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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하드보일드로 세상 읽기’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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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는 일종의 애티튜드다. 목적이 아니라, 시선이고 생존방식이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기에 ‘힘껏 살아가는 것.’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은 것.

순수, 첫사랑, 아름다운 추억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다. 처음이건 마지막이건, 사랑했다면 언제나 마찬가지다. 순수함보다는 세파에 거칠어진 살결과 그늘진 미소가 더 좋다. 시간이 지나 색을 칠하고 포장을 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추억의 사진첩을 만드는 것보다는 지나간 대로 놔두고 싶다. 가급적 기억하지 않고 지금을 살아가고 싶다.

다케우치 유코의 열렬한 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치카와 다쿠지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보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었다. 순수한 첫사랑, 불치병, 비가 내리던 계절 이미 죽은 그녀가 돌아와 얼마간 머무르고 떠나간다. 아름다운 판타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뒤 일 때문에 피치 못하게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봐야만 했다. 그리고 빨려들었다. 순수한 첫사랑, 운명적인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건 뒤틀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순간에 찾은 탈출구, 유일한 판타지였다. 그 남자에게는 여인에 대한 사랑이 유일한 존재의 증명이었다. 그녀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지만 초자연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그에게 돌아간다. 가끔 세상에는 그런,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리고 이치카와 다쿠지의 소설을, 단편집 『온 세상이 비라면』 을 읽었다. 책을 펼치면 첫 장에 도나 윌리엄스의 『자폐증이었던 나에게』 의 인용구가 나온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도망갈 수 있는 섬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안이 중얼거렸다.
“나도.”
그렇게 대답하고 나는 물가로 내려갔다.


『온 세상이 비라면』 에는 세 개의 단편이 있다. 표제작인 「온 세상이 비라면」 에는 자살한 동생을 그리워하는 누이와 친구가 나온다. 온 세상이 비라면, 세상 바깥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동생은 죽음으로 끝을 맺었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다른 세상은 없는 걸까? 동생을 좋아했던 친구는 말한다. “모두 조그만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그 바깥이 있다는 건 몰라요.” 하지만 그 바깥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때로는 어리석은 일인가.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곳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포기해버린다. 믿을 수 없는 이상과 꿈은 쉽게 지워지고 바랜다. 도망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비정해져야만 한다.

하드보일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아마 그래서였던 것 같다. 동서추리문고에서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고,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를 보면서 ‘하드보일드한 세계’에 끌려들었다는 것은, 나의 공식적인 스토리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 이야기들에 유독 꽂힌 것에는 개인적인 이유들이 있다. 하드보일드 소설을 만났을 때, 나는 바닥에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 세상이 아름답고 화사한 곳이라고는 절대 믿지 않았다.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만난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세계와 흡사했다. 결코 벽을 넘어설 수 없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잔인한 세계. 하드보일드 소설과 범죄영화들에 빠져들면서 마침내 나는 그 세계에 동의했고, 그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갈구했다.

이치가와 다쿠지는 「호박(琥珀) 속에」 라는 단편에서 소년의 초라한 사랑을 그린다. 너무나도 예쁘고 아름다운 동급생이 그에게 다가온다. 공부도 못하고, 못생긴,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소년에게. 소년은 그녀에게 빠지고, 사랑을 하고,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한다. 안다. 그는 이용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용당한 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말한다. ‘너뿐이야. 그런 식으로 대해준 건. 그러니까 너를 위해 나도 뭔가 해주고 싶었어.’ 살아가는 이유는 다양하다. 도망치는 것도, 이용당하는 것도,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강해지지 않고는, 그렇게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인생이고, 전진이다.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둡고 눅눅한 장소에서 그 감정은 싹이 트고 아무도 몰래 커나갔어. 그건 몹시 뒤틀리고 목적도 미래도 갖지 못한 생명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있는 힘껏 살았었지? 분명 앞으로도 이 마음은 계속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죽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그날까지, 어둡고 눅눅한 장소지만 그건 끈질기게 살고 또 살아갈 거야.
‘하드보일드’는 일종의 애티튜드다. 목적이 아니라, 시선이고 생존방식이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기에 ‘힘껏 살아가는 것.’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은 것.


# ‘하드보일드로 세상 읽기’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 1월이었다. 만으로 3년이 지났고, 이제 끝내야 할 시간이 왔다. 좋아하는 소설들을 잔뜩 읽고, 좋아하는 소설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글이었다. ‘모든 이에게 감사드립니다.’

[관련 기사]

-늙은 스파이에게 바치는 진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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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급 스파이, ‘침저어’(沈底魚)를 찾아라!
-14년간 묻어둔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건 남자, 그리고… 『64』
-한 발은 눈밭에, 다른 한 발은 모래에 두고 있지요 『불안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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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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