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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울리고 머리를 깨우칠 『조선총독부』

위대한 역사 소설은 사서(史書)를 뛰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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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출신 소설가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역사는 객관적 사실에 집착함으로써 진실에 가까이 가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반면 오히려 역사소설이 내면세계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 유용할 수 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조선총독부』는 역사서에는 기술되지 않은 인간 내면을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위대한 역사소설은 사서(史書)를 뛰어넘는다!’


역사소설 애독자는 불후의 명작을 읽은 다음 울렁이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이런 감탄사를 내뱉으리라. 이 감탄사를 역사학자가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진실을 추구하는 사실과 허황한 허구일 뿐인 소설을 감히 비교하느냐!”며 얼굴을 붉히지 않으랴. 소설 애독자는 “기술자(記述者)의 입맛에 따라 왜곡되거나 부실한 사료로 얼키설키 짜깁기한 역사서에 비하면 작가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역사무대가 시대상황을 더 정확하게, 감동적으로 전달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터!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류주현 작가


묵사 류주현柳周鉉, (1921~82)의 대하 역사소설 『조선총독부』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들이 겪은 신산한 삶, 심장이 뜨거운 독립투사의 치열한 투쟁, 친일파 인사들의 카멜레온 같은 변절 행태, 한국인들에 철권을 휘두르는 조선 총독의 횡포 등을 웬만한 역사서보다 훨씬 정확하게, 실감나게 그려놓았다.


이 소설은 월간 ‘신동아’의 복간호인 1964년 9월호의 ‘간판’ 작품으로 연재되기 시작하여 ‘신동아’ 1967년 6월호까지 34회 연재됐다. 200자 원고지로 매회 160매였으니 모두 5,300매 분량이다. 잡지 연재가 끝날 무렵 5권짜리로 나온 이 책은 내용이 보완돼 원고 분량이 7,000매로 늘어났다.


1931년 11월에 창간된 종합교양잡지 ‘신동아’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 직후인 1936년 9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었다가 28년 만에 부활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역사학자 천관우는 ‘신동아’ 주간을 겸임했는데 소설가 류주현이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소설’을 완성할 것을 기대하면서 『조선총독부』 집필을 권유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삽화가 김세종 화백의 삽화도 소설 내용을 살아 꿈틀거리는 선으로 실감나게 묘사해 숱한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연재 당시에 잡지가 발매되면 일본에서도 일본 외무성이 일본어로 번역해 조야 유력인사들에게 배포할 정도로 주목의 대상이 됐다. 책이 나온 직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독서인구가 적었던 당시에 5만 질이나 팔리는 베스트셀러 신화를 이루었으며, 한국에서 출판된 직후 일본의 최대출판사인 고단샤가 일본어판을 출판할 만큼 일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이어 라디오 낭독, TV드라마, 영화 등으로 재탄생하면서 가히 ‘조선총독부 붐’을 불러 일으켰다.


『조선총독부』의 시대 배경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부터 해방을 맞던 1945년까지 50년 가까운 격동기 한국의 현대사이다. 무대는 한반도는 물론 일본, 만주, 중국, 동남아까지 망라했다. 연인 사이인 주인공 청춘남녀 박충권과 윤정덕만 가공인물이고 나머지는 실존인물들을 실명 그대로 등장시켰다. 총 등장인물 1,700여 명, 주요 인물만도 100여 명인 대작大作이다. 고종황제, 김구,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윤봉길, 이광수, 최남선, 여운형, 이완용, 송병준,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등 근현대사 인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다.


주인공 박충권은 열혈 독립투사로 안중근, 윤봉길을 연상시키는 청년이다. 그의 애인 윤정덕은 조선총독부 고관 집에 가정부로 일하면서 기밀을 빼내는 미모의 여성인데 작품 속에서는 실존인물 배정자와 함께 자주 등장한다. 작품을 집필한 동기와 과정에 대한 저자 류주현의 목소리를 그의 ‘자서’自序를 통해 들어보자.

 

 인간이란 때로는 형편없이 당돌한 경우가 있다. 알피니스트를 보면 6척 미만의 체구로 태산泰山에 도전한다. 그것은 슬기보다 야심이며 천품의 재능이 아니라 정상을 향한 당돌한 도전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작가가 아니라 알피니스트의 자세였다. 빈대를 잡기 위해서 절간에 불을 질렀다는 고사가 있다. 1919년 봄, 내 조부의 50칸 집은 원인 모를 화염에 휩싸였다. 나중에 화인火因이 밝혀졌다. 조부가 반일 항거의 과격파라고 해서 앙심을 품은 어느 일경日警이 집에다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고 했다.

