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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들려주는 근대 계몽기의 역사

‘고미숙의 근대성 3부작’ 출간을 기념 저자 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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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근대성 3부작’ 작업이 마무리됐다. 『계몽의 시대』 『연애의 시대』 『위생의 시대』 3권으로 이루어진 이번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근대 계몽기에 이 땅에서 발생한 변화를 추적한다.

작가만남-고미숙

 

철도의 등장, 근대적 시공간을 재단하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한국의 근대와 만났다. 『계몽의 시대』를 시작으로 『연애의 시대』 『위생의 시대』로 이어지는 ‘근대성 3부작’을 완성한 것이다. 그동안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 평전 1탄』 등의 저서를 발표하며, 조선의 고전을 두루 조명했던 그녀이기에 이번 ‘근대성 3부작’ 작업은 색다른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근대를 재해석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10여 년 동안 이어져온 것이다.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나비와 전사』 『이 영화를 보라』 세 권의 책 모두가 그 시간들 속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이상의 세 작품을 바탕으로 “주제의 밀도는 높이고 독자들과의 소통회로는 넓히자는 취지에서” 각각의 주제별로 엮고 새롭게 다듬은 끝에 ‘근대성 3부작’을 완성시켰다. 그렇다면 왜 근대인가. 근대를 조명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디지털 문명이 고도화되면 ‘근대성’이라는 테마는 시효가 다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21세기가 되어도 사람들의 의식은 놀라울 정도로 20세기에 갇혀 있었다. 어떤 점에선 더더욱 긴박되었다. 하여, 근대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 하에 이 ‘근대성 3부작’을 출간하게 되었다. (『계몽의 시대』 9쪽)

 

‘근대성 3부작’의 시작을 알리는 『계몽의 시대』는 이 땅에 근대성이 처음 싹을 틔운 시기-1894년 갑오개혁에서 1910년 한일병합까지의 ‘근대 계몽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시기에 출현한 변화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 이 시기에 문명과 국구의 첨병으로 활약한 신문들, 예컨대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은 생생한 증언을 들려주는 사료(史料)로써 활용되었다.

 

 이들 사료는 『연애의 시대』에서도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다만 같은 것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다른 곳에 머무를 뿐이다. 『연애의 시대』에서 고미숙 평론가가 찾고자 하는 것은 근대계몽기 국민들의 성과 사랑, 그리고 여성성이다. ‘근대적 여성성과 사랑의 탄생’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를 이어 떠오른 주제는 ‘위생’이다. 공중위생의 개념이 등장하고 그러한 인식이 사람들에게 내면화되기까지의 과정이 『위생의 시대』 안에 담겨있다.

 

작가만남-고미숙

 

지난 6월 13일 저녁, ‘고미숙의 근대성 3부작’ 출간을 기념한 저자 특별 강연회가 열렸다.   이 날 고미숙 평론가는 두 시간 동안의 강연을 통해 『계몽의 시대』 『연애의 시대』 『위생의 시대』 에 담긴 ‘근대 계몽기의 변화’들을 간추려 독자들에게 전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근대 계몽운동의 바탕이 된 시대적 배경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의 국제 정세와 조선의 상황이 근대 계몽운동 탄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계몽운동들이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 시기 근대 계몽운동의 핵심은 언문일치 운동과 국채보상 운동이에요. 언문일치 운동은 역사, 지리, 문학 등 모든 것이 민족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구성되는 계기가 되었죠. 그 결과 민족주의가 힘을 얻게 되었고, 결국 식민지 투쟁의 동력이 되었어요. 국채보상운동은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동일시하면서, 노동을 국민의 최고 의무로 인식하도록 만들었죠. 노동을 찬미하는 문화가 생겨난 거예요. 이렇듯 노동을 신성한 의무로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당시에 전파된 기독교의 영향도 커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강조하는 것이 노동이잖아요. 결국 20세기는 민족과 노동, 기독교로 이루어진 틀 안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저자는 근대적 시공간이 구성된 역사를 추적하며 ‘기차’에 주목했다. 기차의 등장이 가져오는 ‘지리적 환경의 변화’와 ‘삶의 방식의 변화’는 고미숙 평론가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강원도 광산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녀가 직접 체험한 것이었다.

