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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티드 스쿨, 같은 무대 위 서로 다른 이야기가 자아내는 세계관의 매력

주저앉아 버린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는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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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말한다. “나아가라”고. 말한다. “길이 없는 것 같아도, 뒤돌아보면 내가 쌓아온 것들이 이정표가 된다”고. 말한다. “시원하게 한번 들이받아 보자”고. 말한다. “그래, 나아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너는 옳다.”

세계관(世界觀)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다.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쓰던 단어였는데 원래는 철학 용어였던 모양이다. 단어에 대한 설명을 읽었더니 금방 머리에 쥐가 난다. 그렇지만 이건 철학 칼럼이 아니니 원래 의미는 일단 치워두자. 창작물에 관련하여 세계관이라는 말이 쓰이면, 그것은 창작물 속의 이야기가 기반을 두는 작품 세계,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개략적인 설정 등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용법은 원래 의미를 생각해보면 명백한 오용이다. 세계관이 작품 속의 세계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게 된 데에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우리나라에 건너오며 번역되는 과정에서 지금처럼 굳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보통 세계관이라는 말을 쓰는 작품이라면, 현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검과 마법의 세계, 초능력자들의 전쟁, 석탄 타는 냄새가 풍기는 스팀펑크 세계 등. 여러 가지 특색 있고 내밀하게 잘 짜인 세계관은, 이야기와 관계없이 그 세계관 자체를 음미하는 식으로도 즐길 수 있다. 이러한 자신이 짜낸 세계를 세상에 선보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장 멋지게 표현해내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마치 실로 천을 짜듯이 얽혀서 하나의 거대한 세계,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운데 땅의 신화, 카페 아넨 엘베, 마블 유니버스, 확장 세계관, 파운데이션 우주 등. 그런 거대하고 매력적인,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접하며 끊임없는 생명력을 지니게 된 우주들이 그렇게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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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나열한 우주들처럼 규모가 큰 이야기는 아니지만, 계란계란의 『헌티드 스쿨』 시리즈도 그에 못지않게 알차면서 친근한, 그러면서 요란하고 재미있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라 해도 지극히 작고 평범하다. 『헌티드 스쿨』 시리즈는 논산에 위치한 한티 고등학교라는 가상의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그 등장인물들 또한 모두 학생이며 그들의 일과도 온종일 공부, 공부, 공부. 우리들의 학창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놓고 보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는 내용일까? 그냥 흔하디흔한 일상 웹툰 아니야? 싶겠다. 자, 살펴보자.

 

온라인 게임 마비노기의 홈페이지에서 웹툰을 그리던 계란계란의 프로 데뷔작이 『헌티드 스쿨』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헌티드 스쿨』이란 한 편의 웹툰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티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네 편의 웹툰, 『삼백이론』, 『원더러스 에이스』, 『학원기이야담』, 『콘크리트 라비린토스』를 묶어서 부르는, 말하자면 시리즈 명이다. 이 네 편의 웹툰은 따로 놓고 읽어도 재미있지만, 여러 만화를 읽을수록 서로 이야기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이런 곳에서 작품 속의 세계라는 것이 생겨난다.

 

『헌티드 스쿨』 시리즈에는 작가의 학창시절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티 고등학교는 논산의 실존하는 모 고등학교를 모델로 했고, 작중에 등장하는 만화부나 신문부, 그리고 흔치 않은 TRPG부 등도 해당 학교에 있던 동아리들이다. 한티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지만 계란계란의 모교는 남고이며, 또한 유령이 자주 출몰한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면, 한티고교는 그의 학창시절이 고스란히, 정말 고스란히 투영된 배경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기만 해서는 재미없다. 현실처럼 평범해 보이는 학교에 다채롭고 이색적인 빛깔을 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캐릭터이다. 물론 검은색 교복에 삼선 슬리퍼를 눌러 신고 커피를 입에 달고 사는 평범한 모습의 학생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하나하나 잊기 힘들 만큼 특이한 면면이 된다.

 

처음에는 평범한 여학생이라며 얼굴을 내밀었지만 에이브럼스 전차의 열화우라늄 장갑판 뺨치는 맷집을 보여주는 나유리, 세기말 패왕 뺨치는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유소연, 오컬트 매니아이자 죽음의 상인(무기상)을 자칭하는 오세아와 공학부의 부장이자 근성으로 뭉친 근성남 송준필, 청순한 외모로 사제 폭탄을 터트리는 폭탄마 유천향... 이들이 한꺼번에 살아 움직이고 말하고 날뛰는 한티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헌티드 스쿨』 시리즈는 이미 일상에서 벗어난 일상 그 자체이다.

