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 “세상은 확고부동한 범주를 뒤흔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서재, 단거리 검색을 가능하게 배치한 곳
반이정 평론가의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화이트 큐브에 우아하게 전시된 미술작품들을 끄집어 내는 그의 문장들은 기존의 그것들과 달랐다. 그 동안 알고 있던 미술 평론의 고루한 개념을 깨트려주었던 그가 신간 『사물 판독기』를 냈다. 이번 신간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 미술에 관한 에세이나 평론이 아니었다. ‘불특정 사물에 관해 500자 이내의 압축된 인상을 정리’하는, 그것도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주변’의 사물과 현상을 마주하는 또 다른 너머로서의 ‘글’이자 ‘평론’이었다.
“제 서재는 주제별로 책을 분류해놨습니다. 예술, 종교, 과학, 인문 같은 구분 말고, 제가 써야 할 주제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그 주제별로 책장을 나눴습니다. 손쉽게 해당 주제의 책을 찾을 수 있게 배치한 거죠. 돌아가지 않고 ‘단거리 검색’을 가능하게 배치했다는 얘기지요. ‘단거리 검색’이 제 서재 이름은 아니지만요.”
“세상은 확고부동한 범주를 뒤흔들면서 앞으로 나아가니까요. 이미지 하나와 짧은 글을 하나의 세트로 묶는 건, 현재 우리가 당면한 의사소통의 가장 흔한 플랫폼입니다. 『사물 판독기』도 그런 의사소통과 호흡하는 책입니다. 꼭 그런 묵직한 생각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재밌게 보고 읽을 수 있게 편성한 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물과 예술은 대등한 지위를 점하진 않지만, 각각 해석을 요구하는 대상인 점에선 같습니다. 더구나 예술보다 사물이 우리의 실제 삶과 밀접한 연관이 더 크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각별한 해석은 자기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점에서 예술작품의 해석보다 왕왕 실질적인 감동으로 연결된다고 봐요.”
사물에 대한 각별한 해석은 자기 삶을 돌아보게 한다
반이정 평론가의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화이트 큐브에 우아하게 전시된 미술작품들을 끄집어 내는 그의 문장들은 기존의 그것들과 달랐다. 그 동안 알고 있던 미술 평론의 고루한 개념을 깨트려주었던 그가 신간 『사물 판독기』 를 냈다. 이번 신간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 미술에 관한 에세이나 평론이 아니었다. ‘불특정 사물에 관해 500자 이내의 압축된 인상을 정리’하는, 그것도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주변’의 사물과 현상을 마주하는 또 다른 너머로서의 ‘글’이자 ‘평론’이었다.
이번 『사물 판독기』의 부제가 읽을수록 와 닿았습니다. ‘사물과 예술 사이’를 바라보는 한 미술평론가의 시선이 뚜렷하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가장 마음에 드시는 장이 있으신가요?
“편애하는 장은 따로 없습니다. 다만 목차를 6개의 주제로 나누는 과정에서 깨달은 사실은 연재하는 2년 동안 사물을 정하는 기준을 세상에 널린 상투적인 사물과 현상에 두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상투성이란 ‘중간은 가는 기준’의 다른 이름인데요. 상투성은 일반인의 취향이기도 해서 대중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지만, 예술에게는 가장 큰 적이거든요. 『사물 판독기』는 6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세상에 편재된 무수한 상투성이 ‘색채’, ‘섹스’ 혹은 ‘공간’ 따위에 어떻게 스며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사물 판독기』의 편성입니다.”
읽으면서 ‘27번째, 개량한복’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진화론의 교훈을 확인하는 시간이랄까. 『사물 판독기』를 보면 미술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백과사전’ 안에는 들지 못해 조금 아쉽긴 했어요. 『사물 판독기』의 관점에서 보는 ‘현대미술’은 뭘까요?
