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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멍적 매력, 들어보셨나요?

완결된 『폭두방랑 타나카』를 읽으며 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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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오랫동안 나의 진짜 이상형을 누가 물으면, 부끄러워서 땅바닥을 쳐다보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곤 했다. “후멍...이요...” “후멍? 후멍이 도대체 누군데?” “그게... 그... 『멋지다 마사루』라는 만화 아세요?”

흔히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알고 싶어할 때 나누는 시덥잖은 질문들 중 흔히 이런 게 있다. “이상형이 누구예요?” 그러면 남자들이 흔히 전지현, 송혜교를 들지만 최근엔 아이유가 많아졌고 좀 특이하게 호감을 사려는 타입이라면 드루 배리모어를 말하기도 하고 난 여자 ‘아우라’ 좀 본다는 걸 어필하고 싶어하는 남자라면 모니카 벨루치를 들기도 한다. 나도 남자 ‘아우라’ 좀 본다는 여자들은 질세라 뱅상 카셀을 이야기할 적도 있지만 흔한 건 역시 장동건, 정우성, 강동원처럼 누가 봐도 잘난 남자다.

 

장동건 나오는 영화를 보다가 옆에 앉은 남자친구를 보니 웬 오징어가 보이더라는 흔한 우스개도 있지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실망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남자에 한해 눈을 확 낮추는 것으로 이런 경우에 대비했다. 게다가 장동건이나 정우성 같은 남자를 누가 싫어할까, 혹시나 그런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주위에서 그를 방어하느라 직장도 못 다닐 만큼 기운이 빠지거나 여자끼리 서로 머리칼을 뽑아대는 치정에 얽힌 추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역시 남들 다 좋아하는 것에서 살짝 비껴 서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게다가 내 주제를 알고 있으니, 이상형을 이상한다고 해서 이상형에게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말이라도 나눠 본 이상형은 딱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은 본명이 ‘이상형’ 씨였다.)

 

그렇지만 사실 정말 누구나 좋아하는 그런 남자들이 싫기도 했다. 게다가 환갑도 못 되어 돌아가신 아버지가 급환으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동안에 눈썹이 짙고 쌍꺼풀 진 큰 눈에 콧대가 뚜렷한, 초등학교 시절 학부모 방문을 오면 여선생님들이 어머 그 아빠 왔어 왜 누구네 반 알랭 들롱 아빠 있잖아, 할 정도로 미남이었다. 여기까지였다면 참 좋았을 것을, 아버지는 자신이 잘생겼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틈만 나면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시는 바람에 나는 잘생긴 남자 공포증 같은 것이 생겨 눈이 쫙 찢어지고 코가 납작하고 까무잡잡하게 좀 초라한 남자만 보면 좋아서 침을 잘잘 흘리는 부작용을 앓고 말았다.

 

어쨌거나 오랫동안 나의 진짜 이상형을 누가 물으면, 부끄러워서 땅바닥을 쳐다보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곤 했다. “후멍...이요...” “후멍? 후멍이 도대체 누군데?” “그게... 그... 『멋지다 마사루』라는 만화 아세요?” “『멋지다 마사루』 ?” 『멋지다 마사루』가 무엇인가 하니 2000년대 초반 『이나중 탁구부』와 병신적 매력계를 양분한 바 있는 전설의 작품으로 최근작으로는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라는, 약을 빨지 않고도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하고 심각한 의심을 하게 만드는 작품을 그린 우스타 쿄스케라는 만화가가 그린 도무지 장르를 알 수 없는 만화다.

 

멋지다-마사루 삐리리-불어봐-재규어 폭두방랑다나카 이나중탁구부 

 

 

