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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티스트보다도 완벽한 귀환, 에픽하이

에픽하이 8집 <신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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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접근도 가능하며 음악적인 측면으로 분석해보는 것 또한 재미있다


에픽 하이(Epik High) < 신발장 >

 

굳이 신경을 쓴 건 아닌데 문득 돌아보니 방 한켠엔 그들의 정규 앨범이 한 장도 빠짐없이 꽂혀있더라는, 느낌으로 말하자면 에픽 하이는 그런 팀이었다. 데뷔작 < Map of The Human Soul > (2003)부터 6집 < [e] >(2009)에 이르기까지 큰 슬럼프나 기복이 없는 준수한 퀄리티를 유지했고, 중간중간 걸작이라 엄지를 번쩍 치켜들만한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YG와의 계약 이후 잠시 휘청댔던 < 99 > (2012)가 시행착오 혹은 쉬어가는 타임 정도로 치부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그들이 쌓아놓은 음악적 신뢰 덕분이었다.

 

 

믿어주는 이들을 위한 절치부심이었는지, 아니면 전작의 혹평을 의식해서였는지, 이번 앨범은 '그들다움'의 탈환에 초점을 맞췄다. YG 뮤지션들의 대거 개입으로 본연의 궤도를 이탈했던 전작과 달리, 1집의 초심을 되짚는 듯한 「막을 올리며」로 포문을 열며 싸매 놓았던 자신들의 창작력을 일거에 꺼내 보인다. 가녀린 스트링 사운드와 둔탁한 비트 사이를 가로지르는 비장한 래핑. 바로 우리가 그리워하던 그 에픽 하이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색감의 러닝타임, 비트와 랩이라는 기본 요소에 충실한 프로듀싱이 흡사 4집 < Remapping the Human Soul > (2007)을 닮아있다. 앞서 언급한 「막을 올리며」나 미리 적어둔 가사 없이 프리스타일로 1절을 채운 격정적인 우울의 「Amor fati」, SNS와 언론의 폐해를 낱낱이 파헤친 「Lesson 5(타임라인)」 등 날 선 사운드와 메시지가 대중들의 청각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더블 타이틀 곡인 「헤픈 엔딩」과 「스포일러」는 에픽 하이식 러브송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헤픈 엔딩」은 백미다. 현과 건반의 유려한 만남 위로 건조하게 떠도는 조원선의 보컬은 마치 어떤 영화의 OST처럼 이별의 이미지를 정확히 구현하며 전보다 넓은 세대로 그 공감대를 뻗쳐 나간다. 이에 반해 「스포일러」는 사람간의 헤어짐에 대한 타블로 개인의 감정이 테마다. 데모 성으로 녹음해 두었던 가이드 보컬을 그대로 가져다 쓴 후렴은, 유난스럽게 느껴질 만도 한 예민한 정서를 듣는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 이처럼 같은 노선의 노래라도 명확한 경계를 둔다. 한 트랙도 허투루 작업하지 않았다는 일종의 성명서다.

 

만약 랩에서 흥밋거리를 찾고 싶은 이들이라면, 바로 「Born hater」로 커서를 맞추면 된다. 빈지노와 버벌진트를 디스하는 타블로, 그런 타블로를 디스하는 빈지노의 대립이 특히 인상적인 이 곡은 신진 세력의 패기와 베테랑의 노련미가 잘 어우러지며 앨범의 척추와도 같은 역할을 도맡는다. 「부르즈 할리파」 역시 숨가쁘게 달려 나가는 트랩 비트에 좀처럼 뒤쳐지지 않는 세 중진들의 대결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좋은 힙합'임과 동시에 '좋은 음악'을 만들 줄 아는 베테랑의 기운이 감지된다.

 

에픽.jpg

 

제작 당시 슬럼프였던 미쓰라의 비중이 작은 점은 옥에 티다. 여러 곡에서 그만의 중후한 목소리는 부재중이다. 작사 란엔 그의 파트너 이름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점도 래퍼로서의 저평가를 야기할 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 뮤직의 상승세 아래에서 데뷔 10년이 넘은 대선배가 이 정도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이다. 특히나 이슈제작엔 탁월할 지언즉 매력적인 정규작 제작에는 인색한 지금 세대의 래퍼들에게 있어 큰 자극이 될 만하다. 결국 뮤지션이 남는 지점은, '라임'이나 '플로우', '스웩'이 아닌 작품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정서적 접근도 가능하며 음악적인 측면으로 분석해보는 것 또한 재미있다. 라디오 프렌들리 하면서도 장르가 가지고 있는 강성의 발언권 또한 꽉 쥐고 놓지 않는다. 다양한 표정이 있기에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한 점으로 모여 그들의 음악에 열광한다. 여러 레전드들을 떠올리며 가만히 되새겨 본다. 특정 장르가 가진 한계라는 것은, 결국 그 장르의 최적화된 구현이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그리고는 모두가 인정하는 팝의 궁극적 형태로 나아간다는 명제를 말이다. 힙합으로 힙합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낸 그들은 그래서 2014년의 히어로일 수밖에 없다. 자신한다. 어느 아티스트보다도 완벽한 귀환이다.

 

 

 

 

 

글/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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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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