“현대 미술의 시작은 일반적인 사물에 대한 각별한 해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기 보다, 이미 존재하는 유(사물)를 다른 종류의 유로 창조한 과정이 현대미술이었어요. 뒤샹의 레디메이드도 그랬고, 포스트모더니즘미술 창작의 대부분은 일반 사물의 전용으로 규정될 정도거든요. 사물과 예술은 대등한 지위를 점하진 않지만, 각각 해석을 요구하는 대상인 점에선 같습니다. 더구나 예술보다 사물이 우리의 실제 삶과 밀접한 연관이 더 크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각별한 해석은 자기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점에서 예술작품의 해석보다 왕왕 실질적인 감동으로 연결된다고 봐요.”
책을 읽으면서 SNS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물에 대한 짧은 논평이라는 타이틀처럼 단문으로 이어져 있다 보니 평론가님의 트위터를 보고 있는 기분이 랄까요. 평론가님이 생각하실 때, SNS가 미술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있을까요?
“이미 책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사물 판독기』는 수년 전에 주간지에 기고한 연재물을 묶은 건데요. 제 책의 기본 구성이 ‘이미지 하나와 짧은 글’인데, 이는 오늘날 의사소통의 플랫폼인 SNS가 차용하는 실정입니다. SNS와 미술이 만나는 지점을 찾기 보다는, 뉴미디어(SNS나 스마트폰)를 통해 종래의 의사소통이 오늘의 형태로 급변하게 된 경위를 살피는 게 더 중요할 겁니다. 『사물 판독기』 에서 다른 사물에 대해 너무 짧게 풀이했기 때문에 총 6개의 주제를 각각 풀이한 좀 긴 해설을 추가로 삽입했습니다.”
예전 모 잡지의 인터뷰에서 『본다는 것의 의미』의 존 버거나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가 롤모델이라고 하셨어요. 왜 이들을 롤모델로 언급하셨는지 궁금한데요.
“간단히 요약하면 존 버거나 리처드 도킨스나 정직한 해설가인 점 때문에 끌린 겁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생물학에 관심 갖다가 접했지만, 정작 ‘전투적 무신론자(militant atheist)’라는 자기소개 때문에 매혹된 학자에요. 『이기적 유전자』 보다 『만들어진 신』 에 제가 훨씬 고무된 이유고요. 합리적 소통과, 그 적(敵) 사이를 명증하게 가른 논법이 마냥 든든합니다. 이들을 통해 논리와 용기라는 소인이, 부조리라는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교훈도 얻었고요.”
평론가님의 ‘독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독서를 좋아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정직히 말하면 저는 독서광 축에 속하진 않아요. 써야 할 주제가 떨어지면 관련 자료를 도서관에서 찾아 후루룩 검토하고 돌아오는 게 제 독서 방식입니다. 굳이 관심 주제를 한정하자면 전업이 비평이고 보니 현대미술을 들 수 있고요. 상시적인 관심사는 항상 타고 다니는 자전거를 들 수 있죠. 그리고 2013년 이전까지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축에 속해서 매주 시사주간지를 탐독했었죠. 지금은 거리를 두고 있지만요.”
그렇다면, 요즘 써야 할 주제가 있으신가요? 상시적인 관심사인 ‘자전거’에 관한 책이라든지.
“3종 책 세트를 구상 중입니다. 미술책. 자전거책. 섹스책. 제목대로 시중의 교양 미술서가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는데, 눈높이를 끌어올리는 미술책을 내고 싶어요. 한국에 자전거 문화가 일시적으로 유행한 직후 자전거 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고작해야 자전거 정비 도서와 유명인의 자전거 여행기로 압축될 몇 부에 그쳤어요. 자전거 그 자체를 성찰 대상으로 삼는 전례 없는 자전거책을 쓰고 싶어요. 끝으로 세기와 인종을 뛰어넘는 관심사, 섹스를 정직하게 응시하는 섹스책도 쓰고 싶습니다.”
평론가님이 선호하는 혹은 하고 싶으신 ‘글쓰기 작업’의 방향을 알고 싶습니다. 어떤 글쓰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압축해서 말하면, 선례가 적은 주제를 다뤄보고 싶어요. 현재 제 관심사는 한국 현대미술 중에서 21세기 전후의 상황을 정리하는 ‘교재’에 가까운 책입니다. 한국에는 미대의 수는 과도하게 많은데, 정작 한국 미술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대부분의 미대생들이 제대로 모를 뿐 아니라 심지어 관심도 없거든요. 도움이 되는 책을 쓰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사물 판독기』와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 드려요.
