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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빗방울이야 -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당신의 기억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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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점이 떨어져 나갈 듯 한파가 몰아치는 해변. 벌거벗은 한 남자가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알몸이 되기 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깨어난 장소가 어디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남자. 그에게 주어진 단서는 텅 빈 BMW와 몸에 꼭 맞는 낡은 옷가지, 그리고 대니얼 헤이스라는 이름의 차량등록증뿐이다. 그는 누구일까?

영화, 드라마, 소설, 만화를 막론하고 지지부진한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쓰이는 가장 진부한 소재는 기억상실과 불치병이다. 사랑하던 사람이 불치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나오면 일단 혀부터 차게 된다. 또 그거냐, 라며. 하지만 문제는 기억상실이나 불치병 같은 식상한 소재들도 잘만 그리면 언제든 먹힌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고, 감정의 폭발을 쉽게 끌어낼 수 있는 소재로서 기억상실과 불치병만한 게 없다고나 할까.

『대칼날은 스스로를 상처입힌다』 로 데뷔했던 마커스 세이키의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는 처음부터 기억상실이라는 소재로 시작한다. 메인 주의 해변에서 한 남자가 깨어난다. 살을 에는 바람이 쌩쌩 부는 해변에 알몸으로 깨어난 남자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근처에 있던 차에 올라탄다. 아마도 자신의 차인 것 같다. 신분증의 이름은 LA에 살고 있는 대니얼 헤이스. 하지만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이고, 왜 여기에 벌거벗은 채로 있는 것일까. 일단 차를 타고 모텔에 가서 휴식을 취하려 하지만 경찰이 나타나 ‘대니얼 헤이스’를 체포하려 한다. 대니얼은 대체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대니얼은 일단 LA로 향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기로 한다.

스릴러는 앞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궁금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는 스릴러의 임무를 확실하게 다한다. 대니얼이 찾아가는 과정은 모두가 수수께끼이고, 모든 것이 발견이다. 대니얼이 독자에게 말해주는 정보는 아무 것도 없다. 그 자신도 아무 사실을 모르니까. 대니얼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기억에서 하나 둘 단서가 떠오를 때마다 바로 독자도 알게 된다. 그리고 함께 추리해본다.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는 영리하게 긴장감을 자아내면서 수수께끼의 과정에 독자를 동참시킨다. 그야말로 흥미진진하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대니얼은 TV에서 방영되는 <캔디 걸스>라는 드라마를 보며 착각에 빠진다. 여주인공을 분명히 알고 있고, 자신과 관계가 있다고 느껴진 것이다. 가상의 드라마를 현실이라고 믿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지만 대니얼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듯이 아무 단서나 찾아가본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대이얼 헤이스는 <캔디 걸스>의 작가였다. 그의 아내는 <캔디 걸스>의 주연을 맡은 여배우였다. 그리고 실타래가 풀리듯 자기가 왜 경찰의 추적을 받는지도 알게 된다. 죽은 아내의 살인범으로 지목되었던 것.

인생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본인이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점이었다. 더러운 결과는 네가 그렇게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달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었다.

대니얼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내가 죽은 것에도, 자신이 메인주 해변에서 벌거숭이로 발견된 것도. 그렇다면 그것을 찾아보자. 그런데 이상한 사람들이 끼어든다. 대단히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는 베넷이라는 남자가 대니얼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찾고 있다. 벨린다라는 수상한 여자도 있다. 하지만 대니얼은 그저 윤곽만 가지고 있다. 기억이 사라진 상황에서 대니얼은 필사적으로 단서를 찾아내고 끼워 맞춰본다. 처음에는 자신이 아내를 죽인 것인지 의심해보고, 주변의 누군가가 원한을 가진 것인지도 찾아본다. 그러나 기억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겨우 알아낸 것은 단 하나, 그가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더 밝혀질지는 모르지만, 대니얼은 레이니와 서로 사랑했다는 사실과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니얼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다만 자신이 저지른 일, 어떤 선택 대문에 현재의 자신이 있다는 것만은 각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달게 받아들이자. 받아들이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자.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 그것에 대한 기억이 나를 만든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과거일 뿐이다. 지금 내가 선택하는 것에 의해, 나라는 인간이 결정된다.

이건 네가 과거에 누구였는지, 혹은 네가 뭘 기억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야. 네가 지금 누구인지에 관한 거지. 네가 선택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문제인 거야.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는 그야말로 정신없이 흘러간다. 단서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며 퍼즐을 맞춰가는 대니얼을 따라가다 보면 곳곳마다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격렬하게 이야기가 방향을 틀 때마다 대니얼은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기억이 사라진 대니얼은, 매 순간 알게 된 기억에 의해서 새로운 캐릭터가 된다. 그리고 캐릭터에 걸맞는 선택을 한다.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는 기억상실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질주한다. 지극히 통속적이고 전형적이면서도, 읽는 순간의 감흥을 극도로 고조시킨다. 그리고 대니얼의 깨달음에 독자도 공감하게 된다.

지난 한 주일 내내 내가 배운 게 있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거였어. 모든 순간에 선택을 한다는 거지. 과거는 이미 지나갔어. 기억은 꿈과 다름없이 허망하다는 거야. 실질적이고 진실된 유일한 건 현재야.

기억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의 선택이 더욱 중요하고, 그것이 만들어낼 미래가 더욱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반전은 흥미롭다. 선과 악에 고뇌하는 대신, 단순하고 호쾌하게 모든 인물들의 미래를 정리해버린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대니얼을 비롯한 이들이 되뇌는 경구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수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인생은 빗방울이야.라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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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마커스 세이키 저/하현길 역 | 비채
캘리포니아 느와르, 그 화려함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를 집요하게 추적해낸 이 소설 속에는 ‘대니얼 헤이스’라는 인물을 찾아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주인공의 일주일이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기억과 진실의 추격전은 DNA처럼 정교한 이중나선 구조를 띤다. 한 축은 대니얼 헤이스의 실체를 밝혀내는 과정이고, 또 다른 축은 아내의 죽음 뒤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 두 이야기는 극과 극을 향해 내달리다가 어느 순간 교집합처럼 일치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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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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