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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피지언 웨이, 그들이 사는 법

오세아니아 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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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라 바카바누아’. 피지식으로 사는 삶이란 뜻이다. 남태평양의 투명한 바다에 보석처럼 점점이 박혀 있는 섬나라. 피지에서는 야생 그대로의 열대우림, 희귀한 토착 생물, 호기심을 자극하는 바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환한 미소를 건네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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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로 이동하면 투명한 바다에 작은 섬과 배가 점점이 떠 있는 절경을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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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오마 국립 유산 공원에 자리한 폭포 중 대다수는 바다로 연결되는 해안 절벽에 있다. 바닥의 거뭇한
암석은 용암이 굳은 현무암이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해변가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해맑은 표정의 아이들.
오른쪽 위 - 라베나 빌리지에 사는 소녀 로살리아 쿠루야바키.

 


더 바누아 웨이(The Vanua Way), 그들처럼 여행하는 법


승객 8명 남짓을 태운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구름 속을 헤치고 나아간다. 비행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고 구름이 점점 옅어지자, 브로콜리처럼 푸르고 풍성한 섬이 시야에 들어온다. “드디어 가든 아일랜드 오브 피지(Garden Island of Fiji)에 도착했구나….” 엔진 소리에 눌려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온몸으로 기류 변화에 맞선 것 같은 1시간여의 아찔한 비행 끝에 만난 시골 섬의 작은 활주로가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피지에서 세 번째로 큰 섬 타베우니(Taveuni). ‘정원 섬’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섬 주위로 에메랄드빛 바다의 색채 그러데이션이 펼쳐지는 건 피지의 여느 섬과 같다. 그럼에도 내륙으로 시선을 끌어 당기는, 풍성한 열대우림과 야생의 생태가 인간의 삶과 공존하는 곳이다. 타베우니 섬 전체의 80퍼센트에 달하는 면적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으며, 이를 덮고 있는 열대우림과 연안 산림 지대는 약 150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섬의 중간쯤, 부오마 국립 유산 공원(Buoma National Heritage Park)이 바다와 맞닿은 섬의 동쪽. 뾰족하게 튀어나온 라베나 빌리지(Lavena Village)에서 이 같은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날 수 있다.


토착민 비율이 70퍼센트가 넘는 타베우니의 각 마을 공동체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유산과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라베나 빌리지는 풍부한 자연유산으로 지속 가능한 에코투어리즘 개발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곳.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외부에서 유입된 산업이 접목되었다는 의미로 이를 ‘비즈니스 바 아바누아(business va a’vanua)’, 즉 ‘우리식의 비즈니스’라고 일컫는다. 이처럼 그들의 방식으로 국립공원을 탐방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코스탈 워크(Coastal Walk)라 부르는 연안 하이킹으로, 야자수가 우거진 해안가를 따라 걷는 것이다. 영화 <블루 라군>을 촬영했다고 하는 해변도 지나고, 타베우니 섬의 식생도 관찰하고, 바다에서 섬으로 파고드는 한 줄기 계곡을 따라 오르며 열대우림과 폭포 등을 돌아보는 루트다. 다른 하나는 보트 투어. 국립공원 일대에는 크고 작은 폭포가 20여 개 있는데, 일부는 하이킹으로도 만날 수 있지만 대다수는 해안가 절벽에 위치해 카약이나 보트를 이용해야만 감상할 수 있다.


6인 정도 탑승 가능한 작은 모터보트에 올라 투명한 코발트빛 바다를 가른다. 배를 모는 현지인 남자와 보조하는 소녀가 함께 배에 올라 여러 폭포로 향하는 바닷길을 안내한다. 한참을 시원하게 달리던 보트가 속도를 서서히 늦추더니 함께 탄 소녀 로살리아 쿠루야바키(Rosalia Kuruyabaki)가 손을 들어 멀리 절벽 위 폭포를 가리킨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싶지만 그럴수가 없다.

 

 “바닷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지만 용암이 서서히 식어서 형성된 평평한 바위가 절벽에서부터 넓게 펼쳐져 있어요. 무척 미끄럽기 때문에 위를 걸을 수도 없고요.” 그녀가 말한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폭포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출렁이는 바다에서 폭포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영락없는 울창한 계곡의 폭포수인데 바로 그 앞으로는 광활한 바다가 펼쳐지다니.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초현실주의 풍경화 같다고나 할까? 멀찍이서 애만 태울 즈음 쿠루야바키가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이번 폭포는 가까이서 볼 수 있어요! 썰물 때라 배로 들어갈 수 없으니 걸어가도록 해요.”


