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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 당신은 무엇을 믿겠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믿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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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가장 흥미로운 장면을 꼽자면 이 장면이었을 터다. 인하와 달포는 처음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긴장감은 치솟는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적으로 감독의 연출력에 기대는 영화에 비해 드라마는 스토리를 풀어가는 작가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드라마 마니아들에겐 꼭 자기 나름의 베스트 작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좋아하는 장르나 작품을 써서, 캐스팅 능력이 좋아서, 스토리가 언제나 재미있고 흥미로워서…. 이유는 다양하다. 내 경우 언제나 작가가 세상과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드라마 속 메시지에 주목한다. 가능하면 따뜻하고 다정했으면 좋겠고, 인간과 삶의 보편적 진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처럼.


SBS <피노키오>를 기대했던 이유는 그래서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제작진과 이종석의 재회도 좋고, 캐스팅도 훌륭하고, 음악이나 연출도 나무랄 데 없다. 허나 무엇보다도 작가 박혜련의 귀환이라는 것이 가장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타인의 마음속을 읽을 수 있는 소년’이라는 소재로 인간 사이 소통과 성장에 대해 따뜻하고 다정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털어놓았던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후, <피노키오>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고 돌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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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 SBS

 


거짓과 진실, 그 사이 선택


43명 중 한 명 꼴로 발생하며, 거짓말을 할 시 자율신경계의 이상으로 딸꾹질을 하는 병 ‘피노키오 증후군’. 아주 사소한 거짓말도 하지 못하는 이 가상의 질환은 드라마가 참과 거짓에 대해 다룰 것임을 암시한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 사람들은 언제나 진실을 갈망하지만, 과연 거짓 없는 진실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것이 아름답기만 할 것인가? 드라마가 제시하는 의문은 하나하나 흥미롭다.


눈길을 끄는 것은 진실과 거짓 사이 선택의 문제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진실과 거짓의 기로에서 매번 어떤 것을 선택할지 시험 당한다. 당장의 위기를 면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욕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 혹은 누구에게도 나쁠 게 없기 때문에―쓰러진 공필(변희봉) 옆에서 그렇다고 아버지를 속이냐고 책망하는 달평(신정근)에게 달포(이종석)는 말한다. “어느 누구도 나쁠 게 없는데! 그깟 거짓말 하면 어때요?” 이것은 이후 수년간 달포의 삶을 정의하는 말이 된다―거짓말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편 직업적 신념 때문에, 양심 때문에, 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제 질환 때문에 진실밖에 말할 수 없는 인하(박신혜)나 이웃집 청년(김영준)도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 나름의 이유 때문에 진실 혹은 거짓을 선택하지만, 드라마는 섣불리 개인의 참과 거짓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려 들지 않는다. 한 발짝 물러서 그저 어느 쪽을 택하든 그 결과는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며 예상치 못한 커다란 폭풍을 몰고 올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진위와 관계없이 선택의 무게는 막중하다. 수없이 많은 진실과 거짓이 흐르는 시대, <피노키오>가 선택의 가치를 어떻게 그릴지 궁금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리라.
 
진실의 호도, 끔찍한 공포의 시대


이 드라마에는 상반된 가치를 가진 두 방송국이 등장한다. YGN과 MSC. 이웃집 청년의 착각에서 일어난 폭풍을 부추긴 것은 송차옥(진경)이 이끄는 MSC다. “그래서 내자는 거야. 독하니까. (…)넣으라면 넣어! 기호상은 부하대원 아홉 명을 사지로 몰고도 책임을 피하겠다고 도망 다니는 파렴치한이야. 저 가족들은 그 파렴치한을 도와주고 있는 공범들이고! (…)시청자들한테 먹히는 건 팩트보다 임팩트야. 소방대원이 아홉이나 죽었어. 그 원망을 들어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게 무리한 화재진압을 실시한 기호상이야.” YGN 기자 송차옥은 정황과 의심, 억측으로 발생한 대중의 분노를 부추긴다. 사실 전달을 위해 애써야 할 보도국에서 왜곡된 관점으로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도 무서운 일인데, 고의적으로 특정 인물에 대한 분노를 유발시키는 것은 그 이상의 공포다. “그걸 왜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데!” 어린 재명(신재하)의 외침은 아무에게도 가 닿지 않고, 하명(남다름)은 달걀을 맞는다. 자극적 편집과 고의적 묵살을 무기로 한 옐로 저널리즘이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다는 사실은 잊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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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 SBS

 

반면 답답할 정도로 보도의 표준을 지키는 방송국 YGN도 있다. “99%라… 팩트가 되기에 1%가 모자란 거 너도 인정하는 거네. 기호상이 살아있다고 단정하지 마. 파렴치범이라고 매도하지도 말고. 기호상이 경찰에 잡히고 모든 게 밝혀질 때까지 아무 것도 예단하지 말고 팩트만 내. 안 그럼 분노가 엉뚱한 데로 튀어.” 감정적 보도를 자제하고 사실만을 내라 말하는 영탁(강신일)의 말은 차옥의 말과 대비돼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린다.


하지만 여론과 불쾌한 호기심은 한 끗 차이다. 루머가 자극적이고 저열할수록 대중의 관심을 끌고 살이 붙은 소문은 진실과 멀어진다. 사람들의 혀끝에서 하명의 죽은 아버지는 죄를 짓고 책임을 피해 도망 다니는 비겁자가 되고, 달포의 높은 성적은 컨닝과 시험지 절도의 결과가 된다. 즐겁게 떠들어대는 가십은 그저 씹기 위한 것일 뿐, 누구도 진실에 대해선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한 비극은 우리가 사는 이 공포의 시대를 실감케 한다.
 
