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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의 재발견

SEATTLE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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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니들과 커피를 대신할 무엇. 그것을 찾아 시애틀 안팎을 누빈다. 도시의 새로운 명소를 발견하고 섬과 국립공원을 탐험하는 시애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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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몬트 브루잉 컴퍼니(Fremont Brewing Company)를 포함해 시애틀 곳곳에 들어선 브루어리는

동네 주민의 쉼터이자 문화 공간이기도 하다.

 

ATTRACTION & MORE


새로운 명소


공기 중에 한기가 가시고 햇살은 눈부시다. 시애틀에 드물게 찾아오는 완벽한 봄날이다. 우기에서 건기로 넘어갈 무렵인 시애틀의 봄 날씨는 얄궂기 짝이 없다. 2~3일만 머물다 보면 방수,방풍 재킷이 외출 필수품이라는 것과 어쩌다 화창한 아침 하늘을 봐도 섣불리 들뜨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쉽게 터득하게 된다. 그러니 오늘 같은 날, 평소엔 얌전하던 시애틀라이트(Seattleite, 시애틀 사람)가 반팔에, 맨발로 살짝 호들갑을 떤다 싶어도 이해해주자. 지금 그들에게 찰나의 봄날을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게다가 여행자에게도 날씨는 공평하지 않은가!


2년 전이었다면, 이 행운의 날을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에게 바쳤을 것이다. 1962년 세계박람회를 위해 지은 시애틀의 ‘에펠탑’은 빌딩 숲과 워터프런트(Waterfront), 유니언호(Lake Union) 등 사방으로 탁트인 전망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다. 맑은 날에는 4,392미터의 눈 덮인 마운틴 레이니어(Mt. Rainier)까지 보인다. 하지만, 최근 비행 접시에 올라타는 것보다 그 아래 머무는 즐거움이 커졌다. 2012년 5월, 스페이스 니들 바로 옆에 오픈한 치훌리 가든 앤드 글래스(Chihuly Garden and Glass) 때문이다.

 

이곳에는 미국 유리 조형 예술가인 데일 치훌리(Dale Chihuly)의 작품 세계가 약 300제곱미터 대지에 재현돼 있다.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이나 샌프란시스코 드영 뮤지엄 등에서 볼 수 있는 작품과 비교해보면 놀라운 규모지만, 그가 이곳 워싱턴 주 출신임을 생각하면 되려 당연해 보인다. 강렬한 원색과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치훌리의 작품이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자연광 아래. 갤러리 안 〈밀레 피오리(Mille Fiori)〉나 〈페르시아의 천장(Persian Ceiling)〉 같은 유명 시리즈 앞에선 큰 감흥이 없다가도 실내를 벗어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붉고 노란 꽃이 핀 거대한 온실의 유리 천장 너머로 찬란한 햇살이 비출 때, 색색의 설치 작품이 야외 정원과 어우러질 때, 치훌리의 작품은 생명력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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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워싱턴 주 최대의 봄 축제인 스카짓 밸리 튤립 축제.
올림픽 국립공원에서 가장 큰 호수인 크레센트 호.

현지인과 여행객 모두가 사랑하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산후안 섬에서 도시와는 또 다른 일상을 경험해보자.


“정원에 심은 꽃은 수시로 바뀌어요. 몇 주 전과 오늘의 정원은 같은 듯하면서도 완전히 다르죠.” 홍보 담당자의 말이다. 라벤더의 연보라색과 치훌리의 오렌지 색이 이루는 조화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녀가 정원 한쪽에 놓인 새까만 구형 설치물을 가리킨다. “이 정원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예요. 그 안에 비친 스페이스 니들이 보이죠?” 꽃 속에 파묻힌 검은 공에 맞은편 전망대가 그림처럼 담겨 있다. 이게 바로 시애틀의 새로운 랜드마크 중 하나다.


