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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마저 감동시킨 최고의 음악 - 헨델, 메시아(The Messiah)

‘오페라 흥행 작곡가’ 헨델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현실적 답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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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는 헨델의 명실상부한 걸작입니다. 내용은 기독교 음악이지만, 헨델이 오페라에서 보여줬던 드라마틱하고 서정적인 표현력이 오라토리오에서도 여전히 구사되고 있습니다. 매혹적인 선율과 화려한 기교의 창법이 빈번히 등장하지요. 다른 오라토리오들도 그렇듯이 <메시아>도 관현악 서곡으로 시작해 합창과 중창, 아리아 등이 번갈아가며 흘러나옵니다.

헨델은 중풍을 맞았습니다. 그의 나이 52세가 되던 1737년 봄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음악적 정력가였던 헨델이 중풍을 맞게 된 이면에는 당시 런던 음악계의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습니다. 제가 <내 인생의 클래식 101>에서 몇 번인가 설명했듯이, 헨델이 생존했던 시절의 런던은 음악을 일종의 돈벌이로 간주하는, 말하자면 유럽에서 음악 산업이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귀족과 부르주아 청중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장르는 뭐니뭐니해도 오페라였습니다. 헨델의 음악적 생애에서 오페라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어로 된 오페라를, 런던에서 공연하려는 목적으로 작곡했던 최초의 음악가가 바로 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출처: 위키피디아]

중풍을 맞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기 전에, 헨델의 생애를 간략하게나마 훑어보겠습니다. 헨델은 애초에 독일 사람이었지요. 1685년 2월 23일에 독일 작센의 할레(Halle)에서 태어났습니다. 튀링겐의 작은 도시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난 바흐보다 약 한 달(바흐의 생일은 3월 21일) 먼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평생 동안 직접 대면한 적이 없지요. 물론 서로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습니다. 어쨌든 헨델은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났던 바흐와 달리 외과의사 겸 이발사였던 게오르크 헨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대부분 아시겠지만 옛날에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를 겸하는 일이 흔했지요. 빨간색과 파란색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발소 표지등은 외과병원 표시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두 가지 색깔이 동맥과 정맥을 뜻했던 것이지요.

헨델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는 법학을 공부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열두 살 때 세상을 떠나면서 법과 대학에 가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하지요. 헨델이 5년 뒤에 할레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던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라고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음악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지요. 그는 같은 해 3월에 할레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직업 음악가로 첫발을 내디뎠고, 7월에는 청운의 뜻을 품고 함부르크로 떠납니다. 대도시 함부르크의 중요한 음악가들과 친분을 쌓아가면서 1705년 1월에 최초의 오페라 <알미라>를 공연해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요. 당연히 헨델은 고무받습니다. 아마도 그는 오페라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장르라고 여겼을 겁니다. 그래서 마침내 바로크 음악의 종주국, 특히 오페라의 발상지인 이탈리아로 떠납니다.

