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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 알고 읽으면 더 재밌다

장르 키워드 사전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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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특수한 상황도 있다. 장르는 대중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도, 한국의 소설 독자는 장르를 낯설어하기도 한다. 장르 시장 자체가 너무나 척박하고 이해도도 너무 낮기 때문에.‘장르 키워드 사전’을 연재하자는 생각이 든 이유도 그것이다.

장르물은 만들기 쉽다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다. 장르의 공식이 있고, 전형적인 캐릭터와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장르의 공식을 가져와서 이야기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세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싸구려 소설, 영화가 그렇게 만들어진다. 아무 생각 없이 어디에서나 늘 보던 이야기와 인물만을 늘어놓는 소설과 영화들. 그런 장르물의 대부분은 장르에 별 관심도 없고, 그냥 장르물을 만들거나 써야 하기 때문에 양산하는 경우다. 하지만 장르의 공식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공식만으로 흥미진진한 장르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장르물을 건드리면 시시한 소설, 영화가 나온다.

 

<링>이 한참 유행이었을 때 한국에서 만들어진 공포영화가 그랬다. 신인 감독에게 저예산의 공포영화를 맡기면서, <링>에서 보던 것 같은 장면을 요구한다. 그 시절 한국의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들은 하나같이 팔다리를 이상하게 뒤틀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공포라고 오해하여, 갑자기 귀신이 튀어나오고 귀를 찢는 음향으로 관객을 짜증나게 하는 깜짝 효과로 일관했다. 그런 영화들에 지쳐 한국 공포영화 관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물론 <숨바꼭질>처럼 수작이 나오면 다시 극장을 찾지만. 한국의 공포소설도 지나치게 고어 활극에 편향되고, 전통적인 복수와 원한에 집착하다가 존재가 희미해져 갔다.

 

물론 장르는 대중친화적이다. 대중은 익숙한 이야기를 원한다. 할리우드에서 장르영화가 발전한 건 지극히 상업적인 이유 때문이다. 관객이 뮤지컬, 서부극, 갱스터, 멜로드라마 등의 익숙한 장르영화를 원하기 때문에. 지금도 마찬가지다. 영화나 소설의 제목을 들으면, 그거 어떤 장르야,를 먼저 물어본다. 액션, 사랑이야기, 긴장과 공포, 웃음 등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할리우드는 장르의 공식과 구조를 만들어냈다. 스쿠류볼 코미디라면 티격태격하는 남녀가 나와 서로 말싸움을 하며 소동이 벌어지고, 결국은 이해를 하고 사랑하게 된다. 서부극에서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악당이 있고, 외부의 영웅이 나타나 그들을 물리치고 떠나간다. 관객은 익숙한 이야기를 보면서 쉽고 빠르게 이야기에 동화되고, 빠져든다. 고민 없이, 갈등 없이 이야기에 푹 빠져드는 것이다. 그래서 장르에 기반한 상업영화가 현실을 잊어버리고 판타지에 빠져들게 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대중은 너무 익숙한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익숙하면서 자신의 기대를 어긋나고 파괴하는 이야기를 볼 때 흥분하고 희열을 느낀다. 너무 확 가버리면 낯설어하고 불쾌해 하지만, 적당히 대중의 의도를 무너뜨리면 오히려 열광한다. 너무 익숙해도 안 되고, 너무 앞서가도 안 된다. 그래서 창작자들은 익숙해 보이는 장르의 틀 안에서 교묘하게 변주를 하고, 장르의 공식 중에서 일부분만 무너뜨리는 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장르의 공식을 철저하게 이용하면서, 그 쾌감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것으로도 승부한다. <테이큰>이나 <데드 캠프> 같은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클리셰의 연속이지만, 장르영화로서는 극한의 쾌감을 안겨주는 수작이다.

 

장르소설도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르소설은 1930, 40년대 ‘펄프 매거진’이라고 불리던 <어드벤처 매거진> <어메이징 스토리즈>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 <미스터리 매거진> <디텍티브 매거진> <테러 테일즈> <호러 스토리즈> 등의 잡지에서 주로 연재되었다. 장르소설은 독자가 좋아하는 자극적이고 기이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면서 발전해가기 시작했다. 작가의 개인적인 사상이나 체험들이 작품에 녹아들어가고, 특이한 스타일에 도전하며 새로운 흐름이 나오기도 한다. 시장이 확장되면, 대중적인 작품들이 쌓이다 보면 독자의 요구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미스터리에서는 하드보일드가 등장하고, 마이크 해머 같은 폭력적인 극우 탐정도 나왔다. SF는 스팀 펑크, 사이버 펑크 등의 하위 장르로 분화되면서 더욱 더 다양해졌다. 공포소설은 H.P. 러브크래프트가 크툴루 신화를 만들었고 스티븐 킹, 클라이브 바커로 이어졌고 최근에는 좀비물이 하나의 고유 장르로 격상되었다.

 

장르물에는 분명 공식이 있다. 하지만 크게 미스터리, SF, 호러, 판타지 등으로 나뉘는 것만으로는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힘들어졌다. 이미 하나의 장르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순수한 장르는 사라졌다는 말도 오래 전에 나왔다.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판타지 미스터리 등등을 비롯하여 각 장르 내부에서 분화되고 변형되다가 어떤 계기가 생기면 좀비물처럼 그 자체가 거대한 장르를 형성하기도 한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특수한 상황도 있다. 장르는 대중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도, 한국의 소설 독자는 장르를 낯설어하기도 한다. 장르 시장 자체가 너무나 척박하고 이해도도 너무 낮기 때문에.

 

‘장르 키워드 사전’을 연재하자는 생각이 든 이유도 그것이다. 모 평론가가 <그래비티>를 리뷰하면서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개념을 오용한 것처럼, 여전히 한국에서는 장르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개념조차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장르 키워드 사전’에서는 본격 미스터리, 스팀 펑크, 오컬트 등 가장 기본적인 장르의 개념부터 크룰루 신화, 클로즈드 서클, 타임 트래블, 평행 우주, 프로파일링, 토막살인 등등 장르물에 빈번하게 나오는 공식이나 설정, 개념 같은 것들 그리고 지극히 흥미 위주의 키워드들까지 주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심에 따라 쓸 생각이다. 본격적인 사전이라기보다는, 키워드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장르 소설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도록. 지금 한국에 필요한 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고 재미있게 장르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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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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