여행객이 시애틀 센터(Seattle Center, 스페이스 니들, EMP 뮤지엄 등이 모여 있는 종합문화공간)의 뉴 페이스에 한눈 팔려 있는 동안 현지인은 최신 유행을 좇아 밸러드(Ballard)로 간다. 도심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 동네는 19세기 중반 최초의 유럽 이주민 거주지였다. 실스홀 만(Shilshole Bay)에 둘러싸인 밸러드는 오랫동안 스칸디나비아의 어촌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오늘날 밸러드는 시애틀 최고의 힙스터 플레이스로 꼽히는 캐피톨 힐(Capitol Hill)의 사촌 격이다. 가로수가 우거진 밸러드 애버뉴(Ballard Avenue)를 따라 트렌디한 레스토랑과 바, 카페가 속속 문을 열고 있다. “평일 밤이면 나이트라이프를 즐기려는 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요. 단, 교통 체증과 주차난을 각오해야죠.” 시애틀 관광청에서 일하는 에밀리 캔트렐(Emily Cantrell)이 몸서리를 치며 말한다.


아시안 음식부터 멕시칸, 캐러비안 스타일에 이르는 시애틀의 미식과 현지 예술가의 작품을 판매하는 몬스터(Monster)처럼 개성 넘치는 숍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 소규모 브루어리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3년간 이 지역에 문을 연 브루어리만 10여 곳. 덕분에 더치 바이크 컴퍼니(Dutch Bike Co.)에서 대여하는 7인승 컨퍼런스바이크스(ConferenceBikes)는 밸러드 내 브루어리를 돌아보는 투어 수단으로 인기다. 더치 바이크 컴퍼니는 네덜란드산 자전거를 판매하고, 자전거 대여와 수리까지 겸하는 전문점으로 2007년 처음 이 동네에 터를 잡았다. “왜 밸러드냐고요? 글쎄요. 이토록 매력적인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겠어요!” 이곳 토박이인 직원 트래비스 모건(Travis Morgan)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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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어리 투어와 다양한 크라프트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레드훅 브루어리

 

COFFEE & MORE


커피 이외의 마실 것


시애틀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커피를 즐기는 건 아니다. 물론,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만. 커피를 안 마시는 현지인을 2명째 만나고 나서야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 깨진다. 사실, 이 지역에는 커피 말고도 마실 게 많다. 1980년대 유럽식 수제 맥주가 처음 등장한 곳이 태평양 연안의 북서부 지역이고, 캘리포니아의 뒤를 잇는 미국 최대의 와인 산지가 바로 워싱턴 주다.


우딘빌(Woodinville)의 레드훅 브루어리(Red Hook Brewery)에 들어서니 왁자지껄 활기가 가득하다. 주방에선 맥주잔이 가득 담긴 쟁반이 쉴 새 없이 나오고, 사람들은 신나게 먹고 마신다. 바와 테이블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들어찼다. 이곳은 시애틀 최초의 마이크로브루어리 중 하나다. 스타벅스 공동 창립자인 고든 보커(Gordon Bowker)와 워싱턴 와인업계의 폴 십먼(Paul Shipman)이 손을 잡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 1981년. 밸러드와 프리몬트(Fremont)를 거쳐 우딘빌에 자리를 잡은 지 올해로 10년째다.


“지금 마신 건 롱 해머 아이피에이(Long Hammer IPA)예요. 레드훅에서 세 번째로 만든 맥주죠. 적당한 쓴맛과 이 지역에서 재배한 홉 특유의 향을 느낄 수 있어요.” 시음이 끝날 때마다 투어를 맡은 밸러리 해킷(Valerie Hackett)이 설명해준다. 현재 이곳에서 생산하는 맥주는 총 스물네 가지. 그중 절반쯤 되는 맥주를 앞에 두고 과연 다 맛볼 수 있을까, 아니 그 맛을 온전히 음미할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왠걸. 한 모금만 마셔도 전혀 다른 주종이라 해도 될 만큼 차이가 극명하고, 유독 입에 착 감기는 맥주를 찾는 일도 예상외로 쉽다.

 

이곳에서는 매일 브루어리 투어를 진행하는데, 연간 방문객이 4만 명에 이른다고.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건물 밖에 주차해놓은 자전거와 사이클링 복장으로 맥주를 즐기는 이들이다. 시애틀에서 우딘빌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는 투어가 있다고 해킷이 귀띔한다. 페달을 밟으며 기분 좋게 땀을 낸 뒤 들이켜는 맥주 1잔(혹은 여러 잔)이라니! 나만의 맥주는 찾았지만, 최고의 맥주 시음법을 놓쳐 안타까울 따름이다.


