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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를 나눠가진 가족의 비극 : <뫼비우스>의 김기덕

욕망을 거세당한 가족의 치명적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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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은 모든 소통 가능한 언어를 삭제하여, 모든 인물들이 오직 ‘몸’으로만 대화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등장인물도 단순하고, 이야기도 명료하지만 <뫼비우스>는 다시 거칠어졌다.


해외영화제 수상에 대해서 호들갑스러운 언론과 관대한 비평가, 변덕이 심한 관객들 사이에서 김기덕 감독은 늘 오해 받는다. 아니, 오해받는 다기 보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 같다. 때론 그의 가치를 정확히 짚어내는 심미안을 가진 수집가가 작품을 구매하려는 의사를 보일 때, 액자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입을 앙다무는 고집쟁이 화가처럼, 김기덕은 고정된 틀을 거부하고 날 것 그대로의 캔버스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런 점에서 김기덕이라는 감독의 작품은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수많은 상징들과, 절대 유사하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 사이가 잔뜩 벌어져있기도 하고 붙어있기도 한 균열된 틈새를 보인다.


호평과 혹평, 그 사이의 어딘가

1996년 <악어>를 시작으로 2013년 <뫼비우스>까지 총19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어온 김기덕 감독은 그의 사단이 형성되고, 그의 작품을 선호하는 팬들이 생기고,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음에도 늘 비주류의 시선 속에 갇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은 중견감독이며, 해외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한국 감독 중 하나이며, 후배들에게 입봉의 기회를 나눠줄 수 있는 제작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김기덕은 어떻게 보면 충분히 재조명하고 새롭게 보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사람 중의 하나인 것도 사실이다. 또 반면 김기덕 감독은 필요 이상의 기대와 평가를 받아온 사람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간 한국 영화계가 김기덕 감독에게 조금은 불친절했다는 사실이다.


<아리랑>

2008년 <비몽> 이후 3년 만에 복귀한 김기덕 감독의 <아리랑>은 직접 제작, 시나리오, 연출, 편집, 촬영, 사운드는 물론 배우로 출연, 화제를 모았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공장근로자, 폐차장 인부를 거쳐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감독이 되기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반문한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명사인 ‘아리랑’을 영화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김기덕은 이제까지 시도해 본 적이 없는 다양한 변주를 통해 픽션과 논픽션, 경계와 융화 사이를 오간다. 이를 통해 그는 그간 자신이 겪은 복잡한 심경을 대신했다. 스태프 하나 없이 독자적으로 제작한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지지자 없이 홀로 쌓아올린 영화 필모그래피에 대한 애절한 회고처럼 보였다.


<파란 대문>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여성에 대한 폭행 등 잔혹한 묘사 때문에 논란이 되곤 했는데, 이는 김기덕이라는 인물 자체가 잔혹하다기 보다 우리의 현실을 표현하는 방식을 ‘잔혹함’ 이외의 다른 것으로 나타낼 방법이 없었던 그가 거칠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여성을 창녀와 대학생이라는 이분법으로 묘사했다고 비판받은 <파란 대문>을 보면, 한 여름에 눈이 내리는 환상에 이어, 두 여자가 소통하는 방식에서 김기덕은 소통과 화해, 그 지난한 삶 속에서의 희망을 말한다. 김기덕 감독은 잔혹한 묘사와 이분법적인 대립 항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지만, 평론가들은 그의 묘사와 가치관을 메시지에 앞서 다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김기덕이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위태로운 외줄타기처럼 보인다.


잘려나간 욕망, 입을 닫아버린 소통, <뫼비우스>

※ 가끔 줄거리를 말해 주는 것이, 배우가 맡은 배역과 영화의 형식을 얘기해주는 것이 하나의 스포일러가 되는 영화들이 있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들, 특히 <뫼비우스>는 사전 정보 없이 봐야 더 많이 놀라고 더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다. 따라서 <뫼비우스>를 보실 분은 이 리뷰를 가뿐히 넘기시길…….
모두가 죽어버린 것 같은 청계천의 공구상가를 배경으로, 그 동안 그의 영화 속에서 사라졌거나 <수취인 불명>의 엄마처럼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엄마들과 달리 <피에타>에 등장한 ‘엄마’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성을 이용한다. 그리고 결국 구원받지 못한 이는 스스로 도로에 혈서처럼 마지막 흔적을 남긴다. 그렇게 <피에타>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가장 잔인한 폭력의 슬픔을 남긴 영화였다.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이후, 1년 만에 김기덕은 <뫼비우스>로 돌아왔다. <피에타>는 잔인하긴 했지만 그동안 그의 작품이 보여주었던 시적 은유대신, 정확한 이야기와 이미지로 대중과 소통 가능한 영화였다.



