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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훔친 마음, <제보자>

2005년 줄기세포 스캔들을 소재로 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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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의 <제보자>는 그럼에도 그 강직한 마음의 표정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화법은 꽤 믿음직하고 설득력 있다. 하지만 끝내 설득되었느냐는 질문에 모두 만족스러운 답을 할 수 없을지는 모른다.

희한한 일이다. 나 스스로는 온전히 내 마음의 주인인 것 같지만, 내 마음은 시시각각 바뀌는 표정처럼 순식간에 주인을 바꾼다. 스스로 비겁하다고 느끼지만 용기를 내면 아주 많은 것을 잃어버려야 하고, 동정심을 마음 한켠에 품고 있지만 내 욕심을 위해서는 마음을 등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 반면 양심이라 불리는 마음의 표정은 꽤나 강직한데, 그 강직한 마음의 표정을 끝내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임순례 감독의 <제보자>는 그럼에도 그 강직한 마음의 표정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화법은 꽤 믿음직하고 설득력 있다. 하지만 끝내 설득되었느냐는 질문에 모두 만족스러운 답을 할 수 없을지는 모른다.   




윤민철(박해일)은 방송국 시사 교양 프로그램의 PD이다. 그에게 제보가 들어온다. 인간배아줄기세포 복제 성공으로 유명해진 생명공학계의 영웅 이장환(이경영) 박사의 연구 발표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복제 성공한 줄기세포도 없고, 논문 역시도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제보자는 이장환 박사팀의 팀장으로 일하다 최근에 탈퇴한 심민호(유연석)라는 사람이다. 제보의 신빙성을 의심하던 윤민철은 결국 사건을 파헤치고, 심민호의 말처럼 이장환 박사의 거짓말 뒤에는 거대한 조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장환 박사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훨씬 더 크고 단단하게 결속된 조직이 뒤를 받쳐주고 있다. 그들은 묻는다. 진실이냐, 국익이냐?  


줄거리만 봐도 알겠지만 임순례 감독의 <제보자>는 2005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우석 박사’의 스캔들을 소재로 한다. 벌써 10년 전 사건이라 희미해진 부분도 있지만, 국민의 영웅에서 사기꾼으로 전락한 한 인물과 국가가 기만당한 희대의 사기극의 충격은 여전하다. 실화를 소재로 했고, 논쟁이 될 만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제보자>의 최대 장점은 호들갑을 떨지 않고 묵묵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에서 격한 이야기를 하지만, 감정의 과잉을 최대한 자제해온 임순례 감독의 차분한 연출력과 늘 사회적 문제가 되는 화두를 깊이까지 고민하는 철학은 영화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박해일은 늘 피곤에 절어 있지만, 진실을 향한 눈빛만을 살아있는 PD 역할을 제대로 해 낸다. 인기 급상승 중인 유연석 역시 내면의 갈등에 빠진 제보자 역할을 기대한 만큼 잘 치러낸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인물은 이경영이다. 최근 아주 많은 영화 속에서 그를 볼 수 있지만 ‘또 이경영?’이 아니라 ‘역시 이경영!’이라는 감탄을 자아낼 만큼 그의 연기는 영화 속에서 날을 세워 살아있다. 


제보자.jpg


황우석 사건은 여전히 재판이 진행 중이고, 사건의 전말은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다. 희대의 사기극으로 단정 지은 사람들도 많지만, 여전히 줄기세포와 황우석에게 희망을 걸고 그를 믿고 지지하는 후원회의 활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명예훼손 등의 법적 분쟁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는 아주 민감한 사항이 벌어질 수도 있다. 아주 오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명량>의 경우, 예상치 못하게 배설 장군의 후손인 경주 배씨 문중이 사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바 있다. 누가 봐도 황우석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제보자>가 “본 영화는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픽션임을 밝힙니다”라는 고지와 함께 시작되는 이유다.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실화가 주었던 충격과 선입견 사이에서 이건 픽션이라며 선긋기를 하는 순간들을 보인다. 이를 위해 임순례 감독이 택한 방법은 ‘사기사건’이라는 이슈를 뒤로 미루고, 그 이슈가 숨긴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언론인의 의지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도가니>, <부러진 화살>, <변호인> 등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들이 사건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사회의 불합리함을 고발하고, 사회적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 것과 달리 <제보자>은 ‘진실 찾기’라는 주제를 위해 ‘황우석 스캔들’을 소재로 사용하면서 조금 뒤로 물린다.


영화는 픽션을 강조하면서 조금 더 극적인 순간들을 만들어 내고, 인물들의 성격도 입체적으로 조각해 낸다. 임순례 감독은 이장환 박사에게도 인간적 고뇌를, 양심에 따라 제보를 한 심민호에게도 내면의 갈등을 허락한다. 고민 없이 진실만을 향해 뻗어나가는 유일한 사람은 언론인 윤민철 한 사람 뿐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언론인의 자세, 언론의 역할, 그리고 그 태도에 대해서 강직한 얼굴을 좀 가져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나 박진감 넘치는 커트와 다양한 앵글이 영화에 조금 더 흥미로운 상업성을 씌운다. 그런데 이상하다. 화두는 명확하고, 주제도 단선적이고 설득력 있지만, 마음이 동요하진 않는다. 언론과 정권의 유착관계와 그 거짓들 사이에서 기만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에 종종 답답한 한숨을 쉬게 되지만, 이미 한국사회의 병폐들이 이미 정점을 찍고 나락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지금, 조금 더 결정적인 한방을 날려줬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이 감정은 <제보자>라는 영화에 대한 아쉬움이라기보다, 당최 신뢰할 수도 믿어지지도 않는 언론의 행태와 답이 보이지 않는 한국사회에 대한 울분 때문이다. 누구라도 속 시원한 해답을 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기도 하다. 


함께 보면 좋을 영화, <인사이더>


마이클 만 감독의 <인사이더>는 담배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이라는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더욱 강한 사회적 이슈를 담아내기 위해 영화는 수많은 담배회사와 사람들의 실명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담배산업을 주축으로 언론과 기업의 유착관계, 기자와 정보원 사이의 뒤엉킨 관계 속으로 깊이 침투한다. 어렵게 취재한 뉴스가 언론과 담배회사의 유착관계로 방송을 할 수가 없게 되자 사표를 던지고 떠나는 알 파치노의 행보에는 비장함이 넘친다. 그는 스스로 <CBS>의 내부 사정을 <뉴욕타임즈>에 밀고하는 인사이더가 되어 자신의 인사이더인 와이갠드를 지켜낸다. 그의 행동은 우직하게 진실을 지키려는 고집이기도 하다. 마이클 만 감독의 <인사이더>는 개인을 영웅으로 만들어 감동을 주려는 욕심을 최대한 자제하고, 진실에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방법으로 내밀한 설득력과 긴장감을 유지한다. 2시간 45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이 무리 없이 설득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진실로 가는 길은 그토록 길고 장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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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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