“시애틀과 가깝다는 게 우딘빌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그러고 보니 키트 싱(Kit Singh)의 말에 백 번 수긍이 간다. 시애틀에서 차로 30분, 자전거로 1시간. 맥주든 와인이든,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나들이 삼아 방문하기에 딱 좋은 거리다. 싱은 우딘빌에서 로런 애슈턴 셀러스(Lauren Ashton Cellars)를 운영한다. 우딘빌은 원래 와인 투어로 유명한 지역. 130여 개 와이너리와 테이스팅 룸, 와인 셀러가 모여 있는데, 캐스케이드 산맥(Cascade Range) 일대에서 생산한 와인을 이곳에서 맛볼 수 있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워싱턴 주를 동서로 가르는 캐스케이드 산맥은 워싱턴 와인 재배의 핵심이다.


“해발 2,000미터의 산맥 덕분에 내륙 쪽은 기후가 시애틀과는 완전히 달라요. 비가 적게 오고 건조하죠.” 싱도 산맥 동쪽 야키마 밸리(Yakima Valley)에 와이너리를 갖고 있다. 그는 우딘빌에 터를 잡으면서 자신의 와인을 좀 더 많은 이에게 알릴 수 있게 됐고, 사람들은 차로 2시간 30분을 달려 와이너리까지 가는 수고를 덜었다.


최근 브루어리와 와이너리에 이어 새로운 시음 트렌드가 하나 더 추가됐다. 위스키나 보드카를 시음할 수 있는 디스틸러리(distillery)가 하나 둘 생겨나고 있는 것. 글래스 디스틸러리(Glass Distillery)도 2년 전 시애틀의 산업 지구인 소도(SoDo)에 테이스팅 룸을 열었다. 워싱턴 주의 포도를 베이스로 이 지역만의 보드카를 탄생시킨 것이 이곳의 특징. 시애틀의 유리 공예를 적용한 보드카 병도 이색적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증류 시설이 있는 공간까지 일반인에게 개방한다. “와인이나 맥주 시음은 이미 익숙하잖아요. 증류소는 어떻게 생겼는지, 보드카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 인기가 좋죠.” 크리스틴 하워드(Kristen Howard)의 말대로 확실히 새롭긴 하다.


보드카를 한 모금 들이켜자 목을 타고 뜨거운 무언가가 훑고 내려간다. 그러고 나서도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얼굴을 찡그리길 여러 번. 하워드가 웃음을 터뜨린다. 과연 보드카 초보자가 이런 순간을 몇 차례씩 견디며 시음을 즐기는 게 가능할까 의문이 들긴 하지만, 독주 애호가나 남들과 다르다는 걸 뽐내고 싶은 이에겐 괜찮은 장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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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어에 몸을 맡긴 채 숲을 가르는 지핑 투어.
오른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자연 채광을 최대한 활용해 설계한 팬 퍼시픽 호텔의 로비.
로런 애슈턴 셀러스는 우딘빌의 유명 와인 셀러 중 하나다.
피패치 내 자신의 텃밭을 가꾸고 있는 주민.
푸드 뱅크는 피패치 이용자가 기부를 목적으로 운영하는 또 하나의 공동 텃밭이다.

 

 

GREEN & MORE


친환경 그 이상


시애틀에서 머문 호텔 3곳의 세 가지 공통점. 객실 전원은 카드 키로 공급하지 않는다(즉 모든 조명이 자동으로 켜지지 않는다). 수건과 침구는 투숙객이 요구하면 교체한다. 일회용품 비중이 적다. 과연 이게 호텔의 서비스 정신에 맞는 거냐고? 약간의 불편도 반복되면 익숙해지는 법. 게다가 옳은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뿌듯함이 덤으로 따라온다.