이른바 국제적인 감각에서 헨델을 따를 만한 음악가는 거의 없어 보입니다. 스물다섯 살에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귀환한 그는 하노버의 궁정악장 직을 맡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 런던이었습니다. 물론 헨델이 하노버에서 받았던 대우는 매우 파격적이었다고 합니다. 같은 해에 태어난 바흐가 바이마르 궁정에서 80플로린을 겨우 받았지만 헨델은 그 여섯 배가 넘는 500플로린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더 큰 물에서 놀기를 원했고 결국 이듬해에 휴가를 얻어 런던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습니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런던에서 음악적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던 헨델의 본격적인 행보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자, 당시의 영국은 산업적으로 매우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만한 자국의 음악가가 별로 없었던 상황이지요. 바로크 이전의 음악가로 기록되고 있는, 예컨대 윌리엄 버드나 존 다울랜드, 또 헨델보다 앞선 세대였던 헨리 퍼셀 같은 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이미 옛날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런던에서 가장 인기를 끌던 장르는 이탈리아 오페라였습니다. 극장에 모여든 청중은 이탈리아 풍의 화려한 기교와 장식적인 선율에 온통 마음을 뺏기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런던의 음악계는 자신들에게 화려한 이탈리아풍의, 또한 영어나 독일어가 아니라 이탈리아로 쓰인 오페라를 멋들어지게 들려줄 음악가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야겠습니다. 헨델이야말로 그러한 시간과 공간의 선택을 받은 음악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울러 헨델은 그 모든 것을 내다볼 줄 아는 야심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지요. 헨델은 런던에서 음악적 성공과 더불어 엄청난 재산까지 모았지만, 부귀영화가 언제나 그의 편일 수는 없었을 겁니다. 당시 런던 음악계에서 벌어졌던 복잡다단한 일들을 좁은 지면에 일일이 기술할 수는 없지만, 헨델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혹은 헨델의 비판자들도 속속 생겨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오페라 흥행에서의 경쟁도 벌어졌겠지요. 헨델이 구사했던 오페라는 주로 왕과 귀족의 취향에 맞춘 화려한 이탈리아어 오페라였지만, 당시의 런던에서는 그와 대조적인 또 하나의 흐름이 강력하게 대두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던 시민계급의 요구를 반영한, 아울러 영국어로 쓰인 오페라에 대한 수요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존 게이가 대본을 쓰고 존 페푸시가 작곡한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가 유명합니다. 1728년 초연돼 엄청난 흥행을 거둔 오페라인데, 영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민요 선율이 빈번히 등장하고요, 헨델의 기존 오페라에 등장했던 선율을 슬쩍 패러디하기도 합니다. 가사에는 귀족들과 정치가들을 풍자하는 내용이 많아서 당시 런던의 청중이 배꼽을 쥐었다고 전해집니다. 말하자면 쉽고 재미있는 풍자 오페라였는데, 훗날 브레히트가 대본을 쓰고 쿠르트 바일이 작곡한 <서푼짜리 오페라>(1928), 또 영국의 브리튼이 작곡한 <거지 오페라>(1948)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이 <거지 오페라>가 흥행에 성공할 무렵부터 헨델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던 것이지요. 결국 헨델은 크게 파산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당시의 런던은 금융업과 주식 투자가 성행했을 뿐 아니라 공연제작 투자도 빈번했는데, 음악적 재능뿐 아니라 사업가적 기질까지 다분했던 헨델이 그런 기회를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지요. 그는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 모아, 요즘 말로 치자면 펀딩을 받아서 직접 오페라단을 운영했는데, 처음에는 잘 되는듯하다가 결국에는 된서리를 맞고야 맙니다.

자,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나요? 오늘 칼럼의 서두에 등장했던 ‘헨델의 중풍’은 바로 그래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헨델이라는 사람, 참 대단합니다. 그는 중풍이 발병하자 독일로 돌아가는데요, 액스 라 샤펠(Aix la Chapelle, 지금의 아헨)에서 온천 치료를 통해 마침내 병을 이겨냈다고 합니다. 의사가 하루에 두 시간 동안 온천치료를 권하면 헨델은 아예 열두 시간씩 온천에 들어가 버텼다고 하지요. 하여튼 대단한 욕망과 집념의 인물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몸을 회복한 헨델은 1737년 10월에 런던으로 귀환합니다. 이때부터 음악적 방향을 선회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영어를 가사로 삼은 오라토리오 작곡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라토리오는 헨델의 말년을 대표하는 장르가 됩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작곡했던 오라토리오는 모두 32곡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중 대부분의 곡을 중풍을 이겨낸 다음부터 작곡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헨델이 오라토리오에 몰두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경제성’이었을 겁니다. 오라토리오는 줄거리를 가진 극음악임에도 오페라만큼 제작비가 많이 들지 않았지요. ‘오페라 흥행 작곡가’로 한 시절을 잘 살았던 헨델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현실적 답안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헨델은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1841년에 작곡했습니다.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그러니까 24일 만에 작곡을 마쳤다고 합니다. <메시아>는 모두 3부로 이뤄진 종교적 극음악입니다. 1부 ‘예언과 탄생’은 6일 만에, 2부는 ‘수난과 속죄’는 9일 만에, 3부 ‘부활과 영생’을 3일 만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관현악 편곡작업은 이틀 만에 끝냈다고 하지요. 연주시간 2시간이 넘는 대곡을 이렇게 순식간에 작곡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열에 들뜬 상태에서 써내려간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헨델은 거의 침식조차 잊은 채 작곡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초연은 1842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이뤄졌습니다. 런던 초연은 그보다 8년 뒤인 1850년이었습니다. 국왕 조지 2세가 할렐루야 합창이 연주되는 순간에 벌떡 일어났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할렐루야 합창이 나올 때는 청중이 기립하는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메시아>는 헨델의 명실상부한 걸작입니다. 내용은 기독교 음악이지만, 헨델이 오페라에서 보여줬던 드라마틱하고 서정적인 표현력이 오라토리오에서도 여전히 구사되고 있습니다. 매혹적인 선율과 화려한 기교의 창법이 빈번히 등장하지요. 다른 오라토리오들도 그렇듯이 <메시아>도 관현악 서곡으로 시작해 합창과 중창, 아리아 등이 번갈아가며 흘러나옵니다. 특히 헨델은 합창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당대의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작곡 솜씨를 보여줍니다.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모두 53곡.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애청되는 곡은 뭘까요? 물론 다들 아실 겁니다. 2부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합창, 전체로 보자면 44번째 곡인 ‘할렐루야 합창’이지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즐거운 감상되시기 바랍니다.


