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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김화영, 모디아노의 세계를 말하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번역가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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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트릭 모디아노와 한국 독자들 사이에는 번역가 김화영이 있었다.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인 그는 오랜 시간 모디아노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해 왔다. 그가 발견한 모디아노의 작품세계가 독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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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디아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지난 21일, 주한 프랑스문화원에는 파트릭 모디아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출판사 문학동네와 주한 프랑스문화원이 마련한 ‘번역가 김화영과 함께하는 모디아노 읽는 밤’ 행사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이날 독자들을 모디아노의 작품세계로 이끈 이는 번역가 김화영이었다.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알베르 카뮈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한 그는, 뛰어난 안목과 유려한 문체로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을 국내에 소개해 왔다. 파트릭 모디아노와 알베르 카뮈는 물론이고 장 그르니에, 미셸 투르니에, 생텍쥐페리의 대표적인 저서들을 번역했다.

 

김화영 번역가가 들려주는 모디아노의 이야기는 작가가 살아온 시간들을 더듬는 것으로 시작됐다. 다수의 모디아노 작품들은 개인적인 경험들을 소설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아버지와 벨기에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모디아노는 부모로부터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독일군을 피해 도망치듯 떠돌아야했고, 무명의 배우였던 어머니 역시 유랑 생활을 해야 했다. 모디아노는 두 살 터울의 동생과 함께 기숙사 학교를 전전하며 성장했다. 어느 한 곳에 뿌리 내리지 못한 모디아노는 끊임없이 정체성을 의심받으며 자랐다. 독일 게슈타포에게는 유대인으로 취급받으면서도,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니었음으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디아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 준 스웨덴의 한림원은 “그는 기억의 예술을 통해 불가해한 인간의 운명을 소환하고 점령기 프랑스의 현실을 드러냈다”는 말로 선정 이유를 밝혔다. 모디아노가 기억, 그리고 점령기의 프랑스를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은 유년시절의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화영 번역가는 『에투알 광장』 『야간순찰 La Ronde de nuit』 『외곽도로 Les Boulevards de ceinture』 의 세 작품을 ‘점령시대 프랑스의 삶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았다.

 

“저에게는 모디아노의 문장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모디아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문장을 따라서 걷는 산책과도 같은 것입니다. 매 순간의 걸음걸이와 호흡을 음미하는 것이죠. 모디아노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줄거리라기보다는 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명하면서 절제된 문체를 즐길 줄 알아야 모디아노를 읽는 흥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죠.”

 

모디아노에 대해 알고 싶다면 『혈통』부터 읽어라


그는 모디아노의 개인적 생애가 투영되어 있는 작품인 『혈통』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외곽도로』 『감형 Remise de peine』을 소개했다. 그 중 『혈통』은 그야말로 모디아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스물한 살 이전까지의 삶을 기록한 이 작품을 두고 김화영 번역가는 “남아있는 기억의 모습 그대로, 뒤섞여 있는 기억의 모습 그대로를 정확하게 기록하려고 노력한 기이한 자서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혈통』은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작품이라고 일컬으며(원제 ‘UN PEDIGREE’에서 ‘pedigree’는 주로 동물의 족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혈통』을 읽고 나면 모디아노의 다른 소설을 투시할 수 있다. 어떤 부분이 가감되었는지 알 수 있는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그가 1978년에 처음 번역한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의 원제는 ‘Livret de famille’로, 가계를 기록한 가족수첩을 의미한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한 가족이 만들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모디아노에게 있어 가족이란 것은 피로 맺어진 관계만은 아닙니다. 태어나서 만나게 되고, 알게 되고, 우연히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가족입니다. 그 타자들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생각이 깊이 박혀있는 소설이 바로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이고요.”

 

이밖에도 『외곽도로』에서는 모디아노가 출생하기 이전에 그의 아버지 세대가 살아낸 시대를 엿볼 수 있고 『감형』에는 유년시절을 기억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사실 모디아노가 깊이 관심을 가진 건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어 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나는 어떤 세계 속에서 태어났을까’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차츰 발전하면서 모디아노 개인이나 프랑스 사람들이 겪었던 점령시대에서 한 발 나아가게 되죠. 존재의 바탕을 흔들리게 만들 정도로 어두침침하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의 작품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감동을 주는 이유죠. 모디아노는 자신의 존재가 생기게 된 과정을 더듬기 시작하면서 어슴푸레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 안에서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더듬고 꿰어 맞춰서 하나의 온전한 전체로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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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사람들에 대해 증언하는 작가


김화영 번역가와 함께 읽은 모디아노의 또 다른 작품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였다. 소설은 기억상실증으로 과거와 함께 정체성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저마다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뿌리가 뽑힌 채 떠도는’ 인물들과 자주 만나게 되는데, 이 또한 가족에 대해 모디아노가 가지고 있는 관념을 드러내 준다. 모디아노에게 가족이란 살며 마주치는 모든 이들이고, 그들은 나의 존재를 정당화 해준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를 찾을 수 있고, 그들이 곧 나를 존재케 한다”는 것.