“전기 사용을 최소화하고 호텔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건 기본입니다.” 북미 최초로 그린 글로브(Green Globe) 인증을 받은 호텔인 팬 퍼시픽 시애틀(Pan Pacific Seattle)의 라이언 크로스비(Ryan Crosby)는 말한다. 그린 글로브는 지속 가능한 관광을 위한 국제 인증 제도로, 단순히 친환경 흉내만 내서는 받기 어려울 정도로 조건이 까다롭다. 물과 에너지 절약, 운영비 절감, 지역사회와 환경에 대한 공헌도까지 평가하기 때문이다.


크로스비가 화려한 무대의 뒤편으로 안내한다. 호텔 관리자 구역에 들어서니 쓰다만 비누와 버려진 어메니티가 커다란 바구니에 나뉘어 있다. 이것들은 각각 클린 더 월드(Clean the World, 재활용 비누를 빈곤층에 나눠주는 환경 단체)와 벨타운(Belltown)의 YMCA로 보내진다. 세탁물은 친환경 세탁업체로 향할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미니바를 포함한 객실 내 소모품은 현지 브랜드와 오가닉 제품을 선호하고, 남은 음식은 지역 단체에 기부하며 직원들은 정기적으로 지역 행사에 자원 봉사자로 참여한다. 팬 퍼시픽 시애틀의 친환경 시스템은 지역사회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시애틀은 지구를 위해서라면 불편함과 지출을 기꺼이 감수하는 열혈 환경운동가 같다. 도시 환경의 질을 높이는 데에도 정부와 지역사회, 시민 모두 적극적이고 자발적이다. 시애틀 고유의 도시 농업인 피패치(P-Patch)는 그 대표적인 예. “피카르도 농장(Picardo Farm) 소유주가 처음 토지를 지역민과 공유하면서 공동 텃밭의 개념이 생겨났어요. 피패치라는 이름도 거기서 따온 겁니다.” 맞춤형 시티 투어를 제공하는 에버그린 이스케이프스(Evergreen Escapes)의 가이드 제프 카터(Jeff Cater)가 설명한다.


현재 시애틀 도심 곳곳에 87개의 피패치가 있다고 한다. 관리를 맡고 있는 정부 부서에 신청하면 일정 기간 땅을 임대하게 된다. 대기자가 엄청나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누구나 손쉽게 텃밭을 가질 수 있는 셈. 크기도 모양도 제 각각인 도심 텃밭에서는 꽃, 채소, 과일이 고루 자란다. 누군가 땅을 환원하고, 또 다른 이는 그 땅을 가꾸고, 수확물의 일부는 다시 사회에 기부한다. 이 공동 텃밭이 도시인을 위한 훌륭한 개인 정원이라고 감히 단언해도 되지 않을까? 피패치가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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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동부터 가지 끝까지 온통 이끼로 덮인 올림픽 국립공원의 온대 우림.

이곳은 미국 내에서 강수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OUTDOOR & MORE


클래식과 트렌디 사이의 아웃도어 액티비티


릭 스티브스(Rick Steves)는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가 아니다. 처음 그를 알게 된 건 이탈리아 친퀘테레에서다. 다섯 마을 중 하나인 베르나차(Vernazza)를 소개하던 현지 가이드는 ‘릭 스티브스가 가이드북에서 극찬하면서 널리 알려진 곳’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딱 1년 뒤 시애틀 근교의 소도시 에드먼즈(Edmonds)에서 다시 그의 이름을 듣는다. “혹시 릭 스티브스 알아요? 에드먼즈가 그의 고향이죠. 아직 이 동네에 살아요.” 대런 구야즈(Darren Guyaz)가 친근하게 말을 붙인다. 1980년대 유럽 가이드북을 출판한 스티브스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작가다. 하지만 우리를 올림픽 국립공원(Olympic National Park)으로 안내할 가이드는 유럽 전 문가인 스티브스가 아니라, 이 지역 전문가 구야즈. 미 서부의 서쪽 끝에 있는 올림픽 반도(Olympic Peninsula)로 가기 위해 에드먼즈에서 페리를 탄다.

