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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웠던 여자,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후에도 루머에 시달리는 여왕 중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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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세상의 시선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때에는 엘레오노르, 이 언니를 보라.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왕관을 쓰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자신을 욕하는 세상에서 편히 살기위해 일부러 착해지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렇다, 그녀는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것과 아이들의 미래를 챙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도 사후에도 루머에 휩쓸린 여자, 남성과 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 강화에 이용된 여자, 엘레오노르. 이 언니를 보라.

유럽 최고의 미녀, 엘레오노르

카를 오르프가 작곡한 <카르미나 부라나(보이른의 노래)>는 장엄한 합창으로 유명하다. 이 곡의 가사는 11~13세기에 구전되다 라틴어와 독일어로 기록된 중세 음유시인의 노래집에서 따 왔다. 그래서 현대 시기인 1936년에 작곡되었지만 가사를 통해 중세 서유럽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 중 10번째 곡의 가사는 이렇다.

Were diu werlt alle min                           온 세상이 내 것이라해도
von deme mere unze an den Rin          바다에서 라인까지
des wolt ih mih darben,                          난 다 버릴 수 있으리
daz diu chunegin von Engellant           영국 여왕이
lege an minen armen.                            내 팔에 안겨만 준다면.

-<카르미나 부라나> 중 10번째 곡 ‘Were diu werlt alle min’
아마 중세 서유럽인들은 영국 여왕을 유럽 최고의 여자로 여겼던 것 같다. 이 영국 여왕이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이다. 현재 프랑스 남서부에 있었던 아키텐 공국을 상속한 여공작 엘레오노르는 첫 결혼으로 프랑스 왕비가, 이혼하고 재혼하여 영국 왕비가 되었다. 타고난 미모로 가는 곳마다 추문을 뿌린 여인으로 유명하다. 도대체 얼마나 그녀가 아름다웠기에 유럽의 뭇 남성들이 온 세상보다 그녀를 차지하기를 더 원한다는 노래까지 지어 불렀을까?


에드먼드 블레어 레이튼의 [출처 : 위키피디아]

여기 한 장의 그림이 있다. 영국 화가인 에드먼드 블레어 레이튼의 라는 중세 상상화이다. 레이튼은 이 그림의 주인공을 정확히 누구라고 지적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역사 상식이 있는 서구인들은 대개 이 그림을 보고 엘레오노르와 그의 아들 사자왕 리처드를 떠올린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서구인이 엘레오노르의 외적 이미지에 대해 갖는 인식을 또 한번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늘 예찬만 받는 것은 아니다. 12세기 인물인 그녀는 사후 8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서구 역사에서 루머의 여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엘레오노르 아키텐(1122~1204)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엄격한 관습이 지배하던 중세시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남프랑스 공작령 아키텐의 상속녀이자, 프랑스 왕비였던 엘레오노르는 남편 루이 7세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원정기간 중에 그녀는 숙부인 안티오크 통치자 레이먼드 푸아티에 및 살라딘 술탄과 염문을 뿌렸다. 루이 7세와 이혼한 후에는 연하인 헨리 플랜태저넷과 결혼했는데, 이 연하남편의 숙부와도 관계를 갖고 있었다.
엘레오노르는 남편이 총애하던 정부 로자먼드를 독살했을 뿐만 아니라 헨리 왕과 결혼함으로써 영국왕비가 되었으며, 사자왕 리처드와 무지왕 존을 낳았다. 나중에 엘레오노르는 질투와 권력욕에 사로잡혀, 이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역하도록 부추겼다. 엘레오노르가 죽은 후에는 영국과 프랑스 왕가 사이에 복잡한 상속권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것은 결국 영국-프랑스 분쟁의 씨앗이 되었고, 백년전쟁(1337~1453)으로까지 이어졌다. _ 「역사의 오류, <왕비가 된 매춘부>편(pp.94~95) /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 지음 / 열음사」


위 인용부분은 엘레오노르에 대한 기존 루머를 요약해서 소개한 부분이다. 엘레오노르는 많은 역사서에 비중있게 등장한다. 기본적인 영국사와 프랑스사는 물론, 십자군 전쟁사와 기독교회사까지. 흥미와 가십 위주의 대중역사서에는 더욱 많이, 더욱 편파적인 시각으로 평가되어 등장한다.