바다가 계곡으로 이어지는 기묘한 장소에 배를 정박하고 땅에 발을 디딘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엔 구불구불하게 얽힌 나무뿌리가 드러나 마치 영화 <파이 이야기> 속 식인 섬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맨발로 거침없이 바위투성이 계곡을 가로지르는 그녀를 따라가다보니 커다란 폭포수가 시원하게 떨어지는 웅덩이에 다다른다. 계단처럼 세 번 꺾어지며 하강하는 폭포다. “이 폭포는 사부 와이니바다(Savu Wainivaca)라고 불러요. 꽤 규모가 큰 폭포 중 하나죠. 우리 마을에 같은 이름의 3인조 밴드가 있는데 앨범 재킷을 이 폭포 앞에서 찍었다니까요.” 깔깔거리며 웃던 쿠루야바키가 냅다 폭포를 향해 돌진하더니 물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스물한 살이나 먹은 아가씨가 이토록 천진하게 폭포에서 물장구를 치며 논다. 놀라움 반 부러움 반의 감정이 오간다. “이 많은 폭포가 다 우리 거예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머리가 물 속에 쏙 들어갔다가 불쑥 솟구친다. 스폰지 같은 곱슬머리카락에서 튕겨 나오는 물방울이 햇살에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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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 탕이모디아의 하얀 속살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라색을 띤다. 나레시 산카란이 모아 놓은
피지의 동식물 관련 책들.

집을 짓기 시작하는 말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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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자신의 아름다운 색을 뽐내는 수컷 오렌지 도브.

 

 

 

우리가 타베우니에 가야 하는 이유


타베우니가 ‘정원 섬’이라 불리는 건 단지 꽃과 나무가 풍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피지 전체에 서식하는 거의 모든 식물군과 동물군을 타베우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 물론, 여러 동물의 주요 천적인 몽구스(Mongoose)가 없어서 피지원숭이얼굴박쥐(Fijian monkey-faced bat) 같은 희귀 토착종이 여럿 서식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생물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이 조류다. 타베우니에서 만날 수 있는 조류는 100여 종에 달하는데 그중 무려 22종이 이곳에만 서식하는 토착종이다. 생김새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비둘기와 흡사하지만, 크기가 작고 머리는 나뭇잎과 분간하기 어려운 초록색에, 몸통은 선명한 주황색을 띤(암컷은 초록색에 가깝다) 오렌지 도브(Orange dove)가 대표적 예다.


“저 꼭대기를 잘 봐요. 안 보여요?” 나레시 산카란(Naresh Shankaran)이 높은 나무 꼭대기를 가리키며 말한다. 한참을 바라보니 자잘한 나뭇잎 사이로 자그마한 주황색 몸통이 보인다. “잘 보면 저 녀석 근처에 노란 잎사귀가 있을 거예요. 자신의 색이 더 예쁘다고 뽐내려고 그 옆에 앉아 있는 거죠.” 타베우니 토박이인 산카란은 혼농임업을 하며 이곳에서 35년간 약초와 조류에 대해 공부해왔다. 약 40헥타르에 달하는 그의 사유 숲에는 온갖 종류의 과실나무 그리고 그 열매와 꽃을 쫓아온 10여 종의 새가 서식하고 있다. “여기에 자라는 망고 나무만 해도 열 종류나 되죠. 여러 가지 나무를 심다 보니 새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신기해서 새들이 좋아하는 과실 나무를 골라 심기 시작했죠.” 심은 건지, 저절로 자란 건지 분간하기 힘들 만큼 거친 그의 숲에는 파인애플, 스타 푸르트, 아보카도 같은 열대작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옛 방식 그대로 달큰한 코코넛 열매를 거름으로 쓰는 탓에 수만 마리의 모기 떼도 공존하지만 말이다.