 

흔히 미국의 국립공원 하면, 거친 사막과 어마어마한 협곡, 기암괴석 등 광활한 서부의 풍광을 떠올린다. 같은 서부에 있지만, 올림픽 국립공원은 어느 곳과도 같지 않다. 빙하와 산맥, 황량한 해변, 미국에서 강수량이 가장 많은 온대 우림이 공존하며, 한 세기를 넘겨 생명력을 과시한 수목과 희귀 동식물이 있고, 옛 전통을 지켜온 아메리카 원주민 8개 부족의 보호구역이 있다. “1,000년 수령 이상의 고목이 있는 곳은 전 세계에서 몇 안 돼요. 뉴질랜드, 파타고니아, 일본 그리고 아마 여기가 전부일걸요.” 구야즈의 말을 듣고 보니 차창 밖 도로 양옆으로 가득 들어찬 키 큰 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크레센트 호(Lake Crescent) 주변에 있는 우림도 올림픽 국립공원 내 오래된 숲 중 하나다. 메리미어 폭포(Marymere Falls)까지 1.6킬로미터의 짧은 하이킹을 즐길 수 있는데, 그 입구부터 전혀 다른 세상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끼를 두른 나무가 초록색 털 뭉치 같은 가지를 늘어뜨리고, 진흙 길 주변엔 양치식물이 빽빽하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스미는 햇살 아래 빗줄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이한 풍경. 열대우림과 달리 가문비나무, 솔송나무, 미국 삼나무 등 침엽수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도 독특하다.


사실 시애틀 면적의 10배에 이르는 국립공원을 하루 만에 돌아보기란 불가능하다. 구야즈가 말한다. “4~5일 공원 안에 머물면서 둘러봐야 제대로 볼 수 있어요. 그러려면 여름철이 제격이고요.” 굳게 닫힌 레이크 크레센트 로지(Lake Crescent Lodge) 앞에서, 안개가 자욱한 호숫가에서 이곳의 여름을 상상한다. 야생의 자연에서 즐기는 오지 캠핑부터 빙하호를 누비는 카야킹, 해발 1,500미터에 오르는 트레킹까지.


올림픽 국립공원이 클래식한 아웃도어 액티비티라면, 카마노 섬(Camano Island)에서 즐기는 지프라인(Zipline) 투어는 트렌디한 레포츠에 가깝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설치한 와이어를 타고 공중에서 이동하는 지 프라인은 최근 2~3년 사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시애틀에서 1시간 떨어져 있는 카미노 섬에 있는 캐노피 투어스 노스웨스트(Canopy Tours Northwest)도 2011년에 문을 열었다.


“Breathtaking Adventure!”라는 홍보 문구를 보는 순간, 말 그대로 숨이 턱 막힌다. 나는 사방이 뚫려 있는 고지대는 극도로 꺼리는 데다, 스릴이라면 돈 받고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950제곱미터에 이르는 개인 소유지에 설치한 6개의 지프라인 중 가장 긴 것은 무려 200미터. 그래도 어쨌거나 도전이다. 순식간에 끝난 첫 번째 지핑(Zipping) 이후 후들거리는 다리가 진정된다. 한 번, 두 번 계속할수록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생긴다. 무섭기만 한 것도, 짜릿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높은 곳에 올라 숲을 내려다보고, 이동하는 동안 자연을 관찰한다. “거의 매일 지프라인을 타지만, 풍경은 하루도 같지 않아요. 이런 직업을 갖는다는 건 정말 행운이죠.” 나뭇잎 빛깔이 지난주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허클베리가 언제쯤 열리는지 세심하게 설명해주는 크리스(Chris)를 보며 그의 말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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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산후안 제도의 풍경

 

ISLAND & MORE


아일랜드 라이프


“고래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몰라요. 끝내 못 볼 수도 있죠. 그들에게 GPS가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생명체잖아요?” 캡틴 피트(Pete)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콕 박힌다. 그저 고래를 꼭 보고 말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랄까? 더 웨스턴 프린스 Ⅱ(The Western Prince Ⅱ)호는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긴 채 산후안 섬(San Juan Island)을 출발해 바다로 나선다. 물론, 이 배는 ‘웨일 워칭(Whale Watching)’에 관한 한 전문가다. 캡틴 피트로 말할 것 같으면, 2001년부터 이 투어를 진행해왔다. 동물학자인 선원들은 이 지역 야생동물과 생태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예정 루트가 있지만, 어디서든 고래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수하면 캡틴은 즉시 방향을 틀 것이다.


