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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말로, 사와자키, 그리고 조석

차가운 도시 남자들을 위한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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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하드보일드가 남자들의 할리퀸 로맨스라 말했다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하드보일드는 차가운 도시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을 위한 지침서에 가깝다. 하드보일드는 말한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라고. 어떤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는 본연의 모습을 갑옷처럼 두르라고. 말랑말랑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시대의 사내들에게 말로와 사와자키는 한 가닥 위안이자 로망이다.

비정한 세계를 살아가는 사내들

지난번에는 셜록 홈즈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정반대인 사내들 이야기도 좀 해야겠다. 완숙 달걀 속 노른자처럼 인생을 퍽퍽하게 살아가는 그들, 뒷골목 어둠 속에서 위안을 얻으며 담배와 위스키가 유일한 벗인 그들, 슬픔과 고독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그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죽음을 향해 농담을 던질 수 있는 그들, 바로 하드보일드 소설 속 탐정들의 이야기다. 천재 만화가 조석이 남긴 명언처럼 이 사내들은 ‘차가운 도시 남자’지만 한결같이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순정마초’들이다. 짐작하건데, 조석 또한 필립 말로와 사와자키로 대변되는 이 하드보일드 세상 속 사내들에게 큰 애정을 품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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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드보일드에 빠지게 된 건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 때문이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연애 소설인 줄로만 알고 집어든 『기나긴 이별』 이 하드보일드와의 첫 만남이었다. 『기나긴 이별』 속 필립 말로는 쉰 무생채처럼 살아가던 나를 향해 강력한 펀치 한 방을 남겼다. 말로는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유형의 남자와도 다른 사내였다. 탐정이라고는 하지만 홈즈처럼 머리를 쓰는 대신(물론 그도 추리라는 걸 하긴 한다) 어둠에 잠긴 도시 곳곳을 누비며 직접 몸을 부딪친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불어넣지도, 그렇다고 자신이 희망을 품지도 않는다. 그는 자주 위험에 빠졌으며 적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순간도 많다. 그럼에도, 자신의 ‘스타일’을 잃지 않는다.

나는 특히 이 부분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자신의 스타일. 챈들러가 건조한 문체로 묘사해 내는 말로는 변하지 않는 사나이였다. 말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고 누구 앞에서도 자신만의 말투로 자신의 신념을 펼쳐나갔다. 그에게는 배후가 없었으며 희망이 없었기에 내일 또한 없었다. 즉, 말로는 오늘, 비정한 도시의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아가는 남자였다.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늘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내가 말로라는 사나이에게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음습한 도서관의 구석구석을 돌며 말로가 나오는 소설을 모조리 섭렵했다. 『맨큐의 경제학』 과 『경영학원리』 를 공부하는 틈틈이 하드보일드 소설 속 비정한 도시 속으로, 그곳에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터프한 사내들의 곁으로 도망 다니던 나는 끝내 소설 비슷한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탐정이 되어 촌철살인의 농담으로 기선제압을 할 수는 없지만 비정하고 차가운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적어도 하나쯤은 터득한 셈이었다.