김기덕 감독은 모든 소통 가능한 언어를 삭제하여, 모든 인물들이 오직 ‘몸’으로만 대화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등장인물도 단순하고, 이야기도 명료하지만 <뫼비우스>는 다시 거칠어졌다. 남편의 불륜에 격분한 아내는 남편의 성기를 잘라내려다 실패하고, 자위행위에 빠진 아들의 성기를 대신 잘라낸다. 그리고 절대 다시 회복하지 못하게 잘근잘근 씹어 먹어 버린다. 불륜에 빠진 파렴치한 아버지가 아니라 이제 아들의 성기를 회복시켜주기 위한 아비가 되어, 자신의 성기를 아들에게 이식시켜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성기 없이도 오르가즘에 빠져들 수 있게 자신의 생살을 학대하는 아비의 절절한 부성이 영화의 중반까지를 이끈다. 성기 없는 오르가즘을 위한 신체상해의 방법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직접적이다. 성기를 거세당한 사내들이 오르가즘을 느끼는 방법은 성폭력만큼이나 잔혹하지만, 온전한 성기를 가진 남성이 불륜 혹은 성폭행이라는 ‘성기’ 중심적인 폭행으로 여성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에 비해, 성기를 잃은 남성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오히려 자해를 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자신의 몸에 깊이 칼을 꽂고 오르가즘을 느끼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사내들의 모습은 성기 중심의 폭행의 역사에 가담해 온 남성성에 대한 기묘한 역설이며, 동시에 잔인한 농담이 된다.


<피에타>에서처럼 <뫼비우스>의 갈등은 엄마가 집을 나서는 순간이 아니라, 집을 나간 엄마가 다시 회귀하는 순간에 첨예하게 드러난다. 아들의 온전한 ‘몸’을 위해 자신의 성기를 기꺼이 기증해 준 아비도, 발기가 되지 않은 아들의 성기가 오직 ‘엄마’에게만 반응한다는 사실에 다시금 질투를 느끼게 된다. 한때 아비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아들의 것이 된 성기, 아들의 잘린 성기는 어미의 몸속에서 소화되어 녹아들어 있다. 이제 성기를 중심으로 다시 모인 가족들의 관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이기 시작하고, ‘성기’를 나눠가졌으나 누구도 소유해서는 안 되는 가족의 욕망은 죽음 혹은 거세로 마무리 된다. 대사 없이 오직 거친 신음과 의성어만이 난무하는 극 속에서 배우들은 몸짓과 표정, 눈빛으로 모든 것을 말해 내는데 김기덕의 페르소나로 다시 돌아온 조재현은 영화의 중심에서, 이기적인 남자와 절절한 부성애, 광기를 모두 드러내며 1인 2역을 맡은 이은우 역시 마치 두 명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인상적인 연기를 보인다. 이미 <범죄소년>에서 확인된 서영주의 연기력은 15세라는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내밀하다. 절실하고 생생한 배우들의 연기력은 현실 가능하지 않은 김기덕의 상상력을 땅으로 끌어내려 더욱 비참한 현실로 재현해 낸다.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숨바꼭질>, <감기>로 이어진 흥행 열풍 속에서 <뫼비우스>는 주말 2만 명 정도의 관객 동원으로 박스 오피스 10위로 소박하게 시작했다. 2번의 제한상영가 판정 후 3분 정도를 삭제한 후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관심을 끌었지만, 관객 수를 늘이는데 큰 도움이 되진 못한 것 같다. 솔직히 무삭제 개봉되었어도 채 10만이 보지 않았을 <뫼비우스>를 온전히 봐야 할 소수 관객의 권리를 무시하고 김기덕에겐 관심조차 없는 49,900,000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데려와 침대에 눕혀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버렸다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칼날만큼이나 어이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영화를 한국에서 개봉하고 싶지 않다는 김기덕의 고백은 한국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자신을 좀 더 이해해 달라는 푸념으로 듣는 것이 맞을 것이다. <뫼비우스>에서 근친상간에 대한 상상은 미풍양속을 해치고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이유로 삭제되었다. 자신의 동성 애인을 집에 데려다 각방을 쓰면서 가정부처럼 부리던 남자가 동성 애인과 이별하고 여성 애인을 집에 들인다거나, 이란성 쌍둥이 언니를 질투해 언니의 얼굴로 변신한 여자가 형부와 결혼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TV 일일 드라마 얘기다. 이런 드라마의 소재보다 성인들만 볼 수 있는 영화에서 근친상간에 대한 상상이 과연 더 불온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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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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