배나온 아저씨들이 띄엄띄엄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바로 암표상이었다. 표를 한두 장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척 봐도 몇 백장은 되어 보였다 어쩐지, 표가 엄청 빨리 동나더라니 큰 손들이 이미 다 쓸어갔던 거였다.

 

‘아니, 이 동네는 암표관리도 안하나! 한 사람에게 무슨 표를 저렇게 무식하게 많이 팔아!’ 싶었지만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집에 갈래? 암표라도 살래?’ 경기가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을 놓치면 아마 평생 볼 수 없을 거란 현실에 우리는 암표를 샀다. 조금이라도 깎아보려 흥정을 해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그렇게 표를 사고 나니 남은 문제는 시간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나왔는데 경기는 오후에 있으니, 시간이 엄청 남아 돌았다. 보카 주니어스 홈구장이라는 라 봄보네라 스타디움 주위를 하나하나 천천히 둘러보고, 밥도 먹고, 산책도 하고, 음료수도 마시고. 그러나 야속한 시간은 빨리 가지 않았다.

 

더 이상 할 게 없어 그냥 경기장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텅 빈 경기장에 사람들이 뜨문뜨문 앉아 있었다. 우리는 가장 한가해 보이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리고 그 자리가 재앙의 시작이었다. 현지인들이 앉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자리가, 보카 주니어스 응원석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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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했던 라 봄보네라 스타디움

 

우리가 얼떨떨하게 앉아있는 사이 우리 옆으로 촘촘히 파란색의 노란색의 천이 둘러쳐지기 시작했다. 우린 마치 끈에 포위당한 듯 앉아있었다. 천은 점점 늘어나고, 깃발이 앞 열을 메우고 심지어 대형 깃발까지 눈앞에 왔다 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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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천들이 우리 주위를 포위해 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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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었다

좌석은 상당히 좁은 편이었는데, 앉는데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경기가 시작된 이후 계속 서 있었으니까! 응원석에 있는 모두가 일어나서 한마음으로 응원동작을 따라 하고 구호를 외쳐야 했다. 동작을 제대로 못 따라하거나, 늦으면 어김없이 앞에 서 있는 응원단장들의 질책이 날아왔다. 이건 내가 경기를 보고 있는 건지, 경기를 같이 뛰고 있는 건지 헷갈릴 만큼 힘든 일이었다. 외국인이라고 봐주는 것도 전혀 없었다. 으아,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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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열기의 한가운데

 

여기저기서 피워대는 담배와 대마초의 구릿한 냄새를 맡으며 땀과 피로에 절어 응원 아닌 응원을 했다. 이때 심정은 ‘보카 주니어스 이겨라’가 아니라 ‘제발 아무나 이겨서 경기 끝나라’였다. 도대체 여기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는가 싶을 때쯤, 드디어 전반 종료 휘슬이 울렸다. 그 순간 약속한 듯이 사람들이 일제히 털썩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주저앉았다.

 

경기장에 처음 온 우리들만 뻘쭘하게 서 있었다. 좌석이 매우 좁은 관계로 앞사람의 엉덩이가 거의 내 발 위에 올려져있었다.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앉아서 겨우 한숨을 돌렸다. 앉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원체 좌석 사이가 좁은 지라 나 역시 뒷사람의 신발 위에 걸터앉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숨을 돌렸다 싶었는데 순식간에 후반이 시작되어 또 서서 점프를 해야 했다. 이러다 쓰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선수들이 느끼고 있을 피로가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슬쩍 눈치를 보며 뺀질거렸다. 점프하는 척 고개만 흔든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럴 때 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럴 때마다 응원단장이 귀신같이 지적했다. ‘어이, 거기’ 하면서 손가락으로 정확히 지적하는데 어떻게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거기다 분위기가 점점 심상치 않아지고 있었다. 보카 주니어스가 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악을 쓰고, 더 많은 대마초와 담배를 피웠으며, 충혈 된 눈동자가 번득였다. 상대편이 공을 지니기만 해도 야유가 쏟아져 나왔고, 보카 주니어스가 공을 뺐으면 고요하게 집중했다.

 

사막의 한가운데에 오아시스가 있다고 했던가. 나는 그 열기의 한가운데에서 그녀를 만났다. 분명 남자친구를 따라온 것 같은 그 여자는 토라진 얼굴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광기의 한가운데 있는 고요였다. 심지어 응원단장의 지적도 코웃음을 치곤 무시했다. 누가 남자친구인지 몰라도, 경기가 끝나면 그녀를 이런 땀과 대마 연기의 한가운데로 데려온 대가를 치러야 할 게 뻔해보였다.

 

나도 그녀를 따라 뺀질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처럼 당당하진 못했지만, 난 외국인이니까! 응원단장이 손가락으로 잘 가리키며 스페인어로 뭐라 외쳤지만 못 들은 척 하고, 슬쩍 눈을 피했다. 어쩔 거야. 혼자서는 엄두도 안 나던 반항이었지만, 그녀를 본 이후로 내 안에서 자신감이 샘솟고 있었다.

 

그 날 경기는 결국 보카 주니어스가 졌다. 사람들 사이로 실망이 퍼졌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자마자 경기장의 모든 출입구가 폐쇄됐다. 군중이 선수단을 덮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기나 지나 일단 출입구를 폐쇄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출구 쪽으로 몰려 하염없이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잘못하면 깔려죽을 것 같은 밀도였다.

 

하필, 그 때,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전반이 끝나고 화장실에 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모든 군중이 이동하는 와중에 나는 그 길을 한 마리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때쯤 장거리 버스여행의 후유증으로 인한 방광염에 시달리고 있었고,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무조건 가야했다. 노력으로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내 인생에 가장 험난한 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련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겨우 출입문이 열리고 나가는데, 일행 중 한명이 경기장을 나오다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꽤 심하게 맞았는데, 사람들이 주변에서 낄낄거리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친절한 아르헨티나 인들이 말이다! 보카 주니어스의 패배는 여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급히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 도착하자 맨발로 뛰어나온 다른 여행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TV로 경기를 보다 보카 주니어스가 져서 우리가 못 돌아올 줄 알았다면서,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환영해주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만 몰랐던 사실인데, 그 전날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축구장이 위험하다고 가는 걸 말렸었단다. 그런데 이 해맑은 축구 덕후들이 ‘별 일 있겠어요, 인생 한 번인데.’하고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전날의 그 대화를 모른 채 따라나선 거였다. 맙소사. 그렇게 내 첫 축구 경기장 관람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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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최은정

안녕하세요, 어쩌다보니 이곳저곳 여행 다닌 경험이 쌓여가네요. 여행자라기엔 아직도 어설프지만, 그래도 오래 다니다 보니 여행에 대한 생각이 좀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미국, 캐나다,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일본, 대만, 중국 등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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