지역감정으로 생긴 편견

아키텐의 여공작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 프랑스어: Alienor d’Aquitaine)는 1122년 경에 태어났다. 아키텐 공작과 푸아티에 백작을 겸했던 아버지 기욤 10세의 큰딸로 태어난 그녀는 남동생이 사망한 후 현재 프랑스 영토의 1/3에 달하는 광대한 영지의 상속녀가 되었다. 아버지 기욤 10세는 죽음이 다가오자 고민했다. 자신이 죽은 후, 딸이 영지를 노린 야심가들에게 납치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기욤 10세는 딸의 후견인으로 자신의 상위 주군인 프랑스 왕 루이 6세를 지명했다. 기욤 사후, 루이 6세는 기뻐하며 자신의 아들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를 결혼시켰다. 1137년, 루이 6세 사망 후 아키텐의 여공작인 엘레오노르는 15세란 어린 나이에 프랑스 왕비까지 되었다.

프랑스 서남부 대부분을 차지하던 당시 엘레오노르의 영지는 프랑스 왕령보다 더 넓고 풍요로운 지역이었으며 화려한 궁중문화를 지닌 곳이었다. 파리 중심의 북부 프랑스와 여러 모로 달랐다. 지금도 남부와 북부 프랑스 사이의 문화 차이는 매우 큰데, 방송도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의 차이는 상당했을 것이다.


프랑스 남부와 북부의 문화적 구분선 지도 [출처 :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음유시인과 궁정문학을 후원했던 남프랑스에서 자라나서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성격을 지닌 엘레오노르는 파리의 결혼 생활이 타고난 기질에 별로 맞지 않았다. 중세 음유 시인으로 이름 높았던 기욤 9세의 손녀로 태어나 호방하고 기사다운 강한 남자를 이상적인 남자로 여기며 성장한 그녀에게는 남편 루이 7세가 성에 차지도 않았다. 차남으로 태어난 루이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서 교육받다가 형이 사망하자 왕세자 노릇을 배우기 시작했기에 반은 수도승 같은 면이 있었다. 성격도 엘레오노르에 비해 나약하고 소심한 편이었다. 루이 7세는 아름다운 그녀에게 반한 반면, 그녀는 대놓고 ‘나는 수도승과 결혼했다’며 열정이 없는 결혼생활의 불만을 토로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엘레오노르의 과감한 언행은 루이 7세와 주변의 고위 성직자들, 북부 프랑스 궁정인들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결함이라기보다, 성장한 환경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 생긴, 일종의 지역 감정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성적으로 방종하고 드세고 사치스런 남프랑스 여자로 일방적으로 매도당한다. 루이 7세와 이혼하고 헨리 2세와 결혼하여 영국 왕비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잉글랜드의 대중들은 프랑스 출신 왕비보다 잉글랜드 출신인 왕의 정부 로자먼드를 오히려 더 호의적으로 보았다. 로자먼드가 병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레오노르가 독살 혐의를 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점에서 설명된다.



14세기 무렵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왼쪽은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결혼식, 오른쪽은 십자군 참전으로 떠나는 루이


2차 십자군 원정 실패의 희생양

엘레오노르가 매도당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십자군 원정 당시의 행적때문이다. 1147년, 그녀는 루이 7세와 함께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다. 화려한 차림새의 귀부인들을 동반한 그녀는 가는 곳마다 물의를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녀는 프랑스 왕비 자격으로 남편의 종군에 동반한 것이 아니라 아키텐 여공으로서, 여러 봉건 영주 중 한 제후의 자격으로 성전에 참전함을 내세웠다. 당연히 남성 영주들만 참가하는 작전 회의에도 참가해 자기 주장을 펼쳤다. 엘레오노르는 이전에 프랑스 궁정에 있을 때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과감히 행사하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와 쉬제 대수도원장 같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비판을 받은 적이 많았다. 하지만 친정에서 아버지에게 남녀차별 없는 최고의 교육을 받고 음악과 문학은 물론, 사냥과 승마까지 즐겼던 그녀에게 이런 정치와 군사 방면의 참여는 당연한 것이었다.