 

나는 그 2~3년 후에 태어나, 세 살 때에 실향 유랑민이 된 어머니의 등에 업혀 서울로 올라왔다. 성장한 나는 작가가 됐다. 도전할 산봉山峰을 찾다가 조선총독부라는 거대한 대상과 부딪쳤다. 붓을 들고 여러 번 망설였다. 한라산 산록에 서서 그 우람한 산세와 아득한 정상을 보는 것처럼 좌절감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그러나 나는 써야 한다고 스스로를 매질했다. 당돌한 도전이지만 한 작가로서 필생의 작업으로는 조선총독부만큼 우리에게 처절하고 또 경건한 ‘인간의 역사’가 달리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 수법이 조선총독부라는 거대한 주체를 대상으로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수용함으로써 인물 개체보다는 그 집단과 행적에다 앵글을 잡고 실존 인물들을 실명 그대로 등장시키는 모험을 피하지 않았다. 작품의 의도는 처음부터 명확하다. 1900년 초, 대한제국 멸망의 전야로부터 시작해서 1945년 일본제국이 멸망하는 순간까지의 우리 시공에 군림했던 조선총독부와 일본인과, 그리고 한국인과 한민족에 관련된 동서양 여러 나라 여러 민족을 대상으로, 현대의 잔혹하고 슬픈 ‘인간의 역사’를 부릅뜬 눈으로 응시하고 파헤치고 형상화하는 것과 비장한 씨름을 했다.

 

조선총독부


역사소설을 읽는 이유로 흔히 흥미, 감동, 역사 공부 등 3요소를 꼽는다. 그런 점에서 『조선총독부』는 이들 요소를 모두 충분히 갖추었다. 역사학자 겸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던 홍사중은 작가 류주현과의 대담에서 “얼마나 흥미진진했던지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통독했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조선총독부』는 역사서에는 기술되지 않은 인간내면을 파헤친 점이 특장이다. 겉으로 드러난 팩트만을 서술하고 해석하는 게 역사 기술의 한계인 반면 역사소설은 등장인물의 고뇌, 욕망 등 내면세계도 파헤쳐 역사를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한ㆍ일 관계는 다시 갈등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2002년 한ㆍ일 월드컵대회 공동개최 이후 일본에서의 한류 바람 덕분에 양국 관계가 한동안 부드러워지더니, 2012년 마지막 조선 총독의 손자인 극우파 정치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재집권하면서부터 삐거덕거린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조상이 받았던 비참한 고통을 되풀이하는 벌을 받는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의 교훈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우치게 하는 경구이다. 한ㆍ일 문제의 슬기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한국인들은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참 모습대로 알아야 한다. 독도 및 종군위안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반일 시위를 벌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조선총독부가 한반도를 얼마나 처절하게 수탈하고 당시에 살아간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참담한 일상을 살았는가를 제대로 확인하고,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이에 대해 무지하면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기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류주현의 『조선총독부』를 김세종의 삽화와 함께 다시 살린 것은 세월이 흘렀어도 이 작품의 문학적ㆍ역사적 가치가 여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원고를 새 편집체제로 탈바꿈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편집진은 때때로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하는 환상에 빠졌다. 그만큼 몰입했으며 사명감을 가졌다. 불후의 명작 『조선총독부』가 ‘국민 소설’의 반열에 올라 널리, 오래 읽히기를 소망한다. 가히 가슴을 울리고 머리를 깨우칠 거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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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1 류주현 저 | 나남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침략기구였던 통감부와 총독부를 중심으로 그 잔학한 침략과 수탈상을 묘사한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쓰는 긍지 높은 이념을 가진 가상의 인물(박충권과 윤정덕)이 등장하지만 둘을 제외하고는 실존했던 인물의 이름을 사용하여 현실감을 높였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약 2,000여 명에 이르는 등장인물, 한국ㆍ일본ㆍ중국ㆍ동남아에 이르는 광범한 무대, 입체감 있는 사건 배치로 한국 역사를 조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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