이른 아침 프라이데이 하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유니언호에서 수상비행기를 타고 시애틀 북쪽으로 40분을 날아가면 산후안 제도(San Juan Islands)가 나온다. 워싱턴 주와 밴쿠버 아일랜드(Vancouver Island) 사이, 세일리시 해(Salish Sea)의 수많은 섬과 암초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이름이 붙은 섬만 172개에 이르는데, 그중 프라이데이 하버가 있는 곳은 산후안 섬.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에 순응하는 이곳의 일상은 도시와는 다른 속도로 흐른다. 한적하고 고요한 풍경, 느긋한 사람들, 강한 생명력을 간직한 야생이 그렇다. 이름하여 ‘아일랜드 라이프’. 도시에 사는 이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산후안에 살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시카고에서 태어나 애리조나 주에서 자란 애런 록(Aaron Rock)은 작년 가을 섬 주민이 되었다. 그는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호텔 프라이데이 하버 하우스(Friday Harbor House)의 셰프다. 원래 시애틀로 이사할 생각이었으나, 산후안이 지닌 가능성과 자연 환경에 반해 이곳을 커리어의 전화점으로 삼았다. “봄과 여름이면 섬 내 식자재가 풍성해집니다. 메뉴의 90퍼센트 이상을 현지 재료만으로 만들 수 있어요. 푸드 마일은 80킬로미터 이내로 제한하죠. 제겐 정말 신선한 도전이에요.”


섬에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도시는 당일 여행이 가능한 거리에 있다.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자전거를 타거나 하이킹을 할 수도 있고, 카야킹, 낚시 같은 해양 스포츠도 다양하다. 그래도 섬의 즐길 거리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단연 고래 관찰이다. 투어 보트가 항구를 출발하자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하늘이 구름을 거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범고래는 끝내 보지 못했다. 눈 앞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뛰어오르는 대형 고래 말이다. 수면 위로 살짝 빠져 나온 자그마한 알락고래의 등을 꽤 먼 거리에서 보긴 했다. 대신에 바위 위에서 일광욕 중인 바다사자, 해안가에서 헤엄치는 바다표범, 가파른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오르는 산양과 야생 염소가 수시로 모습을 드러냈다. 크고 작은 섬 사이를 가로지르며 원없이 바닷바람을 맞았다. 3시간을 훌쩍 넘긴 투어가 끝난 뒤에도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처음 캡틴 피트의 말을 듣는 순간, 고래가 이 투어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챘기 때문이다.

 

 

표영소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조지영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사진가다.

 

 

 


론리플래닛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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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ely planet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 6월 안그라픽스 편집부 | 안그라픽스
외국에서 지내다 보면, 일정이나 비행기 탑승 시간 등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나 혼자만 현지에 남는 경우가 생긴다. 이미 오랜 외유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진 터라 귀국한다는 마음으로 들뜬 사람을 혼자 배웅하는 기분은 썩 좋을 리 없다. 혹시 현지인에게 박대라도 받는다면,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다 찢어질 때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울 마음이 가득한,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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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론리플래닛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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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만나는 황홀한 순간

『보보스』, 『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 신간. 날카로운 시선과 따뜻한 심장으로 세계와 인간을 꿰뚫어본 데이비드 브룩스가 이번에 시선을 모은 주제는 '관계'다.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와 만나는 순간을 황홀하게 그려냈다. 고립의 시대가 잃어버린 미덕을 되찾아줄 역작.

시는 왜 자꾸 태어나는가

등단 20주년을 맞이한 박연준 시인의 신작 시집. 돌멩이, 새 등 작은 존재를 오래 바라보고,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시선으로 가득하다. 시인의 불협화음에 맞춰 시를 소리 내어 따라 읽어보자. 죽음과 생, 사랑과 이별 사이에서 우리를 기다린 또 하나의 시가 탄생하고 있을 테니.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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