안녕, 긴 잠이여

하드보일드 소설에 대한 탐독은 졸업한 후에도, 그리고 작가가 된 후에도 쭉 이어졌다. 수많은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었지만 처음 말로를 만났을 때와 같은 깊은 감흥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후대에 나온 하드보일드 소설들은 이야기적 완성도로만 본다면 분명 챈들러의 작품들보다 세련되고 매끈했지만 꽉꽉 눌러 삶은 완숙 달걀을 물 없이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듯한 퍽퍽함은 느낄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한 그 느낌이야말로 하드보일드의 정수라 생각하는 내게는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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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사와자키’라는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일본 작가가 쓴 하드보일드 소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를 통해서였다. 사와자키는 파트너에게 버림받은 탐정이다. 파트너인 와타나베는 돈과 마약을 훔친 채 종적을 감춘다. 덕분에 사와자키는 경찰과 야쿠자 양쪽으로부터 시달림을 받는다. 그는 가족도 없고 사랑하는 이도 없으며 오로지 사건 해결을 위해 중고 블루버드를 몰고 도쿄의 도심을 누빌 뿐이다. 사와자키에게는 살아가는 이유 따위는 없다. 살아있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에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자취가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 옛날 챈들러가 구축했던 하드보일드한 세상이 지구 반대편 도쿄에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물론, 탐정 사와자키는 말로의 환생과 같은 인물이다. 작가인 하라 료가 밝혔듯, 사와자키 시리즈는 챈들러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작품이다. 나는 사와자키라는 이 중년의 일본 사내를 만나며 비로소 하드보일드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사와자키는 말로의 명대사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남자는 터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부드럽지 않으면 살 자격이 없어.”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가 번역 출간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 후속작인 『내가 죽인 소녀』 가 나왔다. 나는 곧바로 챙겨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용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사와자키가 사건을 해결할 것이므로.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하드보일드 특유의 분위기였고 말로처럼 자신의 스타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와자키라는 사내 그 자체였다. 사와자키는 『내가 죽인 소녀』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그 시절의 나는 회사원으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아빠로서도, 작가로서도 지지부진한 삶을 살고 있었다. 사와자키는 그런 내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것 봐 젊은 친구. 진짜 삶을 살아. 세월은 겨울 저녁처럼 금세 지나가 버린다고.”

최근에 나는 다시 한 번 사와자키와 만났다. 『안녕, 긴 잠이여』 라는 작품 속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와자키는 조금 변한 듯했다. 사백 일 만에 도쿄에 돌아온 그는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 지친 듯 보였고 예전보다 더 자주 담배를 피워댔다. 변한 건 사와자키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인물들, 형사와 야쿠자들도 어딘가 물러졌다. 세월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건은 벌어지고 사와자키는 자살한 여자의 뒤를 캐며 바쁘게 돌아다닌다. 더욱 짙어진 도쿄의 밤거리를. 그리고 차가운 도시의 빌딩 숲을.

『안녕, 긴 잠이여』 는 전작들에서 이어지던 일련의 사건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세기를 살아갈 구시대의 유물과 같은 사와자키의 고군분투가 예고되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늘 그렇듯 비정함과 비열함이 가득하고 그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간 군상들의 추악한 모습 또한 낱낱이 드러난다. 사와자키는 사건을 해결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셜록 홈즈가 활약하는 세계에서처럼 딱 떨어지는 결말이란 없다. 그래서 찝찝하다.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실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하련만, 하드보일드 속 인물들은 누구하나 그런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14년의 세계가 그렇듯이.


삶은, 완숙 달걀

삶은 달걀이다. 그것도 완숙 달걀. 삶이란 나를 둘러싼 퍽퍽하고 단단한 세계를 꾸역꾸역 밀어내는 과정이다. 질척질척한 어둠 속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내일’에 당도하게 된다. 그리고 곧 그 내일은 ‘오늘’이 된다. 삶은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누군가는 하드보일드가 남자들의 할리퀸 로맨스라 말했다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하드보일드는 차가운 도시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을 위한 지침서에 가깝다. 하드보일드는 말한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라고. 어떤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는 본연의 모습을 갑옷처럼 두르라고. 말랑말랑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시대의 사내들에게 말로와 사와자키는 한 가닥 위안이자 로망이다.

『안녕, 긴 잠이여』 의 마지막 책장을 덮었던 날, 나는 오랜만에 하드보일드의 분위기에 도취되어 혼자서 밤거리를 쏘다녔다. 홍대의 뒷골목을 배회하고 지하철에서도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명멸하는 빛과 어둠을 쏘아보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집까지 묵묵히 걸었다. 코트 깃을 세우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숨을 내 쉴 때마다 허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무명작가가 아니었다. 백수 아빠도 아니었다. 대출금을 갚아 나가느라 전전긍긍하는 속 좁은 사내도 아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말로가 되어, 사와자키가 되어 밤거리를 누볐다. 그리고 집의 현관문을 연 순간,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아들을 안아주며 나는 다시 진짜 ‘나’로 돌아갔다. 내 삶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아내와 아들이 내 삶이요, 내 몫의 완숙 달걀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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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전건우

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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