십자군의 목적지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도착한 엘레오노르는 작은 아버지인 안티오크 공작 레몽의 편을 들어 그에게 유리한 작전을 고집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숙부와 조카딸 사이를 불륜관계로 몰아갔다. 거듭된 전투 참패에도 불구하고, 지휘권을 지닌 루이의 무능은 묻혀졌다. 사실, 루이 7세의 십자군 참전 원인은 프랑스 국내 전쟁 중 자신이 벌인 학살과 방화에 대한 속죄였다. 그 전쟁은 엘레오노르 여동생과 유부남 백작과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교황의 파문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했다. 교회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 내는 물론 십자군 원정지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의 근원은 전부 엘레오노르였던 셈이다. 이는 자신들의 군사적 무능은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귀족 전사들이 보기에도 그랬다. 성스런 목적을 걸고 단행했기에 신의 가호를 받아 당연히 성공하리라 믿은 십자군 원정의 실패에 대한 희생양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 띈 실패의 원흉은 엘레오노르였다. 숙부인 레몽과는 물론, 이슬람 적장인 살라딘과도 간통한 여자, 성전을 실패로 몰고 간 여자. 엘레오노르는 이런 식으로 온 서구 기독교 사회의 비난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현대에 와서도 십자군전쟁사에 등장하는 엘레오노르는 늘 부정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프랑스의 왕 루이 7세는 군주만큼이나 수도승이 되었으면 훌륭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 당시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도 거의 도가 지나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내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도덕관념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평판이 난 혈기왕성한 여인이었다. 그들은 잘 맞지 않는 부부였다. 루이 왕은 최근의 교전 중 어느 교회를 불태움으로써 그곳을 피난처로 삼았던 많은 민간인들을 죽인 사건으로 교황 에우게니우스에게 도덕적으로 약점이 잡혀 있었다. 아마도 고의가 아니었겠지만 그 잔악한 행위는 루이의 명성을 심하게 손상시켰으므로 왕은 그것을 만회하고 싶었다. 더 필요한 설득은 현재 웅변력이 절정에 이르러 있는 베르나르두스 드 클레르보가 해 주었다. _ 「십자군 전쟁(pp.236~237), W. B. 바틀릿 지음 / 한길사」


두 남편을 두 번 배신했다고들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서 엘레오노르와 루이 부부 사이는 점점 나빠졌다. 엘레오노르는 이혼을 요구했다. 물론, 기독교가 지배하던 당시 중세 유럽 사회에 이혼이란 없었다. 혼인 무효가 있었을 뿐이다. 혼인 무효는 결혼식은 올렸지만 실질적 결혼 생활, 즉 성관계가 이뤄지지 않았던 경우나 둘이 근친 사이였을 때나 가능했다. 엘레오노르는 둘이 로베르 1세라는 프랑스 왕을 공통 조상으로 둔 9촌 관계였다는 사실을 내세워 혼인 무효를 요구했다. 그런데 이런 식이면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유럽의 모든 왕실은 거의 다 근친혼 관계가 된다. 이 정도 촌수의 근친혼은 현실적으로 그리 문제되는 관계는 아니었기에, 근친혼으로 인한 혼인 무효는 주로 아내가 지겨워진 남성들이 새 여자를 맞아들일 때에 쓰던 방식이었다. 후대의 영국왕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할 때처럼. 그러기에 근친혼을 내세운 이혼 무효를 남편이 아닌 아내, 엘레오노르가 먼저 제기했다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여기에서 그녀에 대한 악의적 루머가 또 퍼져 나갔다. 엘레오노르가 불륜에 빠져 남편을 배신했다는.