산카란의 집 뒤뜰 외에도 다양한 새를 관찰할 수 있는 장소는 많다. 라베나 코스트의 열대우림에도 오렌지 도브와 피지 고쇼크(Fiji goshawk, 참매) 같은 희귀 조류가 서식하며, 타베우니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데 보 피크(Des Voeux Peak, 1,195미터) 역시 훌륭한 조류 관찰 스폿이다. 그곳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향하면 타베우니의 명소 중 하나인 탕이모디아 호수(Lake Tagimaucia)가 나온다. 해발 800미터에 자리한 호수는 과거 섬 전체가 화산으로 뒤덮인 지형학적 역사를 고증하는 장소다. 하지만 막상 호수의 이름을 널리 알린 건 이 주변에 서식하는 동명의 꽃 탕이모디아 덕분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제치고 당당히 50피지달러 화폐의 주인공이 된, 이 피지의 국화를 보기란 피지에서 긴 생머리 아가씨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탕이모디아는 해발 6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만 꽃을 피우는데, 개화 시기도 딱 10월에서 12월 사이다. 게다가 타베우니 섬 밖으로 나가면 더이상 꽃을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지금 당장 꽃 찾기에 도전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잘 닦이지 않은 험난한 오르막길을 차로 30분 이상 올라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차에서 내리면 탕이모디아가 눈 앞에 떡하니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 꽃은 외지인에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직 현지인만이(그것도 바로 근처에 사는) 그 꽃을 찾을 수 있다.


탕이모디아가 피어 있는 곳을 안다는 한 사내를 수소문해 함께 그곳으로 출발한다. 시트가 얄팍한 구식 SUV를 타고 진창이 된 바위투성이 산길을 오르는 건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차 안에서 좌우로 굴러다니며 기약 없는 길을 가던 중 사내가 갑자기 “스톱”을 외친다. 무슨 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차에서 내린 그는 사람만큼이나 키가 큰 길 옆의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더니 곧 다시 나와 “컴온” 하며 우리를 부른다. 수풀을 가르고, 미끄러운 오르막길을 오르고, 갈대 더미에 발이 푹푹 빠져가며 어느 산기슭에 닿자 드디어 탕이모디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카시아처럼 하나의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작고 빨간 꽃잎 속에는 하얀색 속살이 숨어 있다.


소녀의 피눈물이 줄기에 떨어져 꽃이 되었다는 전설을 품은 탕이모디아. 전설을 현실에서 마주한 이가 늘 그렇듯 약간의 허무함과 왠지 모를 뿌듯함을 동시에 느낀다. 이제, 산을 내려가 내일이면 짧은 시간 정들었던 타베우니를 떠나 다른 섬으로 가야 한다. 피지라는 나라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초목의 푸르름을 만끽할 수 있었던 곳. 보통 이처럼 아쉬움이 남는 순간엔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들 한다. 타베우니라면 이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전 세계에 단 4곳만 있는 날짜변경선이 이 섬을 지나기 때문. 서쪽 해안가 중간쯤에 자리한 인터내셔널 데이트라인(International Dateline)에 서면 한 발짝만으로 어제와 오늘을 오갈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의 아쉬움은 새로운 장소에 대한 기대감이 말끔하게 지워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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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클라우드 나인으로 데이 트립을 와도 좋고, 잠시 들러 스낵과 맥주를 즐겨도 좋다.

 

 

 

웰컴 투 모던 워터 월드


지구의 먼 미래, 극지대의 빙산이 녹아 지구 표면을 물로 덮어버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인공 섬을 만들어 워터 월드에 조금씩 적응해간다. 1995년 개봉한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워터 월드>는 당시 평론가들의 조롱을 받았지만, 일반 관객에겐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보는 ‘물 위의 삶’에 대한 로망 혹은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엔 한계가 있게 마련. 마마누다 군도(Mamanuca Islands) 내 남태평양 바다 위에 떠 있는 클라우드 나인(Cloud 9)에서라면 바다 한가운데의 ‘삶’까진 아니더라도 ‘쉼’ 정도는 만끽해볼 수 있다.


바다 위 거대한 땟목의 가장자리를 차양으로 두르고 가운데 2층짜리 오두막을 세운 듯한 클라우드 나인. 이곳을 설명할 마땅한 단어는 없다. 그저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 위, 흥겨운 음악과 갓 구워 낸 이탈리아식 화덕 피자, 시원한 맥주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곳이라고 부연하는 수밖에. 피지에서 가장 큰 섬 비티 레부(Viti Levu)의 데나라우 항구(Denarau Port) 혹은 마마누다 군도 곳곳의 작은 섬에서 크고 작은 배들이 쉴 새 없이 오가며 이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바다를 향해 아찔하게 뻗은 선 데크(sun deck)의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널브러진 채 음악에 맞춰 온몸의 관절을 까딱거리는 사람, 물안경과 스노클을 끼고 투명한 바닷속으로 첨벙 뛰어드는 사람, 오가는 보트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며 깔깔대는 사람. 모두들 스트레스와 근심 따윈 육지에 모두 던져버리고 온 듯 천국 같은 휴식에 빠져 있다.


