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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포매니악.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

섹스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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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경마장 가는 길>의 영화화는 원작자, 감독, 배우가 모여 재미없는 이야기를 최대한 재밌게 만들고자 시작한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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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있지만 장선우 감독은 이명세, 박광수 감독과 더불어 90년대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흐름을 몰고 왔다는 평가를 얻었던 영화인이다. 감독이 본격적으로 비평과 흥행의 안착점에 도달한 것은 90년작인 <우묵배미의 사랑>부터인데, 이후 태흥 영화사의 대표 이태원에게 전화를 걸어 한 작품 같이 하자고 제안한다. 제작자가 아니라 감독이. 처음 장선우 감독이 들고 온 소재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생애였다. 이태원 제작자는 읽어보고는 이야기를 듣곤 더 재밌는 걸 갖고 올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반발작용인가? 물러간 장선우 감독은 ‘더 재미 없는 것’을 갖고 돌아왔다. 하일지 작가의 소설인 경마장 가는 길』이었다. 받아 들고 읽기 시작한 이태원 제작자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한다, 드럽게 재미없는데 두껍기까지 하다’며 책을 덮어버렸다. 하지만 하일지 작가가 영화화 각색에 참여해서 멀쩡히 개봉까지 한 거 보면, 정작 제작과정은 순탄히 진행됐었나 보다. 배우 문성근의 경우에는 영화화 소식을 듣자 당장 소설을 사다가 읽으며 남주인공 R은 자신이 해야겠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즈음 신기하게도 장선우 감독이 먼저 캐스팅 전화를 걸어 왔다고 하니, 어찌 보면경마장 가는 길』의 영화화는 원작자, 감독, 배우가 모여 참 재미없을 수 있는 이야기를 최대한 재밌게 만들고자 시작한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성근아, 너 뭐 하니. 너 요새 할 일 없지? 책 한 권 읽을래?"

"무슨 책이요?  경마장 가는 길』이요? 이미 읽었습니다."

"그래. 재미없지? 너 나랑 그거 같이 해볼래?"

 

<경마장 가는 길>은 2시간 18분동안 ‘유부남’ 프랑스 유학파 박사 R (문성근) 이 귀국해서 가짜 박사학위 취득자이자 프랑스에서 관계를 유지했던 J (강수연) 에게 색정증 환자마냥 한 판 하자고 달려들고, J는 살살 뺀다는 이야기다. 줄거리가 그것뿐이냐고? R의 아내 (김보연) 와 이혼으로 실랑이를 한다든가, 소설을 쓰고픈데 아이디어가 고갈된 R이라든지, 소소한 이야기가 좀 있다. 그러나 전체 줄거리는 놀랍게도 정말 그뿐이다! 2시간 20분동안 그저 ‘하네 마네’ 한다고!

 

두 사람은 프랑스 유학 중에 익힌 수많은 지식들과 에둘러 말하는 표현법과, 외국어를 이용하며 매번 다르게 이야기 하지만, 언제나 ‘나는 너와 하고 싶다’와 ‘난 싫은데?’ 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들은 심지어 매번 보긴 하지만, 서로 이용하는 사이이기도 하고 또 지겨워 해서 ‘당신하고 있으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 얘기할 정도다. 여기서 관객들은 원래 대구에 살지만 서울에 자주 올라와서 끊임없이 섹스를 요구하는 R의 집요함에, 어떤 날은 좋다고 하면서 모텔 앞에 가서는 안 가면 안 되냐고 되묻는 J의 밀고 당기기 실력에 혀를 내두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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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은 자신과의 섹스를 거부하는 J에게 화를 내며 말한다. “너의 이러한 태도의 이데올로기는 뭐냐?” 이 말은 영화판에도, 하일지 작가의 원작에도 있는 말이다. 뭔.. 섹스하는데 이데올로기를 따지냐 싶기도 해서 되게 웃음이 나오는데, 소설과 영화 모두 90년과 91년에 발표됐다. 순간, 아.. 저 때는 모든 것들에다 이데올로기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던 시대였구나 싶어 뭔가 살짝 섬찟했다. 물론 지금도 딱히 나아진 건 없지만.

 

주변부를 비추는 카메라. 혹은 주인공을 외면하는 카메라.