그러나 엘레오노르는 소문의 내용처럼 작은 아버지 레몽과의 불륜 때문에 루이에게 이혼당한 것도 아니고, 욕정을 맘껏 발산하기 위해 이혼을 원했던 것도 아니다. 이혼 무효 판결이 나기 전, 이미 레몽은 사망한 후였으며 이 이혼은 부부 쌍방이 다 원했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 왕위를 계승할 아들 없이 딸만 둘이었기에 루이 역시 새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이혼을 원했다. 이혼하면 엘레오노르의 아키텐 영지를 프랑스에 통합할 기회는 잃게 된다며 일부 신하들은 루이를 말렸지만, 루이는 그보다 새 결혼과 아들 상속자를 더 원했다. 1152년 둘은 이혼에 합의했다. 대주교들은 두 사람이 근친 관계에 있기에 혼인이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비의 관을 내려놓고 자신의 영지, 아키텐으로 돌아갔다.

엘레오노르는 혼인 무효 판결을 받은 지 8주만에 헨리 2세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헨리는 프랑스 내에서는 앙주 백작 겸 노르망디 공작이었으며, 정복왕 윌리엄의 손녀인 어머니 마틸다를 통해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도 갖고 있었다. 이제 아키텐 여공작인 엘레오느르의 영지까지 합쳤으니 헨리는 프랑스 왕을 능가할 영지와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혼하자마자 재혼을 한, 그것도 전 남편의 최대 적이 될 수 있는 헨리를 선택한 그녀를 비난했다. 당시 19세였던 헨리는 엘레오노르보다 11세 연하였기에, 어린 남자를 성적 매력으로 홀려 차지했다며 그녀를 비난했다. 그녀 사후에도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내 영지를 들고 영국으로 시집가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 전쟁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며 오래오래 그녀를 비난했다.


1154년 앙주 제국의 영토를 표시한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그러나 이런 비난은 역사적으로도 터무니없다. 당시 중세 유럽의 영주들은 민족이나 국가 관념 없이, 일종의 지방 군벌들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 무력이 없는 영주의 영토는 이웃 영주들의 먹잇감일뿐이었다. 특히, 그 영지의 주인이 여성인 경우는 더 그랬다. 무력을 갖지 못한 상속녀에 대한 납치와 강간에 의한 결혼과 영지 합병은 흔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혼 후 자신의 영지로 돌아오던 엘레오노르는 두 명의 영주에게 각각 두 번 납치당할 뻔하기도 했다. 위험에 처한 그녀는 자신을 보호해줄 힘이 있는 남편을 원했고, 첫 결혼과 달리 이번에는 자신의 남자 고르는 기준에 의거, 스스로 헨리를 선택했다. 먼저 사절을 보내 결혼을 제의한 것은 엘레오노르였다. 1152년 5월 18일. 둘은 결혼했다. 엘레오노르 입장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루머는 끊이지 않았다. 엘레오노르가 루이와 아직 결혼생활을 유지하던 중에, 파리를 방문한 조프루아 백작과 간통했으면서도 그의 아들 헨리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154년 10월 25일, 드디어 헨리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이후 13년 동안 잉글랜드 왕비 엘레오노르는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았다. 이중 아들 둘이 후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사자왕 리처드와 존 왕이다. 헨리와 엘레오노르의 애정으로 결합한 부부 사이는 막내아들 존을 낳은 후 거의 끝났다. 엘레오노르는 헨리와 떨어져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와서 지냈다. 헨리는 잉글랜드에서 정부와 지냈다. 이후 부부는 정치적 필요성으로 결합한 관계였다. 아니, 오히려 정적 사이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엘레오노르는 아들들이 부왕 헨리에 대해 일으킨 반란을 지원하다가 남편의 포로로 잡혀 1173년부터 헨리 2세가 죽는 1189년까지 잉글랜드 곳곳의 감옥에 유폐되었다. 그녀는 이제 질투에 눈멀어 아들들을 부추겨 반란을 사주한, 또다시 남편을 배신한 여자가 되었다.