바다에 둥둥 떠 있는 클라우드 나인에 주소가 있을 리 없다. 지금 이곳은 마마누다 군도에서 가장 큰 섬 말롤로(Malolo) 근처 로로 리프(Ro Ro Reef) 위다. 지난 해 6월 처음 문을 열었을 땐 이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이름난 서핑 명소 클라우드 레이크(Cloud Break) 근처에 있었고, 두 번째 시즌부터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클라우드 브레이크는 마마누다 군도에서 가장 유명한 서핑 스폿이죠. 바다 한가운데 있다보니 근처에 라이더들이 쉬고 즐길 수 있는 만남의 장소 같은 시설을 만들고 싶었어요.” 클라우드 나인의 오너이자 이름난 DJ인 바엘 바흐텔(Bar’el Wachtel)이 말한다. 해안가가 아닌 바다 한복판에 거대한 파도가 치는 클라우드 브레이크는 오직 수준급 라이더만 도전할 수 있는 서핑 스폿으로, 수많은 서퍼가 클라우드 나인을 베이스캠프 삼아 거쳐 갔다. 그가 말하길 서퍼라면 누구나 알 만한 켈리 슬레이터(Kelly Slater)와 레인 칠리(Layne Beachley)도 여러 번 다녀갔다고. “전 세계에서 모인 멋진 친구들을 만나기에 가장 완벽한 장소 아닌가요? 기가 막힌 라군이 펼쳐지죠, 투명한 바닷물하고 산호는 또 얼마나 아름다워요. 맛있는 화덕 피자와 라임을 듬뿍 넣은 다이키리도 있잖아요. 게다가 여긴 남태평양 한가운데라고요!” 바다가 360도로 펼쳐지는 이곳에서 바흐텔의 의견에 200퍼센트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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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세이세이 빌리지는 피지 최초로 감리교회가 유입된 마을이기도 하다.

 

 

 

달콤했던 피지의 역사를 마주하다


“우리 조상은 탕가니카(Tanganika)에서 왔어요. 지금은 탄자니아라고 하지요.” 피지의 첫 정착민이 이룬 최초의 마을로 알려진 비세이세이 빌리지(Viseisei Village)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여인 세레이마 마라부(Sereima Maravu)가 말한다. 구전되어온 이야기에 따르면, 기원전 1500년 루투나소바소바(Lutunasobasoba)라는 이름의 전사는 아프리카(혹은 이집트 북쪽이라 알려진 곳)의 탕가니카에서 카누를 타고 지금의 라우토카(Lautoka) 근처에 자리한 분다(Vuda)에 정착했다. 그의 자손들이 지금의 피지 원주민이라고. 정확하게 고증된 역사는 아니지만 수많은 피지 인은 이 전설 같은 역사를 굳게 믿고 있다. 딱히 그것이 사실이 아닐 이유도 없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자잘한 곱슬머리를 동그랗게 만든 이른바 아프로(Afro)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수많은 피지언(Fijian)을 보고 있자면 누구라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피지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비세이세이 빌리지는 이미 수많은 관광객이 다녀간 곳.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기념품 가판대(마을 여인들이 팔고 있다)만 봐도 무르익은 관광지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지레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찌 됐든 이곳이 피지의 역사에서 중요한 마을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고, 그런 장소엔 늘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게 마련이니까.

 

 “우리 마을은 다른 6곳의 마을과 연결되어 있는데, 전체 부족장이 이곳에 살고 있어요. 마을에는 어부, 목수, 전사의 3개 부족이 있고, 6개의 씨족으로 나뉩니다. 하지만 전체로 보면 모두 연결된 가족이지요. 저기에 학교도 있어요.”