 

“산촌 오지에 광산이 열리면서 산업이 시작된 거예요. 제일 먼저 철도가 건설됐죠. 그 험준한 산들을 잇는 철길이 생겨난 거예요. 시공간의 배치가 완전히 달라진 거죠. 그러자 마을에 병원이 들어섰고, 광부들의 사택과 목욕탕이 생겨났어요. 저도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리곤 했죠(웃음). 이제 사람들 사이에 위생의 개념이 발생한 거예요. 학교에서도 용의검사를 하고 백신 접종이 이루어졌죠. 위생과 병리학의 기초가 마련된 시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점차 신체와 질병에 대한 인식을 내면화하게 됐죠. 마을 내 학교들의 숫자도 증가했는데, 당시 한 반 정원이 60여 명 정도였어요. 인구 폭발이 일어난 거죠. 또 한 가지 마을에 생긴 변화가 있다면 교회와 성당이 들어섰다는 거예요.”

 

작가만남-고미숙

 

성 에너지가 화폐로 전환되는 시대


이렇듯 철도가 운행되고 학교와 병원, 교회가 들어서는 변화는 1907년부터 이 땅에 시작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러한 틀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덧붙였다. 그 사이 사람들에게는 ‘육체의 치료는 병원에서, 영적인 치료는 교회에서’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아갔다. 고미숙 평론가가 세계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이러한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갔다. 그런 까닭으로, 저자는 한국의 근대를 공부하며 자신의 성장 과정을 반추하고 이해할 수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젊은 날 자신이 가졌던 ‘사랑과 성에 대한 관념’에 대해 질문을 품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 봤어요. 일부일처제가 법제화 된 이후, 이 제도의 유지를 위해 성욕을 제한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 거죠. 그러면서 여성의 혼전순결을 도덕적인 척도로 반강제하게 된 거예요. 사람들이 혼전순결을 내재화하는 데에는 ‘기독교적인 성의식’이 영향을 미치기도 했죠. 그런데 과연, 성 에너지의 문제를 간과해도 되는 걸까요? ‘성 에너지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 한 사람의 실존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요. 국민총생산이 늘어났는데 미혼 남녀 역시 증가했다고 한다면, 과연 잘 사는 걸까요? 조선 시대에는 13세 전후에 혼인을 했지만 지금의 결혼적령기는 30대 중반이에요. 이런 현상을 보면 성 에너지가 돈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돼요. 청춘의 에너지를 학교나 직장에 쏟은 대가로 화폐를 얻은 거죠.”

 

이렇듯 혼전순결을 도덕과 연결시키는 현상이 공고해진 데에는 대중문화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혼전순결을 지키는 여성은 고결하고 그렇지 못한 여성은 타락했다는 식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이 근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는 까닭이다. 3.1 운동 이후 발표된 이광수의 연애 소설에서도 이러한 ‘근대적 연애담론’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현재의 멜로드라마들도 이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제가 고전을 공부하면서 임꺽정을 보고, 동의보감을 보고, 판소리를 봐도, 예전에는 성이 금기어가 아니었어요. 춘향이가 첫날밤 보내는 대목만 보더라도 알 수 있죠. 변강쇠 타령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연됐어요. 그때는 성이 생활과 결합이 되어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 공적인 담론에서 성이 사라지면서, 여성들의 성은 극도로 억압되고 이중적인 잣대로 평가받게 된 거예요.”