“『사물 판독기』는 출판사에서 어떤 ‘분야’로 나눠야 할지 처음에 난처해했습니다. 에세이로 묶기도, 미술칼럼으로 묶기도 분명 어색한 책이니까요. 그렇지만 출판물이 정해놓은 고정된 범주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어요. 세상은 확고부동한 범주를 뒤흔들면서 앞으로 나아가니까요. 이미지 하나와 짧은 글을 하나의 세트로 묶는 건, 현재 우리가 당면한 의사소통의 가장 흔한 플랫폼입니다. 『사물 판독기』도 그런 의사소통과 호흡하는 책입니다. 꼭 그런 묵직한 생각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재밌게 보고 읽을 수 있게 편성한 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거리 검색을 가능하게 배치한 곳, 서재
반이정 평론가는 ‘서재’는 ‘단거리 검색’을 가능하게 하는 곳이다. 서재에 괜한 의미 부여를 하기보다는 그가 ‘써야 할 주제별’로 손쉽게 배치해 놓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예술, 종교, 과학, 인문 같은 구분 말고, 제가 써야 할 주제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그 주제별로 책장을 나눴습니다. 손쉽게 해당 주제의 책을 찾을 수 있게 배치한 거죠. 돌아가지 않고 ‘단거리 검색’을 가능하게 배치했다는 얘기지요. ‘단거리 검색’이 제 서재 이름은 아니지만요.”
명사의 추천
신 없는 사회
필 주커먼 저/김승욱 역 | 마음산책
2000년대 이후, 합리적인 근거를 이유로 무신론적 세계관을 정당화하는 일련의 베스트셀러가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도 무신론적 세계관의 우월함을 드러내지만, 무신론적 신념을 강요하려는 인상을 주지는 않아요. 종교적 전통은 존재하지만, 사실상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두 나라 덴마크와 스웨덴에 맞춰서 쓴 책입니다. 책의 목적은 종교의 세가 약한 공동체가 오히려 제 기능을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보여주고, 비종교적 세계관이 얼마나 건강할 수 있는지 대담을 통해 날 것 그대로 소개합니다.
걸작의 뒷모습
세라 손튼 저/이대형,배수희 역 | 세미콜론
방대한 분량의 연구가 전제된 책이지만, 지식의 과시에 치우치거나 학자연양 하지 않고, 집필의 선명한 목적을 현대미술의 실체 파악에 맞춘 점이 매력인 현대미술책입니다. 긴장감 있는 구성과 도판 없이도 쉽게 읽히는 글의 전개는 저자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어요. 부제가 말해주듯 ‘옥션에서 비엔날레까지 7개 현장’의 관계자들을 박진감있게 묘사합니다.
사진의 털
노순택 저 | 씨네21북스
사진의 의사 전달은 잘라 말하면 한방이 결정합니다. 사진집에 촬영자의 사진과 평자의 글을 싣는 역할 이분법에 따라, 사진에 담지 못하는 사연을 전문 해설가에게 맡기곤 하는데요. 이 책은 촬영자가 사진과 글을 모두 담당한 편성입니다. 하지만 단정적 논평보다 문장가의 압축된 표현이 매력입니다. 의사소통의 원점에 사진이 놓인 작금의 형편을 감안할 때, 오늘날의 의사소통을 숙고하는 사진과 글의 모음. 이 책이 그렇습니다.
감기의 과학
제니퍼 애커먼 저/한세정 역 | 21세기북스
감기는 흔해빠진 호흡기 계통 전염병이지만, 무력감과 우울증 같은 심리적 변화까지 포괄하면, 제법 무서운 병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일상과 붙어있는 이 질병을 둘러싼 세간의 끈질긴 오해와 편견, 그리고 실익을 도모하기 위해 대중의 무지를 눈감고 오해에 가담하는 의학계의 공모를 다루는 책입니다. 특히 감기에 대해 편재된 가장 일반적 오해를 시원하게 박살냅니다. 가령 추위와 감기 전염이 전혀 무관하다는 점, 재채기나 입맞춤으로는 감기가 전염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