 

 마을을 안내해주던 마라부가 마을 건너편 학교를 가리키며 말한다. “우리 할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까지 모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엄청난 고역이었지요. 우리 세대는 선진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고된 일을 하지 않아요.”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비세이세이 빌리지의 큰 수입원은 다름아닌 마마누다 군도의 여러 섬. 비치콤버(Beachcomber), 트레저(Treasure), 바운티(Bounty) 그리고 사우스 시(South Sea) 섬이 모두 마을의 소유로, 그곳에 리조트를 세운 호주나 뉴질랜드의 기업가들이 마을에 임대료를 지불한다. 그뿐 아니라 마을의 학생은 학교에서 호텔 관련 교육을 받고 각 섬의 리조트 곳곳에서 호텔리어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지 않지만, 라우토카는 여전히 피지 사탕수수 생산?정제업의 중심지다. 지금도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사탕수수 운반 철로를 볼 수 있다. 철길은 이곳 라우토카에서 섬 남쪽의 코럴 코스트(Coral Coast)까지 이어진다. 관광업이 주요 산업이 되기 이전 피지의 경제를 좌우하던 사탕수수 산업은 피지의 역사는 물론 인구 구성까지 바꾸어놓았다. “영국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으로 쓰기 위해 인도 사람을 피지로 대거 유입했어요. 그때가 1978년이니까 저는 그들의 6세대 후손이지요.” 외모만 보면 델리(Deli)에서 왔다고 해도 믿을 법한 인도계 피지인 가이드 리날 리네시 찬드(Rinal Rinesh Chand)가 말한다. 피지 전체 인구의 거의 절반 정도가 찬드와 같은 인도계 피지인이며 이들에게 인도는 그저 머나먼 조상의 고향일 뿐이라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인도 이주민 덕에 번성하던 사탕수수업은 이제 상당 부분 축소되었다. 오늘날 피지에 남아 있는 사탕수수 공장은 단 3곳뿐. 그중 하나인 라우토카의 슈거 밀(Sugar Mill, 설탕 공장)은 1902년에 문을 열었다. 이곳에선 여전히 순수한 설탕과 럼(rum)의 주원료인 당밀을 제조한다. 가장 바쁜 수확철이 지나고 한가해진 공장의 한편에는 낡은 디젤 운반 열차와 뒤늦게 수확한 사탕수수 더미가 달큰하고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쓸쓸하게 서 있다. 이 광경을 쓸쓸하다고 느끼는 건 아마도 녹슨 열차와 텅 빈 수레에서 한때 피지의 경제를 주름잡던 늙은 호랑이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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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 비세이세이 빌리지에서 전통 북 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세레이마 마라부. 사탕수수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송아지.

철길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사탕수수 더미.

사탕수수 공장 근로자들이 살고 있는 숙소는 지은 지 100년이 넘었다.
아래 - 피지에서 가장 역사 깊은 최고의 럼 브랜드 바운티(Bounty)의 공장도 라우토카에 자리한다.

 

 

 

강과 모래와 바다 그리고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


헬리콥터나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비티 레부의 남쪽, 섬과 바다의 경계에 하늘색 산호초 군락이 길게 이어지는 걸 알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코럴 코스트다. 이 코럴 코스트의 서쪽 끝에 피지에서 두 번째로 큰 싱가토가 강(Sigatoka River)이 바다로 흘러나가는 하구가 자리하는데, 그 옆으로는 거대한 모래언덕이 5.5킬로미터가량 뻗어 있다. 바다 옆에 사구가 자리하는 건 그리 드문 광경이 아니지만 이곳 남태평양의 섬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강의 어귀에 산호 군락이 넓게 펼쳐지는 독특한 지형 덕에 싱가토카 샌드 듄(Sigatoka Sand Dune) 같은 사구 지대가 생겨난 것. 그 희소성과 지질학적 ㆍ 자연적 가치 덕에 이곳은 1987년 7월 피지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내셔널 트러스트 오브 피지(National Trust of Fiji)에서 관리 ㆍ 감독하고 있다.