주인공은 누가 보아도 제목에 나오듯 이상한 초능력을 쓰고 어깨에 희한한 금속 링을 달고 다니며 ‘애교코만도’라는 무술을 선보이는 마사루지만, 새로 전학 온 학생인 후멍(본명이 아니라 짝이 된 마사루가 ‘똥뚜껑’과 ‘후멍’ 중 별명을 고르라고 해서 똥뚜껑은 싫었기 때문에 강제로 선택당한 별명이다)은 친구 100명 만들기라는 순수한 고등학생다운 꿈을 지닌 소년인데 마사루에게 휘말리고 만다. 이후로도 후멍은 휘말리고 또 휘말린다. 마사루의 온갖 짓에 휘말려 유급을 당하질 않나, 절대로 애교코만도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휘말리질 않나,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꿈을 지녔지만 이상한 녀석들에게 결국 휘말리는 착한 소년인 후멍이 언제나 나의 이상형이었다. 휘말리면서도 결국 애교코만도를 좋아하게 되고, 애교코만도를 싫어하는 척했지만 결국 후멍도 애교코만도에 빠져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훨씬 대중적인 만화로 치자면 『슬램덩크』의 권준호, 안경 선배 같은 캐릭터라고 할까. 식스맨이지만 그 사실에 특별히 불만이 없는, 불량했던 시절의 정대만이 쳐들어와 주먹을 날렸을 때 사정없이 얻어맞을 만큼 약하지만 깨진 안경을 고쳐 쓰고 철 좀 들어라, 하고 일갈을 날릴 수 있는 남자. 『슬램덩크』의 다른 등장인물들을 봐도 역시 안경 선배가 최고다. 이정환이나 고릴라 선배는 늘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 할 것 같고 서태웅은 백발백중 게이일 테고, 강백호는 기분 맞춰주기 힘들 것 같고 정대만은 부상이라도 당해서 농구를 때려쳤다간 알콜중독에다 도박에 빠져 마누라를 팰 것 같고, 송태섭은 술 먹고 바람 피우느라 바쁠 것 같다는 것이 나의 편견이다.

 

준호 선배야말로 착실하게 농구를 하다가 관련 스포츠 업계에라도 취직해 착실히 아내를 부양할 것 같은 얌전하면서도, 상황에 휘말리는 듯하면서도 결국 자기 목소리를 내는 후멍적 남자가 아닌가. 이렇게 옛날 만화만 뒤적이다가 비교적 최근작을 보았는데, 그건 작년에 완결된 『폭두방랑 타나카』 시리즈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후멍적 남자는 타나카의 친구 무리 중 하나인 오카모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착실하게 우체국에 취직해서 오토바이를 사서 열심히 배달을 다닌다는 점도 내가 좋아하는 ‘얌전한 남자’에 부합하지만, 난생 처음 사귀어 본 여자친구가 도색물을 가리키며 선배도 저런 거 좋아해? 하고 묻자 당황하며 무슨 소리! 가슴 따위 정말 싫어! 라고 대답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후멍적이라 너무나 귀여웠다.

 

슬램덩크

 

 

그렇게 오카모토의 후멍적 매력에 슬쩍슬쩍 미소를 짓다가 등장인물 중 가장 덩치가 크고 말하는 거라든가 표정이 조금 비호감인 이노우에의 대사 하나에 가슴이 철렁, 했다. 어른이 되어 회사에 취직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고, 원치 않는 일에 하나하나 굽신거려야 하는 사실에 진절머리가 났으면서도 임신한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계속 일을 하는 이노우에는 타나카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말한다.

 

“난 말야, 어린 시절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줄 알았어...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나에게 신지, 신지, 라고 부르면서 귀여워해 주는 그런 시절이 언제까지나... ”

 

만화를 보면서 실컷 웃다가 눈시울이 뜨끈했다. 나도 그런 시절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길 원했다. 어쩌면 지금도 취직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고 있는 건 그런 어른의 시절에 확실하게 뛰어들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열등감이 마음 한 구석을 언제나 찌른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하루키의 어느 소설에서던가,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주인공이 이렇게 말하는 구절이 있다. “이 사람들은 확실히 인생의 고통이나 아름다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 나라면 『폭두방랑 타나카』의 작가는 인생의 찌질함이나 사소한 괴로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겠다. 하지만 그런 인생의 찌질하고 사소한 고통을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삶이라는 것을 알 정도는 어른이 되어 버린 나에게 휘말릴 듯 휘말릴 듯 하면서도 심지 굳게 나에게 휘말리지 않고 잘 버티는 후멍적 매력을 가진 연인이 있다면 좀더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 것도 같은 착각이 드는, 흐린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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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현진(칼럼니스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네 멋대로 해라』, 『뜨겁게 안녕』,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불량 소녀 백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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