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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무, 겨울의 말(言)

샴페인 파우더 스노의 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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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땅을 지키는 건 이름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다. 땅이 품은 그대로를 닮아 태어난 말(言)이 오래도록 그 땅을 그답게 하는 것이다. 토마무는 ‘유후츠’ 스럽고, ‘시무캇푸’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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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 파우더 스노를 만끽할 수 있는 설원

 

호시노 리조트는 이동할 때마다 셔틀버스를 타야 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토마무는 곧 이 리조트를 뜻했고, 마치 동화 속 마을 같았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규모에 비해 비수기 평일 요금은 꽤 저렴했다. 평년보다 눈이 늦어진 스키장은 예정보다 2주나 늦게, 그것도 초급 코스만 개장했다. 덕분에 사람이 적었고, 어차피 스키는 젬병이라 초급밖에 탈 수 없었다. 여행객보다 종업원 수가 더 많았다. 프런트에 가면 서너 명의 직원이 한꺼번에 다가왔고, 셔틀은 전용 리무진이 되었다. 작은 해안가라 해도 될 정도의 실내 수영장은 우리만을 위해 파도를 만들어주었으며, 안전요원의 시선도 독차지했다. 기다란 노천탕에선 홀로 앉아 건너편의 전나무 군락과 독대할 수 있는 횡재도 누렸다.

 

포로록 소리를 내며 발 끝에 짓이겨지는 눈의 감촉이 전분 가루 같이 고왔다. 만지작거리다 동그랗게 손으로 집어 들자 스르르 잘도 빠져나갔다. 이런 눈 속에 넘어지면 아프지도 않았다. 폭신한 구름장에 굴러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초급이라 해도 슬로프는 산 정상에서부터 시작해 족히 삼십 분은 걸리는 야산에 가까운 코스였다. 나는 자꾸만 풍덩 풍덩 눈 속으로 파묻혔고, 그때마다 입김을 뿜으며 웃어 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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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눈은 습기가 없어 잘 녹지도, 얼지도 않는다. 불면 날아갈 정도로 가벼워 ‘파우더 스노(Powder Snow)’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토마무의 설질은 최상급인데, 이를 ‘샴페인 파우더 스노’라 부른다. 초급부터 전문가 레벨까지 선택할 수 있는 슬로프는 모두 25개다. 리프트 대기 시간은 거의 없다. 적설량은 평균 1m가 넘고, 3월까지 매일같이 눈이 내리고 쌓이길 반복해 더욱 부드러워진다.

 

유후츠군(郡) 시무캇푸무라(村) 토마무

 

4시가 되면 부리나케 다가드는 어둠에도 심심하진 않았다. ‘아이스 빌리지’, ‘물의 교회’, ‘레스토랑 Hal’ 등 보고, 맛보고, 즐길 것들이 한가득 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여러 홍보매체와 블로그에 충분히 담겨 있어 (과감히) 생략한다. 대신 아무도 관심이 없었을 법한 토마무에서의 장면을 불러내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광신도처럼 하얀 것만 쫓아 다녔던 것이나, 끝을 모르겠는 나무숲에 둘러싸여 모두가 탄성을 질렀던 그런 순간들 말이다.

 

토마무산(山)에서의 시간은 눈 속에서의 고립이었다. 그렇다고 고독과 가깝진 않았다. 다만 새하얀 배경이 광활했던 탓인지, 사물이 넓게 보이고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고요 속에서는 몸의 감각이 낯설게 느껴졌다.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눈꽃 나무, 불길처럼 타오르는 저녁놀, 온통 하얗게 매몰되는 하늘 아래의 것들……. 어둠이 밀려오면 침엽수로 가득 찬 숲은 더욱 짙어졌다. 키가 큰 전나무 군락에 둘러싸인 레스토랑 ‘니니누푸리’로 가는 길은 유리로 된 벽면을 따라 난 복도였다. 숲이 깊어질수록 동물들의 한줌 작은 발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무게만큼 패인 흔적들이 새로운 눈으로 뒤덮이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어쩐지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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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경을 언제 다시 스쳐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알맞은 단어를 찾아 기록을 남기려는 습성이 발동해 내속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단어들을 찾아 헤매었다.