 

<경마장 가는 길>은 그래서 재미지다. 이 작품은 충돌을 즐긴다. 사람의 본능적이며 세속적인 감정들과, 이와 상관없이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여러 학문적 지식과 용어, 논리적 설명들이 충돌한다. 여기서 이뤄내는 효과가 범상치 않다. 우리가 느끼는 가장 본능적인 욕망들이 논리, 지식 등과 만났을 때 그 낯선 정서는 당혹스러움이 되고, 심지어 유머까지 창출된다. 그리고 그에 맞춰 카메라도 독특하게 반응한다. 

 

유영길 촬영감독의 손길이 닿은 <경마장 가는 길> 속 세상은 스테디캠을 통해 물 흐르듯 유유히 넘나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R과 J의 대화만이 거의 주가 되는 작품에서, 카메라가 가끔 두 사람의 얼굴을 외면하고 다른 곳을 촬영해 관객에게 당혹감을 준다. 이게 참 기이하다. 언뜻 보면 촬영감독의 카메라조차 결국은 ‘한 판 하자’라는 의도만 계속 돌려서 말해대는 두 사람의 대화가 지겨워서 시선을 딴 데 돌린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이런 태도는 장선우 감독이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지향점과 맞는 부분도 있다. 장선우 감독은 1983년에 서울영화집단을 통해 <열린 영화를 위하여>란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열린 영화’가 무엇인지를 정의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야기꾼이 된 카메라가 사건의 중심보다는 사건의 변두리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며, 버려진 곳을 기웃거리고, 눈부신 것을 웃어가며 우리를 들뜨게 할 것이며, 아름다운 것들로 바꾼다’ 였다. 장선우 감독은 <우묵배미의 사랑> 을 만들 때는 도시 빈민층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변두리’에 관심을 가졌다. <경마장 가는 길>에서는 그 관심의 수단이 카메라로 옮겨간 셈이다. 

 

R과 J의 실랑이로부터 시선을 옮긴 카메라는 그들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무심하게 비춰준다. 자식에게 호통치는 어머니, 장사 하는 사람들, 술 취한 사람들이나 등산해서 풍경을 보며 감탄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스크린에 다양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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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많이 짜증나 보인다. 세상에 너무나 다양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모텔이나 등의 폐쇄적인 공간 안에만 들어앉아 ‘한 판 하고 싶다, 하기 싫다’ 로 소모적인 논쟁만을 펼치는 두 주인공을 보는 것에 질린 듯 하다. 카메라의 이런 기능은 마치 작품 속의 또 다른 주인공 같은 느낌을 줬으며, 이것은 한국영화계에서 전례가 없었던 시도요, 답이었다. J만 바라보던 R이 뭔가에 홀린 듯 깨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도, 풀리지 않던 소설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카메라처럼 마침내 자신의 변두리를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보고 나니 R은 여전히 ‘많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경마장 가는 길>의 끝이었고, 한국영화는 장선우라는 감독에 의해 일상의 단면을 극영화로 끌어들여도 관객이 드는 가능성을 터득하게 된다. 실제로 이 작품은 꽤 흥행이 됐다. 그러나 장선우 감독은 이후에 두 번 다시 이 작품과 같은 형식의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미국 유학을 갔다 온 홍상수 감독이 극장에서 감상하던 중에 ‘한국에서도 이런 영화를 만드는구나’ 며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가 <경마장 가는 길>의 형식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게 된다. 

 

장선우 감독은 이후로도 바깥으로 돌고 있었다. ‘변두리’를 보겠다는 의지는 꾸준했지만, 감독으로서한 가지 형식만을 깊게 파기엔 그는 지나치게 자유로웠으며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하는 듯 했다. 자유는 안정을 담보로 하는 것 아니던가. <경마장 가는 길> 역시 불확실성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그 덕분에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되지 않아서, 23년이 지난 지금 봐도 여전히 신선한 구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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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홍준호

네이버(에서 전혀 유명하지 않은)파워블로거, 대학졸업생, 딴지일보 필진, 채널 예스에서 글 쓰는 사람. 혼자 작품을 보러 다니길 좋아하고 또 그런 처지라서 코너 이름을 저렇게 붙였다. 굳이 ‘리뷰’ 라고 쓰면 될 걸 뭐하러 ‘크리티끄’ 라고 했냐 물으신다면, 저리 해놓으면 좀 고상하게 보여서 사람들이 더 읽어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거 보시는 분들 글 마음에 드시면 청탁하세요. 열과 성을 다해 써서 바칠께요. * http://sega32x.blog.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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