사실상, 알리에노르의 운명은 어쩌다 남자 형제가 없다 보니 영지의 상속녀가 된 귀족 여성들 대다수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들이 지닌 권력을 차지하려는 야심이 탐욕을 부채질했고, 구혼자들은 경쟁을 벌였다. 저마다 그녀들의 영지에 정착하여 그녀들이 낳아줄 아들들이 성년이 되기까지 그녀들의 유산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한 결혼을 하고 재혼을 하게 마련이었다. 알리에노르의 운명에서 예외적인 것이 있다면 이혼과 반역이라는 두 가지 사건뿐이다. 이 사건들이 흥미로운 주된 이유는 이 여인이 왕비였고 고위 정치에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역사가들의 수많은 기록들이 남아, 당시 여성의 조건이 어떠했던가를-보통의 경우 이런 것은 역사가의 관심 밖이다-다소나마 엿보게 한다는 데 있다. 실제로 우리가 알리에노르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적다. _ 「12세기의 여인들 1, <알리에노르>편(pp.32~33) / 조르주 뒤비 지음 / 새물결」


그녀는 자신의 것을 지켰을 뿐

그녀가 헨리와의 사이에 8남매나 낳았다고 해서 부부 사이가 아주 좋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귀족 여성들은 가임 능력이 있는 한, 끊임없이 임신하여 후계자를 생산해야만 했다. 출산 후 자신의 아이를 스스로 젖 먹여 키우지 않고 유모를 두는 이유가 바로 그렇다. 남편과 가문에 더 많은 아이를 낳아 주기 위해 얼른 몸을 다시 임신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야했기 때문이다. 출산한 아내의 몸이 회복되면 남편은 임신을 위해 동침했다. 임신 사실이 확인되면 태아를 위한 금욕이란 핑계 하에 남편은 곧장 정부의 품으로 가곤 했다. 헨리 역시 그랬다. 헨리와 엘레오노르 부부의 첫 아이와 헨리의 사생아는 한 달 간격으로 태어났다. 결코 삽십대의 노련한 엘레오노르가 십대 순진한 소년을 성적으로 유혹해서 이루어진 결혼이 아니었다. 헨리는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그는 결혼 생활 내내 외도를 일삼고 곳곳에 사생아를 낳았다. 막내인 존이 태어난 이후 엘레오노르가 헨리와 떨어져 자신의 프랑스 영지에 가 있었던 것에 대해 사람들은 남편의 정부 로자먼드에 대한 질투 등을 원인으로 말하지만, 헨리의 외도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굳이 이때에 남편에게 실망해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 배신은, 결혼 초부터 남편 헨리가 먼저 했다.

그렇다면 엘레오노르가 아들들의 반란을 도운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남편의 사생아인 조프리를 궁정에 데려와 자신의 아이들과 같이 최상으로 교육시킨 엘레오노르였다. 이로 보아 알 수 있듯, 그녀는 자신의 것만 지키면 남편의 삶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었다. 반란은, 헨리가 엘레오노르와 아들들의 몫까지 차지하려 들었기에 생긴 일이었다. 헨리는 아들들을 편애했으며 엘레오노르와 이혼을 검토했다. 새 결혼을 통해 새로운 후계자를 낳아 그에게 영지를 물려 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프랑스 내의 헨리의 영토 중에는 엘레오노르가 결혼할 때 가져온 영지가 있지 않은가.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것을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특히 그녀는 가장 사랑하는 세째 아들 리처드에게 자신의 영지를 상속시키고 있던 참이었다. 엘레오노르의 영지는 그녀 사후에 남편 헨리가 아니라 그녀가 지정한, 그녀가 낳은 상속자에게 계승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그녀는 아키텐의 주인은 남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부왕이 장성한 아들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권력을 잘못 행사하거나, 편애하여 상속하거나, 새 부인과 그 소생에게 권력을 넘겨주려고 하다 생기는 반란은 역사상에 흔하다. 엘레오노르만 아들을 부추겨 남편에게 반역했다고 욕 먹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왕 헨리 2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아들들을 부추긴 자는 바로 프랑스 왕이었으니, 결국 헨리 2세 자신이 만든 적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볼 때 엘레오노르의 반역은 남편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것을 당연히 지키려 했을 뿐이다.