 

『헌티드 스쿨』 시리즈의 첫 작품인 『삼백이론』까지는 현실처럼 평범해 보인다고는 했지만… 사실 한티 고등학교라는 공간 그 자체도 현실처럼 평범하지도, 만만하지도 않다. 시리즈 두 번째 만화인 『원더러스 에이스』에서 나왔듯이 입시명문이라는 한티 고등학교는 성적에 상당히 민감한 학생들이 많아 은근히 흉흉한 분위기인 데다가, 학교 터부터가 썩 좋지 못한 자리라 귀신이 넘치다 못해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옴니버스 시리즈 『학원기이야담』에서는 온갖 괴담이 글자 그대로 판을 치고 다닌다. 네 번째 작품 『콘크리트 라비린토스』에 이르러서는 학생들이 귀신에 익숙해지다 못해 시험공부에 방해된다며 괴담을 퇴치해 달라고 청원을 넣을 정도이다. 이런 속내를 알고 보면 빈말로도 이 학교가 평범하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쏘고 부수고 날아다니는 그런 느낌의 학교”라는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계란계란의 동료 만화가인 환상거북의 만화인 『카메라 ON』과 『환상주사위』 또한 마찬가지로 한티 고등학교를 무대로 하고 있다. 계란계란의 만화가 비일상적 일상을 그리고 있다면, 환상거북의 만화는 동아리 활동을 중심으로 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카메라 ON』은 신문부, 『환상주사위』는 TRPG부를 다룬다). 무엇보다 작가는 아직 헌티드 스쿨에는 풀어놓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고 언급하고 있으니,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한티 고교에 쌓여있을지, 이 또한 기대된다. 이렇듯, 마치 실이 엮여 천을 이루는 것처럼 여러 작품이 엮여 한티 고등학교라는 공통된 무대를 더 치밀하고 충실하게 만들어내는 모습은, 필자처럼 세계관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광경이다.


한편, 『헌티드 스쿨』 시리즈는 이능력 배틀물의 요소도 제법 갖춘 편이다. 이능력 배틀물이란, 서로 다른 능력을 지닌 이들이 그들의 능력을 맞부딪치며 싸우는 장르를 말하는데, 『원피스』나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정도가 이능력 배틀물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 만화도 마찬가지다. 전국 수준의 학력을 지닌 유소연이나 뛰어난 공학적 지식을 보여주는 송준필, 오랫동안 만화를 그려온 채미리 등, 각자가 갖춘 실력과 기량의 분야가 다르고,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각자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을 하나의 링 위에 올려 그것을 서로 부딪쳐가며 치고받고 싸우고… 작가는 이것을 이능력 배틀물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냈다.

 

이들이 서로 다른 능력을 부딪치며 함께 서로 격돌하는 것은 그들 각자의 인생관. 인생관이라고 했는데, 인생이란 어때야 한다, 그런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나아갈 길이 걸어온 길보다 훨씬 기나긴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 앞에 길이란 건 없다. 그저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설원 같은 곳일 뿐이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안고 있는 고민, 이건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지.

 

그들이 안은 고민과 스스로 원하는 것은 백 명이면 천 가지, 만 명이면 억 가지로 여러 가지다. 그런 만큼, 자신이 안은 것은 결국 자신이 직접 풀어야 한다. 무서운 일이다. 게임기에는 붙어있는 리셋 버튼은 인생에는 없는데. 잘못되면 어떡하지?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결국, 이 아이들은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모두 그러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나아가라”고. 말한다. “길이 없는 것 같아도, 뒤돌아보면 내가 쌓아온 것들이 이정표가 된다”고. 말한다. “시원하게 한번 들이받아 보자”고. 말한다. “그래, 나아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너는 옳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걸 원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앞으로 밀어주기를. 누군가 당겨 주기를. 누군가 옳다고 말해 주기를. 수동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때론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서는 때가 있다. 그런 때에, 누군가가 해 주는 그런 말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때로는 무엇보다도 강한 동기가 되어 준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삶이 바뀐다.

 

그래, 우리는 무엇이 되었든, 어쨌거나 하기는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감하게 나아가자. 발자국 큼직하고 깊게 한 방 박고, 그걸 시작으로 우리는 또다시 나아가는 것이다. 한티 고교의 괴짜들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고, 학생들만을 위한 말도 아니다. 나아갈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이야기이다. 『헌티드 스쿨』은 그런 이야기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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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제훈

90년대 서울 출신.
길지 않은 세월 속에 이야기를 모으고 즐기는데 낙을 두고 있다.
또한, 누군가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부지런히 설명하는 것 또한 좋아한다.
그렇기에 이 지면에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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