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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마흔 살을 기대하다

JTBC <밀회>, 에쿠니 가오리 <도쿄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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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여자로 살겠다! 20대 후반 막연한 다짐을 해보았다. 그러다 30대에 들어선 뒤 사랑에 빠지는 걸 주저하는 나를 발견했다. 발을 직접 담가보지 않아도 수온과 깊이를 알아버리게 되었다고 오만을 떨기 시작했다. 이래선 죽을 때까지 여자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내가 두려움 없이 누군가 사랑하는 마음을 이어나가고 사랑 받을 수 있을까? 그런 의구심을 품던 찰라 월요일 밤 드라마 한 편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밀회>의 혜원

 

마흔 살의 한 여자가 사랑에 빠진다. 갓 스물이 된 어린 남자, 그것도 남편의 제자이다. 예술재단의 기획실장인 오혜원은 아트센터 대표라는 야심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제어한다. 긴장을 절대 풀지 않겠다는 듯 몸이 딱 달라붙는 펜슬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입고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자신을 세운다.

 

클래식 음악계로 고결하게 포장한 세계 속은 추문이 난무하고 생존을 위한 비열한 칼날이 오간다. 그 속에서 혜원은 자신을 빈 껍데기로 보면서 칭얼거리기만 하는 남편을 보필하고, 아트센터 대표이자 예고 동창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고, 호스티스 출신의 이사장에겐 고상함을 더해준다. 유아적이고 더러운 욕망의 비위를 맞춰가면서도 본인의 품격은 잃지 않고 그 자리까지 올라섰다.

 

 

밀회1.jpg

 

 

우습지도 않은 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안 좋은 일을 겪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울 뿐이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누구에게 기댈 수 없어 홀로 내 편이 되어야 하는 상황을 묵묵하게 견뎌냈다. 혜원이 이 모든 고행을 감내하는 까닭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함일 테지만 지금껏 이룬 걸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진짜 혜원의 것은 없다. 큰 목표를 위해 혜원은 자신의 욕망은 억압한 채 살아왔다.

 

이제 목표한 바를 바로 눈 앞에 두고 있는데 대책 없이 흔들리는 일이 벌어졌다. 여자로서 강렬한 욕망이 일깨우는 한 청년이 심하게 예뻐 보인다. 자신은 포기했던, 피아니스트로서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이선재. 자신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 채 오로지 혜원의 칭찬이면 만족한다는 무구한 얼굴로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해 왔다. 자신의 열망을 감추지 않은 채 혜원에게 입을 맞췄다.    

 

도쿄타워』의 시후미

 

또 한 여자가 있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미모와 교양 그리고 취향을 가진 시후미는 해외에서 직접 사온 제품을 파는 고급 셀렉트숍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친구의 아들인 토오루와 사랑을 나눈다. 토오루가 열여덟이었을 때 만나 3년째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다.

 

혜원은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선재를 제자로만 보려고 선을 긋고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버티고 있지만, 시후미는 가능성이 농후한 젊음을 가진 토오루와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언제나 한 남자로 대하고 욕망한다. 사람들이 가득한 연말 파티에서 도쿄타워를 바라보며 카운트다운을 할 때 주변을 의식해서 조심스러운 토오루에게 ‘손을 잡아주지 않는 남자는 시시하다’라고 말하는 것도 시후미였다.

 

 

시후미에게도 이 사랑은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자신이 이룬 것의 바탕에는 남편의 재력이 깔려있었다. 둘의 관계가 들통나게 된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시후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토오루 역시 열정적으로 시후미를 이룬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그녀가 읽는 소설과 듣는 음악을 통해 세상을 느끼고 배운다.

 

혜원과 시후미 그리고 <밀회>

 

마흔의 여자가 재능을 발휘하며 여전히 아름답기 위해서는 재력과 부지런함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하지만 그 둘을 갖추고 살아나가는 것이 얼마나 만만찮은 것인지 알게 되면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우아하고 품위 있는 마흔 살의 혜원과 시후미나 순수하면서도 믿음직한 남자로 격정적 사랑을 보여주는 선재와 토오루는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의 사랑은 불륜이다.