헨리 2세의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그녀의 빛나는 노년기

1189년 헨리 2세가 사망했다. 당시 프랑스의 영지에 있던 리처드 1세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처음으로 내린 명령은 잉글랜드에 구금되어 있던 모후 엘레오노르를 풀어주란 것이었다. 동시에 리처드는 대비가 된 엘레오노르에게 자신이 잉글랜드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대관식을 올릴 때까지 잉글랜드의 통치를 맡겼다. 드디어 엘레오노르는 오랜 유폐 기간을 마치고 자유를 얻었다. 풀려난 여인은 기죽은 노파가 아니라 온갖 경험을 통해 더욱 지혜로워지고 성숙해진 여왕이었다. 엘레오노르는 아들 리처드를 대신하여 잉글랜드의 영주들과 성직자들로부터 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받아냈다. 67세의 그녀는 다른 여성들이 사망하거나 은퇴할 나이가 되어서야 드디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잡았다. 그녀는 잉글랜드에서 프랑스에 걸친 광대한 앙주 제국의 2인자로서 섭정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잉글랜드보다 프랑스에서 주로 전쟁을 하고 있던 리처드 1세 대신 실질적 왕은 엘레오노르였다. 그녀는 진정한 여왕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연륜과 지혜에 경의를 표했다. 점점 젊은 날 그녀와 관련된 추문들은 잊혀져 갔다.

며칠 뒤 엘레오노르는 남부의 행정구역을 돌아보기 위해 런던을 떠났다. 그녀는 왕국의 모든 것을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재정비했고 귀족들을 통솔했다. 대비는 어디를 가든 리처드를 대신하여 충성서약을 받았고 리처드의 이름으로 사법권을 행사했으며, 증서와 공문서에는 자신의 인장을 찍고 ‘신의 은총을 받은 잉글랜드 대비 엘레오노르’라는 서명을 했다. 또한 곡물, 유류, 직물의 거래를 위해 통일된 무게와 길이 단위를 쓸 것과 잉글랜드 전역에서 통용될 수 있는 새로운 기준 화폐를 발행할 것을 명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서리에 병자와 가난한 자, 노인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했다. _ 「아키텐의 엘레오노르(pp.349~350) / 앨리슨 위어 지음 / 루비 박스」


엘레오노르의 문장 앞면. [출처 : 위키피디아]
엘레오노르, 신의 은총으로, 잉글랜드의 왕비, 노르만의 공작부인이라고 쓰여져 있다.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에 참전했다. 그녀는 대비로서 왕국을 통치했다. 사자왕이란 별칭을 얻은 리처드가 전쟁에서 돌아오다가 신성로마제국 측의 포로로 잡혔을 때 그녀는 아들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한 협상과 모금에 직접 나섰다. 협조하지 않는 교황을 준엄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리처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막내 아들 존을 왕위에 올려 그를 도와 잉글랜드의 영토를 다스렸다. 외교와 손자손녀들의 결혼 협상 테이블에 직접 나섰다. 루머와 달리, 그녀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불화를 조장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움직였다. 특히 그녀가 77세의 나이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1600여 km를 여행하여 외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슈를 직접 데려다가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와 결혼시킨 일은 노년에도 꿋꿋했던 그녀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1204년 88세로 사망한 엘레오노르는 남편 헨리 2세와 아들 리처드 1세가 묻힌 퐁트브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묘석에는 이렇게 새겨졌다. “여기 세상의 모든 여왕을 능가하는 여왕이 잠들도다.” 빛나는 노년이었다.