토머스 비첨(Thomas Beecham)ㆍ로열필하모닉 오케스트라&합창단/1959년/RCA

토마스 비첨은 생전에 <메시아>를 세 번 녹음했다. 1959년 녹음은 타계하기 2년 전에 남긴 거의 유작이다. 유진 구센스가 관현악 파트를 편곡한 버전으로 연주한다. 일련의 관악기(트롬본, 호른)와 타악기(트라이앵글, 심벌즈), 거기에 하프까지 추가한 편성이다. 다른 <메시아> 녹음에 비해 스케일이 월등하게 크고 화려하다. 헨델의 어떤 측면, 예컨대 드라마틱한 화려함을 한층 부각시킨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템포는 느릿한 편이다. 과도한 낭만성이라는 비판도 따르지만, 온몸을 뒤흔드는 감동을 전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테너의 존 비커스, 베이스의 조르주 토치도 좋지만, 소프라노 제니퍼 비비안의 서정적 가창이 단연 돋보인다.


칼 리히터(Karl Richter)ㆍ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ㆍ존 앨디스 합창단/1972년/DG

비첨의 연주에 비해 종교적 엄숙함을 한층 부각하고 있다. 리히터는 1965년 뮌헨 바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이끌고 같은 곡을 독일어 버전으로 녹음하기도 했는데, 이 녹음은 특히나 엄숙하고 건조하다. 영어판을 사용한 1972년 녹음이 좀더 접근하기에 용이하다. <메시아>을 처음 듣는 이들에게 1순위로 권할 만한 연주다. 고전성과 엄숙함, 전통적인 합창 해석 등이 이 녹음의 키워드다. 물론 원전연주를 선호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여전히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리히터를 먼저 듣고 원전연주로 넘어가도 늦지는 않다. 존 앨디스 합창단의 균형 감각도 좋다.



폴 맥크리쉬(Paul McCreesh)ㆍ가브리엘리 콘소트&플레이어스(Gabrieli Consort & Players)/1997년/ARCHIV

맥크리쉬가 고음악 전문 앙상블 ‘가브리엘리 콘소트&플레이어스’를 창단한 것은 1982년이다. 이후 대단히 빠른 속도로 열성적인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있다. 원전악기를 사용해 소편성의 기민함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리히터의 음반을 듣다가 맥크리쉬의 해석을 처음 접한다면, 그 속도감에 살짝 놀랄 수도 있다. 하지만 맥크리쉬는 역시 원전연주로 <메시아>을 녹음한 존 엘리엇 가디너에 비한다면 오히려 종교적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다. 합창의 개성적 표현력도 좋다. 낭만적 해석에 익숙한 감상자들이 원전연주 쪽으로 건너가면서 첫 순서로 선택해볼 만한 음반이다.


[관련 기사]

-국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템즈 강에서 초연했다?
-헨델의 <메시아>를 뛰어넘는 작품의 탄생
-문학수, 강신주에게 클래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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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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