당신은 무엇을 믿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피노키오>가 말하는 신뢰는 흥미롭다. 전작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수하와 혜성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한 것은 신뢰였다. 혜성이 수하가 타인의 마음속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시작될 수 있었고,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혀서라도 자신을 구하고 싶다는 수하를 이해하고 믿었기에 혜성은 자신의 몸을 던져 수하의 칼을 막았다. <피노키오>에서는 좀 더 다양한 ‘믿음’이 등장한다.


인하의 믿음은 눈에 띈다. 단 한 번도 대답이 없었던 엄마에게 10년간 문자를 보내며 인하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다. 엄마가 자신의 메시지를 꼬박꼬박 받아보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바보냐? 너 그 번호가 진짜 엄마 번호라고 생각해?” 딱한 듯 되묻는 달포의 말에도 인하는 굴하지 않는다. “비꼬지 마. 왜 너도 아빠도 엄마를 뺑덕어멈으로 못 만들어 안달인데? (…)실망할 일 절대 없어. 너랑 아빠가 어떤 말로 엄마를 모함해도 난 절대 안 믿으니까.” 인하의 믿음은 차라리 맹신에 가까운데, 순수한 믿음은 무지(無智)에서 가능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엄마와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자체가 인하를 지탱해줬을 테지만, 잘못된 믿음은 어쨌든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인하는 직접 전화를 해서 사실을 확인하는 대신 그저 엄마가 자신의 문자를 볼 거라 믿었다. 그 믿음은 인하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고 그녀의 세계에 안정을 주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위해, 인하는 진실 대신 믿음을 선택한 셈이다. 그 대가로 인하는 처참한 절망과 좌절을 맛본다.


허나 더 큰 문제는 내 잘못된 믿음이 타인에게 파급될 경우다. 송차옥의 행보는 본인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뿌리 깊은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웃집 청년은 비오는 날 스쳐지나간 어떤 남자를 어렴풋이 보고 기호상이라고 확신한다. 피노키오 환자는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는 믿음으로 사람들은 기호상의 생존을 확신하고, 결국 대중의 그릇된 믿음은 한 가족을 박살낸다. 단 한 마디 증언 때문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결과다. 기자들은 사실 검증엔 아랑곳 않고 떠들어댔고, 다수의 대중은 그를 의심 없이 믿어버린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책임이다. 자신의 눈을 과신한 사람도, 확인 없이 허위 사실을 유포한 미디어도, 다수의 이름으로 횡포를 부린 대중도 이 비극에 일조했다. 가족이라는 아름답고 완전한 모양의 사과를 모두가 한 입씩 깨물어 박살낸 셈이다. 하지만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아니,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난타당한 하명의 가족은 이미 풍비박산 났고 한두 줄의 정정보도로는 비극을 되돌릴 수 없다. 차옥을 만난 달포가 울컥해 묻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절대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옵니까, 어떻게 남의 인생을 그렇게 쉽게 단정해요. 지금까지 그 상식으로 얼마나 많은 인생을 오판해왔습니까 그것도 기자라는 사람이!” 인하로 시작된 대화는 자연스레 하명 자신의 일로 흐르고, 인하에게 당위성을 찾아주려던 질문은 차옥에 대한 분노가 된다. 달포는 이 사건에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데, 차옥의 혀끝에 가정이 박살난 피해자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드라마는 달포의 입을 빌어 시청자들에게 되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믿겠습니까? 그것을 왜 믿으려 합니까? 스스로의 소원이나 바람이 아닌, 타당한 근거가 있습니까? 당신의 신념은 대중의 무지나 아집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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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 SBS

 


“그 피노키오 증후군인 목격자가 본 게 착각이었다는 점이 이 비극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경찰과 검찰, 기자들은 그 목격담을 믿었다는 게 문제겠죠.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의 증언은 그 무엇보다 확고하니까요. 기호상씨가 사망한 채로 발견된 건 유감이지만,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운이 아주 나쁜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책임을 물을 사람이 없다고요. 사람들은 피노키오가 진실만 말한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사람들은 기자도 진실만 전한다고 생각해요. 피노키오도 기자들도 그걸 알았어야죠. 사람들이 자기 말을 무조건 믿는다는 거, 그래서 자기 말이 다른 사람들 말보다 무섭다는 걸 알았어야 합니다. 신중하고 또 신중했어야죠. 그걸 모른 게 그들의 잘못입니다! 그 경솔함이 한 가족을 박살냈어요. 그러니 당연히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4화, 가장 흥미로운 장면을 꼽자면 이 장면이었을 터다. 인하와 달포는 처음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긴장감은 치솟는다. 피노키오 증후군 환자에서 기자로 옮겨가며 말의 무게를 다루는 대사는 탁월하다. 드라마는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피노키오 증후군 환자든 거짓을 말해선 안 되는 기자든 말의 무게는 엄청나다는 것을 단 한 장면으로 설명한다. 왜 피노키오 증후군이라는 가상의 질환을 만들었는지, 기자에 대해 다루는지 바로 이해할 만한 전개다. 전작에서 이미 본 효율적이고 명쾌한 흐름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아끌고, 장면마다 던지는 주제는 흥미롭고 숙고할 법하다. <피노키오>가 점점 더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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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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