 

“모디아노 소설에 확실한 답은 없습니다. 오히려 확실한 답은 없기를 바라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주인공의) 기억이 되살아난 건지 상상인지, 모든 것이 끝까지 불확실하죠. 사실 우리의 기억이란 것은 어느 것도 완벽하게 보존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빠짐없이 남아있는 기억은 없습니다. 과거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지만 대체로 확실한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이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제목에서 ‘어두운’을 의미하는 단어 ‘obscur’는 어두침침하다는 뜻인데요. 사람과 함께 쓰이면 알쏭달쏭한 사람, 잘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는 이런 여러 가지 뜻이 합쳐져 있는데요. 그 거리가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독자들과 함께 읽고 작품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그리고 모디아노와 그의 작품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모디아노는 절대로 감정을 표출시키지 않지만, 그의 소설을 곱씹어서 읽어보면, 전체적으로 흐르는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존재, 떠돌거나 별 볼일 없는 실루엣 같은 사람들, 유령 같은 존재들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들이 있죠. 모디아노야말로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어둠 속에서 건져 올려서 그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다갔다는 것을 증언해 주는 아주 드문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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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마르셀 프루스트’ 모디아노


‘번역가 김화영과 함께하는 모디아노 읽는 밤’의 마지막은 독자들이 장식했다. 모디아노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김화영의 세계에 대해 묻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모디아노는 우리 시대의 마르셀 프루스트라고 평가받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프루스트작품의 제목을 모디아노에게 붙여도 좋을 만큼,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서 복원시키는 작업을 해왔죠. 그것도 의식적인 기억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뜻하지 않게 불쑥 솟아오른 기억으로요. 사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억이거든요. 실제로 그런 장면들이 모디아노 작품에 많이 등장하고요. 진정한 기억들을 모아서 하나의 전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프루스트와 모디아노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과거를 되살리는 향수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죠. 두 작가 사이에 전혀 다른 점은, 프루스트의 과거는 너무나 아름답고 좋았으나 모디아노는 어두컴컴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균열을 통해서 잃어버린 과거와 뜻밖의 재회를 한다는 점, 과거의 얘기를 소설화시켰다는 점, 두 사람 다 20세기 이전의 청소년기를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다른 것이, 프루스트의 작품은 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모디아노의 적품에는 긴 문장이 거의 없죠. 그리고 프루스트는 여러 가지 철학적인 문제와 관련시킨 내면적 성찰을 작품 속에 가득 담아놨지만, 모디아노의 작품에는 내적 성찰이 거의 없습니다.

 

모디아노의 작품들 중 하나만을 추천해 주신다면,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두 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줄거리가 있는 소설 한 권과, 줄거리가 있을 것 같은데 없는 소설 한 권이요. 왜냐하면 그 양면을 알아야만 모디아노의 세계를 볼 수 있거든요. 줄거리가 있는 책은 『팔월의 일요일들』이고요. 또 다른 한 권은 『도라 브루더』입니다. 『도라 브루더』는 1943년에 신문에 실린 사람을 찾는다는 기사를 출발점으로 해서 시작된 작품인데요. 읽어보시면 모디아노가 이름 없는 사람들을 기어코 끝까지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모디아노는 영화 같은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영화를 좋아하는지 궁금합니다.


모디아노는 일찍부터 영화와 관련된 작업을 해왔습니다. 루이 말 감독과 함께 영화시나리오를 쓰기도 했고, 소설 속에도 영화 얘기가 많이 등장하죠. 특히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에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50여 곡의 샹송 가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팔월의 일요일들』을 비롯해서 모디아노의 소설 중 영화화 된 작품도 여러 편 있고, 그 중 직접 시나리오에 관여한 작품도 많습니다.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번역의 기술일까요? 아니면 문학 작품에 대한 이해일까요?


역시 실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번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무엇을 번역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만약 제가 ‘무엇을 번역할까’를 고민하지 않았다면 모디아노 작품을 번역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당시 국내에서는 모디아노가 유명한 작가도 아니었거든요. 번역을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 저는 이런 질문들을 해봅니다. ‘이 작품이 얼마나 나에게 감동을 주었느냐’ ‘가슴에 얼마나 와 닿았느냐’ 하는 것이죠. 문학 번역은 원서가 가지고 있는 뜻만이 아니라 작품의 침묵까지도 옮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첫 번째는 원서를 가급적이면 스스로 고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좋은 작품을 번역해야 즐거울 테니까요. 그리고 모국어에 대한 깊은 수련이 있는 사람이 번역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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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파트릭 모디아노 저/김화영 역 | 문학동네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퇴역 탐정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여정을 그린 소설로, 흥신소의 퇴역 탐정인 작중 화자는 조악한 단서 몇 가지에 의지해 마치 다른 인물의 뒤를 밟듯 낯선 자신의 과거를 추적한다. 작가는 단순히 소멸된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을 넘어서 ‘기억 상실’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비극적 현대사의 한 단면을, 나아가 인간 존재의 ‘소멸된 자아 찾기’라는 보편적인 주제의식을 명징하게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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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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