 

작가만남-고미숙

 

고미숙 평론가가 ‘계몽’과 ‘연애’ ‘위생’을 단서로 들려준 근대의 이야기가 끝난 후, 강연회를 함께한 독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지금 학생들의 공부는 기능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부가 끝난 뒤 취업을 하면, 자본에 종속되어서 소모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고요. 이러한 삶과는 다르게 살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일단 청년기에 해야 될 일은 기초를 터득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20대 후반에 대학에 졸업하고 대기업에 간다고 해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만족한 삶이라는 건 일과 그 대가로 받는 화폐, 그리고 일하는 시간 외에 취미 활동을 하는 시간들이 조화를 이루는 거예요. 그래야 ‘나는 지금 보람차게 살고 있어’라고 느낄 수 있죠. 그런데 지금 우리는 노동을 하면서 ‘이게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인가, 이 일이 나를 배우고 느끼게 해 주는가’라는 의문이 계속 드는 거예요. 과연 나를 총체적으로 끌어 올려주는 일인지, 의심이 드는 거죠.

 

그래서 일하는 시간 외의 시간은 재충전의 시간으로 활용해야 돼요. 문화, 예술 등을 통해서 영성을 추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죠. 인간은 노동과 그 대가만으로 살지 않거든요. 영성을 추구하는 시간이 있어야죠. 그 시간이 없으면 쾌락을 추구하게 돼요. 그러면 당연히 사람의 마음과 심성은 병드는 거예요. 결국 청년기에는 인생과 우주에 대한 기본기를 익힌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모도 그런 마음으로 자식을 길러야 하고요. 20대까지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스승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스스로의 잠재력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민족주의라는 것이 수명이 다 되어서 쓸모가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대안으로써 민족주의가 제안되어야 할까요? 현 시대에 맞는 민족주의가 있다면 어떻게 제시되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근대 계몽운동이 시작된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주의가 자본과 국가를 끌어안으면서 부국강병의 이념으로 기능했죠. 그때는 국가를 잃어버렸으니까 민족이라는 대 전제가 중요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자본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으면서 민족주의를 적당히 표출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의 미래에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는 거죠. 그렇게 살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이제는 작은 규모의 네트워크 외에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간디의 ‘스와라지’ 운동이 주목을 받고 있는 거죠. 예전에는 너무 낭만적이고 물정 모른다고 외면했다가 최근 들어 다시 재조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작은 마을 단위의 네트워크를 구상하면서, 계보학을 통해서 변화의 흐름을 관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애의 시대』에서 유머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회적 구조나 자신이 갖고 있는 인식의 틀에 대항해서, 자기의 욕망을 잘 풀어나갈 수 있는 기술이 곧 유머라고 하셨는데요. 그런 기술은 어떻게 하면 익힐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미 그 질문을 듣고 여기에 계신 많은 분들이 웃었잖아요(웃음). 질문 자체가 유머러스했어요. 통념을 뒤집었거든요. 우리가 평소에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잖아요. 결국 웃음은 생각의 길을 바꿀 때 터져 나오는 거예요. 사람들은 다른 길이 있다고 느낄 때 출구를 찾게 되거든요. 출구가 없는 것은 전부 무겁고, 엄숙하고, 진지해요. 계몽의 열정도 인간의 그런 신체성에 기반한 것이었죠.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 엄숙해야 하고 진지해야 하잖아요. 그렇다보면 몸이 무거워져요. 그러면 타인을 받아들일 수 없고, 유머가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죠. 지금까지 살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의 길을 바꾸면, 거기에서 웃음이 야기돼요. 이미 그런 생각을 하신 것부터가 다른 길을 열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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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의 시대 고미숙 저 | 북드라망
’문명개화의 적’ 똥의 재발견을 통해 형성되어 가는 위생관념, 그리고 국가에 의해 관리되기 시작하는 신체와 질병의 현장으로 돌아가 오늘날 우리 시대 청결강박증의 기원을 파헤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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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시대 고미숙 저 | 북드라망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탐사하는 한국 근대성의 기원, 그 첫번째 권은 ‘근대적 시공간’과 ‘민족’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에서 근대적 지식의 토대가 구축되는 기원의 장인 근대계몽기로 돌아가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당대의 신문자료를 통해 근대성이 생성되는 현장을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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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시대 고미숙 저 | 북드라망
근대계몽기 국민으로서의 여성과 사랑이 탄생하는 현장으로 돌아가,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당대의 신문자료를 통해 그 기원을 탐색하여 새로운, 성, 사랑,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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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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