 

하얘진다는 건 무슨 말일까? 그건 서로 다른 모양을 가진 눈송이들이 겹쳐진다는 말. 아니 그건 어디에선가 바다가 울고 있다는 증거. 그럼에도 나는 기어이 발자국을 내고 싶다는 이기심. 어쩌면 너와 내 발자국을 평행하게 찍고 싶다는 싱거운 고백. 그러나 고도가 높아지면서 먹먹하기 짝이 없는 귓속의 메아리. 곧 너의 침묵. 그럼에도 다시 새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모두가 하얀 것을 동경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일생을 통틀어 가장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태어남의 순간조차 시뻘건 피를 뒤집어 쓴 채였다.

 

그렇다면 둘러싸인다는 건? 그건 고요함의 소리를 듣는 찰나일지 모른다. 고요함에도 분명히 소리가 있다. 단단한 숲에 둘러싸이면 소리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정밀하게 느껴졌다. 속도와 시간이 엇박자로 맞물리며 기분 좋은 기운을 귓속에 불어넣었다. 신의 입김이란 게 있다면 딱 이 정도 온도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차고 맑은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 신의 폐활량에 맞춰 내 속 낱말카드도 조그맣게 흩날렸다. 어릴 적 처음으로 발음한 사물의 이름을 그려본다. 이것은 눈, 저것은 밤, 저쪽에 나무, 발 밑에 땅, 당신은 당신…… 귀가 닳고 사위어 어지러이 뒹구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스키를 잘 타지 못해 생각의 꼬리가 과하게 길어졌을 뿐.

 

때로 땅을 지키는 건 이름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다. 땅이 품은 그대로를 닮아 태어난 말(言)이 오래도록 그 땅을 그답게 하는 것이다. 토마무는 유후츠군(郡) 시무캇푸무라(村)에 있다. 홋카이도 원주민 아이누말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강의 상류이며, 위대한 벌판이라는 뜻이다. 토마무는 ‘유후츠’ 스럽고, ‘시무캇푸’ 같은 곳이었다. 설국의 고요 속에서 그 땅을 닮은 말이 지닌 의미와 기운을 어렴풋하게 알아챘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이 실현되는 게 아이누의 지명이라면, 믿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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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무 역은 아담하고 한산했다. 터널을 빠져나온 기차가 플랫폼에 멈춰 섰다. 내가 토마무의 말들을 떠나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언젠가의 여름이 오면, 구름이 바다처럼 흘러간다는 운해 테라스에 서보고 싶어졌다. 그때의 계절을 담은 땅이 전해올 말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볼드체로 표시한 부분은 김애란의 소설 『두근 두근 내 인생』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토마무 호시노 리조트 (//www.snowtomamu.jp)

 

- JR 토마무 역에서 무료 셔틀버스로 5분. 신치토세 공항에서 1시간, 삿포로에서 2시간 소요.
- 활동적인 여행이라면 ‘더 타워’에서, 조용한 휴식을 즐기고 싶다면 ‘리소노’의 개별 온천이 있는 객실이 좋다.
- 25개 슬로프가 있으며, 상급자의 경우 토마무 산을 개방한 해방 구역에서 라이딩이 가능하다.
- 레스토랑 ‘니니누푸리’와 ‘HAL’은 에서 홋카이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으며, 통유리로 된 창으로 너머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밖에도 십여 개의 레스토랑이 있다.
- 미나미나비치(파도풀), 기린노유(노천탕), 스파로 피로를 풀 수 있다.
- 겨울철엔 스키 외에도 스노 피크닉, 래프팅, 모빌, 바나나보트, 썰매 등의 액티비티가 마련되어 있으며, 어린이 탁아 프로그램 및 스키/스노우보드 레슨은 각국의 언어로 가능하다.
- 아이스 빌리지는 스케이트장, 얼음으로 만든 호텔, 레스토랑, 바, 공방, 채플, 카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물의 교회: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 꼽힌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대표 건축물로 주로 결혼식장으로 쓰인다.
- 여름철: 골프, 열기구 등의 레저를 즐길 수 있으며, 운해 테라스는 여름철 새벽에만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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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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