특히 둘의 관계가 모두에게 알려져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대소동이 벌어지는 순간에도 시후미와 토오루는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충실했다. 결국 시후미는 관계를 숨기면서까지 유지하던 조건을 놓아버린다. 남편과 이혼을 하고 파리 유학 중인 토오루를 찾아가 그동안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고 자신의 상황 때문에 늘 기다리기만 했던 토오루에게 먼저 다가가 사랑한다는 말을 전한다. 그의 마음이 내일 변하더라도 두렵지 않다는 듯.

 

아직 5회만 방영된 <밀회>는 혜원과 선재가 가야 할 길이 멀기에 드라마는 묘한 긴장감과 불안함 속에서 섹슈얼한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다. 미숙하고 서툴지만 억제할 수 없는 열망을 거칠게 표현하는 선재와 도로교통법을 잘 지켜야 사고가 안 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혜원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윤리 도덕의 선을 넘는 선택하며 어떤 파국으로 치닫게 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세밀한 필치와 섬세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연출이 어우러진 <밀회>를 보며 주변 반응을 살피다 보니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다.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불편함 없이 열광하며 즐기는 건 미혼의 친구들이었다. 아침드라마, 주말드라마 속의 주된 소재인 남편의 불륜은 욕하며 볼 수 있지만 아내의 입장에서 그것도 한참 나이가 어린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구현되는 드라마를 즐기는 것이 편치 않은 기혼자들이 의외로 많았다. 생활감 가득한 삶을 버티듯 꾸려나가고 있는데 아무리 드라마라 한들 파격을 꿈꾸는 자신의 욕망 스위치가 자극되는 걸 바라지 않아서 인 듯 해 보였다.

 

밀회.jpg

 

 

자신은 아름답고 우아한 오혜원이 아니고 눈앞에 이선재 같이 사랑한다는 고백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지 않게 되는 순진하고 열정적인 청년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런 현실감각은 좋다. 하지만 그동안 이혼의 경험이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연하의 직장동료라든지, 남편이 있는 걸 알면서도 좋아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그녀를 돕는 직장상사가 등장하여 여성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드라마는 꾸준하게 만들어졌다. <밀회>나 <도쿄타워>는 설정이 좀 더 극에 치달아 있지만 그것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은 비록 불륜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것이 유의미한 것은 여자로서의 욕망을 솔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을 기만하고 죄를 저질렀다는 이성적 판단에 앞서 오혜원과 시후미는 자기 안의 여자를 해방시켰다. 사회적인 기준에서는 질타 받을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그 사랑을 선택하고 빠져들었을 때는 최후, 이로 인해 모든 걸 잃게 될 미래도 감내하겠다는 결단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결심을 지지한다.


서른 중반만 넘어가도 생기를 잃기 시작한 얼굴과 탄력을 잃어가는 몸을 보며 마치 생물학적 여자는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질 때조차 많은 수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다치게 될지도 모르는 자기를 보호하느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결국 사랑하기를 포기한다. 그런데 마흔 살의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흔들리고 휩쓸려 버리지만, 어느 순간 여자로서 즐거움을 숨길 수 없는 미소로 표현했을 때 여자의 생에 필요한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주었다.


마흔을 생각했을 때 파릇파릇했던 젊음을 잃게 되는 게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스무 살 어린 애인이 유무도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할 에너지가 고갈되고 없을 까봐 그게 무서웠다. 지금 내가 여자임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해나간다면 마흔에는 좀 더 현명하고 품격 있게 누군가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현재 오혜원의 심리적 갈등과 주변의 복잡한 관계를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지만 내가 두근거리고 집중한 것은 마흔에 느끼는 두근거림. 이것이 유혹이 아니라 사랑일 것이라고 느끼는 순간의 표정이었다. 나도 그런 얼굴을 잃지 않길, 그 내밀한 열망을 충전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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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현정

사랑과 연애 그리고 섹스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며 제법 깊은 내상을 입었지만 그만큼 현명해졌으며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걸 수줍어하지 않게 되었다. 놀라운 재생능력으로 사랑할 때마다 소녀의 마음이 되곤 한다. 누군가의 장점을 잘 발견해내고 쉽게 두근거린다. 『사랑만큼 서툴고 어려운』, 『나를 만져요』 등을 썼으며, 블로그 '생각보다 바람직한 현정씨'를 운영 중이다.

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저/<신유희> 역8,100원(10% + 5%)

세련된 문체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사랑 받아온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특유의 감각적인 묘사로 도쿄에 사는 스무 살 남자 아이들의 사랑을 잔잔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더 힘든 연애를 하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더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더 많이 좋아하는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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