퐁트브로에 있는 엘레오노르와 헨리 2세 묘소의 조상 [출처 : 위키피디아]


사후에도 루머에 시달리는 여왕 중의 여왕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엘레오노르의 빛나는 노년기의 업적은 잘 거론하지 않는다. 역사서를 찾아보아도 남편에게 반역 후 감옥에 유폐된 사실에서 그녀에 대한 기록이 멈춘 경우가 많다. 엘레오노르 사후, 섭정 기간의 업적 덕분에 잊혀졌던 젊은 날의 근거없는 추문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여러 법령과 문서 등에 그녀의 훌륭했던 통치 사실이 객관적 증거로 남아 있건만, 사람들은 그녀의 인생을 평가하는 데에 엄연한 객관적 사실보다 루머를 더 즐겨 인용하곤 했다. 왜 그럴까. 왜 엘레오노르 그녀는 사후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루머에 시달려야 했을까.

중세 서유럽의 봉건제도는 땅의 분배에 기반하지만, 그러한 땅의 분배는 상속과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봉건제도는 땅과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자의 관리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상속녀나 귀족 여성들은 자신이 영지와 세트로 묶여 판매되거나 양도될 때,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엘레오노르는 의식했다. 자신의 힘을, 자신이 가진 것을.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독립적으로 행사하려 들었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두 번째 남편을 상위 주군이나 교회의 허락 없이 스스로 선택한 것은 물론, 자신의 상속자인 아들 편에서 남편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녀의 죄는 힘이 셌고, 가진 것이 많았고, 매력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성들은 그녀를, 그녀의 사후 평판을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엘레오노르 사후 떠돌던 소문이 사실로 굳어진 것은 이런 강한 여성을 폄하하고, 그녀가 다른 여성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만 할 현실적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된 매춘부’가 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엘레오노르가 살던 시기에 널리 자리잡게 된 성모 마리아 숭배이다. 마리아 숭배가 공식화된 것은 1095년 1차 십자군 원정 시기이다. 이후 12~13세기에 걸쳐 마리아 찬미가 발전해갔다. 유럽 각지에 ‘우리들의 성모’란 의미의 노트르담 성당이 건축되었다. 순결과 순종, 희생과 모성 등 여성의 긍정적 이미지는 모두 성모 마리아에 집중되었다. 반면 음란, 성욕, 방종 등 여성의 부정적 이미지는 12세기의 최고 이슈 메이커였던 엘레오노르에게 집중되었다. 엘레오노르는 반면교사의 훌륭한 모델이 되었다. 이 시기 문자를 알고 기록을 남기던 계층은 주로 기독교 수도승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 전설을 즐기던 민중들의 욕구도 루머 확대 재생산의 한 원인이었다. 이야기에는 갈등구조를 보다 재미있고 극적으로 만들어줄 강한 악역이 늘 필요한 법이다. 영국인들은 내전을 종식시켜 플랜태저넷 왕조를 연 헨리 2세와 십자군 무용담의 영웅 리처드 1세를 긍정적으로 보고, 그 반대편 위치에 엘레오노르를 놓았다. 잉글랜드 혈통의 순종적인 젊은 미녀 로자몬드 반대편에 사악하고 질투심 많은 늙은 탕녀 엘레오노르를 설정했다. 다른 전설 속 악녀들의 전설도 엘레오노르의 행적으로 흡수되어 함께 전승되었다. 사실과 다른 엘레오노르의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져 구전되었다. 구전 문학이 거의 사라진 오늘날까지도 흥미 위주의 대중 역사서에 이 관점은 계승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녀는 실재 언행 이상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전설과 역사에 남았다. 남성들과 성직자들은 그녀를 예로 들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멋대로 살면 결국 남편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말 테이니, 네년도 조심하라구!” 그래서 그녀의 빛나는 노년의 성공은 전설이나 역사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훌륭함을 말하면 남성 지배자나 교회는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800여년이 흐르다 최근에야 객관적 연구를 통해 엘레오노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수정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우표에 등장한 엘레오노르 [출처 : 위키피디아]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왔던 여자