싱가토카 샌드 듄의 역사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모래더미 속에서 오세아니아의 고대 문명으로 알려진 라피타(Lapita) 문명의 도자기 조각을 비롯해 석기, 유골 등의 여러 고고학 유적이 출토되면서 이곳에 피지의 첫 정착민이 살았다는 학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금도 종종 여행객이 모래 틈에서 도자기나 뼛조각을 발견하곤 한다. 맨발로 부드러운 모래사막을 거닐다가 누군가의 대퇴골을 밟은 듯한 느낌이 든다면 꺼림직하다고 그냥 파묻어버리지 말고 고이 꺼내 국립공원 사무실에 가져다주도록 하자. 최초 피지인의 영혼이 당신의 여행길을 내내 안전하게 지켜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국립공원에서는 싱가토카 샌드 듄과 사구림(沙丘林)을 돌아보는 두 가지 워킹 코스를 제안한다. 하나는 짧은 길이라는 뜻의 야톨레칼레아(Yatolekalea)로 작은 사구와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속성으로 돌아보는 1시간 정도의 코스다. 긴 코스인 야토발라부(Yatobalabu)는 샌드 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경험하는 코스로, 무성하게 자라는 사구의 식생부터 시시각각 변하는 모래언덕 그리고 약 60미터 높이에 자리한 사구 꼭대기의 전망 포인트까지 돌아볼 수 있다.
야톨레칼레아 워킹 코스의 초입은 사방으로 갈대 비슷한 초목이 펼쳐지는 야트막한 언덕길이다. 바닥엔 흙 대신 모래가 깔려 있지만 각종 풀과 꽃나무는 잘도 자란다. 걸을수록 모래가 점점 많아지면서 발이 푹푹 빠지기 시작한다. 플립플롭을 신었다면 벗는 편이 걷기에 훨씬 수월하다. 어느덧 모랫 길은 광활한 사구 언덕으로 이어진다. 멀리 푸른 바다의 수평선이 보인다는 걸 제외하면 거대한 모래언덕은 대륙의 사막을 닮았다. 돌아가는 길은 숲으로 이어진다. 언제 바다였나 싶을 만큼 울창하게 우거진 숲은 1960년 점점 확장되는 모래언덕이 메인 도로인 퀸스 로드(Queens Road)까지 범람하는 걸 막기 위해 마호가니 나무를 심어 조성한 것이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천연 차양을 이루는 한적한 숲길을 거닌다. 바닥에 자작하게 깔린 노란 나뭇잎에서 바스락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온다.


내셔널 트러스트 오브 피지는 전 세계에 싱가토카 샌드 듄의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 리스트에 제출해 놓은 상태다. 이 단체의 일원이며 싱가토카 샌드 듄 국립공원에서 6년 동안 파크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제이슨 투타니(Jason Tutani)가 말한다. “전 싱가토카에서 태어났고, 이 모래언덕에서 뛰어놀며 자랐어요. 말하자면 추억이 가득한 장소죠.” 투타니는 대학을 졸업하고 생물 화학 교사가 되었지만, 왠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3년 만에 교사직을 그만둔다. 그후 비정부 환경 교육기관에 들어가 어린이 환경보호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지금 이곳 내셔널 트러스트 오브 피지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피지가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자연 속에 스며든 피지 인의 삶 말이다.

 

 “운이 좋았어요.전 이 일을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오지 않은 수많은 모험을 기다리고 있죠. 싱가토카 샌드 듄은 어찌 보면 남태평양의 돌연변이 같은 존재예요. 전 이곳을 ‘피지의 태피스트리(tapestry,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라고 부르죠. 모래와 강, 바다, 바람이라는 실이 모여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그 안에 인간이 어떻게 이곳 피지에 정착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고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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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토카 샌드듄 국립공원의 모래언덕으로 가는 길에 바라본 풍경. 아름다운 풍경과 지리적 역사를 동시에 간직한 가치있는 장소다.

마호가니 숲의 '트리 허거(Tree Hugger)'는 내셔널 트러스트 오브 피지의 자연사랑 프로젝트의 하나다.
언덕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사구의 내리막길.
파크 레인저(Park Ranger)가 싱가토카 샌드듄 트래킹코스를 설명해 주고 있다.

 


 

취재 협조 피지관광청(02 363 7955, HappyFIJI.travel)

드림아일랜드(02 566 3612, dreamislan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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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lonely planet (월간) : 1월안그라픽스 편집부 | 안그라픽스
외국에서 지내다 보면, 일정이나 비행기 탑승 시간 등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나 혼자만 현지에 남는 경우가 생긴다. 이미 오랜 외유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진 터라 귀국한다는 마음으로 들뜬 사람을 혼자 배웅하는 기분은 썩 좋을 리 없다. 혹시 현지인에게 박대라도 받는다면,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다 찢어질 때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울 마음이 가득한,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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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론리플래닛매거진

론리플래닛 매거진은 세계 최고의 여행 콘텐츠 브랜드 론리플래닛이 발행하는 여행 잡지입니다. 론리플래닛 매거진을 손에 드는 순간 여러분은 지금까지 꿈꿔왔던 최고의 여행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을 포함 영국, 프랑스, 스페인, 브라질, 인도 등 세계 14개국에서 론리플래닛 매거진이 제안하는 감동적인 여행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lonely planet (월간) : 1월 [2015]

안그라픽스 편집부6,300원(10% + 1%)

부록 : 제주 여행 가이드(책과랩핑) 지구촌 여행지를 다룬 여행전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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