그러므로 그녀에 대한 기존 루머와 세간의 평가를 통해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녀가 ‘왕비가 된 매춘부’라는 것이 아니라 이하의 세 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녀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고 영향력이 컸다. 둘째,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사람을 보고 평가한다. 셋째, 사람들의 평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글을 쓰면서 난, 이 언니의 삶 자체보다 엘레오노르로 대표되는, 루머에 시달리는 강하고 매력적인 여자, 자신의 힘을 알고 행사하는 여자의 삶을 보는 세상의 편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그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녀를 예찬하는 것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세상의 시선에서,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여자는, 아니 한 인간은 얼마나 자유롭게 나 자신이 되어 내 길을 갈 수 있는가하는 점에 대해 난 말하고 싶었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의 시선이란 그들의 이익이나 환경 그리고 시대적 제약에 좌우된다는 것을 더불어 말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12세기 여성인 엘레오노르의 삶을 평가하는 시선을 따라가보면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엘레오노르 이 언니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이다. 사람들의 비판이 무서워 자신의 재능을 맘껏 드러내지도 못하고, 루머에 휩쓸릴 것이 두려워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대놓고 추구하지 못하는 나약한 우리 자신이다. 그러다 불행해지면 나와 다른 선택을 하여 맘껏 산 사람들을 비난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삼곤 하는 비겁한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어떤 일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세상의 시선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때에는 엘레오노르, 이 언니를 보라.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왕관을 쓰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자신을 욕하는 세상에서 편히 살기위해 일부러 착해지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렇다, 그녀는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것과 아이들의 미래를 챙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도 사후에도 루머에 휩쓸린 여자, 남성과 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 강화에 이용된 여자, 엘레오노르. 이 언니를 보라. 그녀의 삶을 더듬어 따라가며 이 언니의 목소리를 들어라.

나 엘레오노르, 당신네들의 필요에 맞춰 날 어떻게 말하든 난 겁나지 않는다. 난 그저 내 인생을 열심히 산 여자일뿐. 단지 그것이 다일뿐.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단 한 가지. 타인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져라. 타인이 아니라 너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여 네 것을 지켜라. 그들이 보는 것은 진실한 너 자신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한 대로, 자신들이 사는 시대의 한계에 갇혀 너를 보고 있다. 그러니, 너를 욕하면서도 너가 가진 매력을 탐내는 자들 앞에 이렇게 말하라. 그래, 난 이런 여자다. 나를 사랑하려면 사랑하고, 아니면 조용히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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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신영

한글을 뗀 이후로 책 읽고 글 끄적거린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소년중앙》과 계몽사 세계 명작 동화 전집, 삼중당 문고와 창비 시선, 문학과 지성사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숙명여대 국문과 입학 후 대하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커다란 꿈을 품고 사학을 부전공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몇 번 떨어진 이후 그동안의 과대망상과 능력 부족을 깨닫고 겸허하게 독자로 돌아가기로 결심, 한동안 조용히 책 읽고 밥벌이를 하며 살았다. 그렇게 혼자 놀다 보니 너무 심심해서 블로그(blog.yes24.com/mkkorean)에 ‘껌정드레스’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무작정 읽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게으른 배짱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독서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록들이 모여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 책이 2013년 1월 출간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이다.지금까지 문학, 역사, 인간이라는 세 개의 열쇠로 세상을 여는 역사 에세이를 쓰는 데 주력해 왔다. 앞으로도 익숙한 이야기들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즐거운 탐험을 계속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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