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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강도하 “그림을 본능적으로 흡수하는 독자들이 무섭다”

『아름다운 선』 연재 중인 강도하 작가 이제는 모호한 매력도 하나의 태도로 인정이 된다 결국 작가도 사람을 다루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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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작업실은 적막했다. 강도하 작가는 끊임없이 담배를 태우며 말을 이어갔다. 준비해 간 질문지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과거에 작가가 했던 말들을 꺼내놓으며 “지금도 똑같이 생각하냐”고 묻자, 강도하 작가는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매주 수요일, 강도하 작가는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아름다운 선』을 연재하고 있다. 연재 기간에는 대체로 인터뷰를 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선』 단행본 출간을 기념해 오랜만에 인터뷰이를 마주했다. 평소 연재 중 인터뷰를 피하는 까닭은 “작품 이야기를 거론할 수밖에 없기 때문”.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을 캐물을 요량으로 강도하 작가를 찾아갔지만, 빽빽이 적은 질문지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한편 다행스러운 마음은 작품 못지않게 ‘만화가 강도하’의 일상이 궁금했다는 것. 작가에게 꼭 작품 이야기만 물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직 연재 중인 작품에 대해 해석의 잣대를 대기보다는 독자 나름의 상상력을 갖고 결말을 기다리는 것도 좋을 성 싶었다. 삭발을 한 강도하 작가는 ‘험악해 보일까봐’ 모자를 썼다고 했다. 『아름다운 선』의 주인공 ‘선’ 이야기로 인터뷰는 시작됐지만 연애, 결혼, 사람 이야기로 이어졌고 노출증에 걸린 사람들, 트위터 등 흥미로운 대화가 전개됐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휴식’이라고 말하는 강도하. 연재가 끝나면 낮술 클럽을 만들 작정이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참여자 모두는 테이블 위에 절대 스마트폰을 꺼내 놓아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선』은 강도하 작가의 2004년 작 『위대한 캣츠비』의 주인공이었던 캣츠비, 페르수, 선, 하운드 중 ‘선’을 화자로 한 작품이다. 철거촌에서 사는 20대의 삶과 사랑을 그린 『위대한 캣츠비』에서 선은 날백수 ‘캣츠비’를 사랑하는 새 연인으로 등장했다. 애당초 강도하 작가는 『아름다운 선』을 ‘청춘’ 3부작 중 하나로 기획했지만 『위대한 캣츠비』가 예상치 못한 큰 성공을 거두자 노선을 바꿨다. 『로맨스 킬러』 『큐브릭』으로 3부작을 완성했고 이후 『바람개비 소년 하루의 꿈』 『3m』 『세브리깡』 『연애 괴물 대백과』 등을 집필했다. 2000년대 강도하가 만화로 표현한 주제는 청춘과 연애다.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현실적인 사회 배경을 만나자, 독자들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위대한 캣츠비』를 읽은 독자들은 “내 20대를 뒤흔든 만화” “정말 끝내주는 만화, 아니 인생이었다”라고 말하며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선』을 두고는 “강도하 작가의 만화는 불편하지만 재밌고 아름답지만 슬프다”는 댓글이 달린다. 최근 강도하 트위터에서 한 만화가지망생이 “만화를 그리는 것은 천부적이어야 하냐”고 물었다. 강도하의 답은 “먼저 천부적인 생존이 필요하다”였다. 언제 어떻게 데뷔를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데뷔를 해서 어떻게 생존하느냐 ‘지속성’에 방점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의 트위터는 언젠가 계폭(계정 폭파)으로 결론 난다”라고 말하는 강도하. 그 역시, 계폭을 향해 열렬히 달려가고 있다. 『아름다운 선』을 보다가 작가의 근황이 궁금하면 트위터(@kangdoha)를 찾자. 날것 그대로의 흥미로운 글들이 가볍게, 때론 무겁게 꼬리를 이어가고 있다. 동조하냐는 어조는 없다. 근사한 말도 없다. 강도하 작가는 지나치게 덤덤한 표정으로 독자들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댈 뿐이다.




결국 선을 아름다울 겁니다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아름다운 선』을 연재하고 또 월간지 <나들>, <더 딴지>에서 연재 중이시죠. 마침 오늘이 『아름다운 선』이 연재되는 날이네요. 연재 중에 인터뷰는 잘 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작품 이야기를 거론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작가 스스로 기운을 빼버리는 거니까 피하는 게 맞죠.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운 출판사와 일을 하게 됐는데, 인터뷰 안 한다고 하니까 담당자 분이 눈을 동그랗게 뜨시더라고요(웃음).

『아름다운 선』이 원래 『위대한 캣츠비』와 함께 청춘 3부작으로 예정했던 작품이잖아요. 그런데 9년 만에 나왔어요. 작품명도 예전에 써놓았던 제목 그대로고요.

책 서문에도 썼지만 캣츠비를 주인공으로 한 『위대한 캣츠비』가 1부, 선을 화자로 한 『아름다운 선』이 2부, 하운드를 3부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위대한 캣츠비』 반응이 썩 괜찮았잖아요. 이미 3부작으로 진행할 거라는 걸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성공했다고 또 우려 먹냐는 해석이 싫었어요. 제가 이런 쪽에는 조금 아둔해서 피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다른 성향의 작품을 하고 나중에 쓸 생각을 했죠. 어차피 이미 이야기는 구축해 놓은 작품이니까, 변동은 없고 다만 시대적 변화는 생겼어요. 휴대폰 기종이나 버스 모양도 달라졌으니 그래픽적 변화는 당연히 있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관계 설정에 있어서는 변화가 없어요.

『아름다운 선』은 선과 캣츠비가 만나기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돼요. 재밌는 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순수함을 가진 ‘선’이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을 찾아가서 ‘나를 사랑했냐’고 묻는 거죠. 굉장히 특이한 경우잖아요. 과거 남자들을 일일이 찾아간다는 것이.

항상 작품을 할 때는 시대의 당대성을 생각하게 돼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면 작가가 아닌 거죠. 지금 이 시기에 당대성을 가지고 있냐, 유효한가를 생각해야죠.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30대 초반만 되도 지나간 인생이 너무 많아요.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도 있고 악몽도 있을 테고 사람마다 다를 거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내가 그를 사랑했나’ ‘사랑하긴 했나’라는 걸 문득 생각해보게 돼요. 그런데 그러고 말면 되는데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누구나 그렇잖아요.

선과 같은 여자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까요. 과거의 연인에게 사랑했냐고 묻는 사람도 있잖아요. 친구로라도 지내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요.

‘로라도’라는 건 관계가 끝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관계 설정만 살짝 바꾼 거죠. 서로 위장된 관계인 거예요. 헤어진 게 아니고 ‘자기’에서 ‘오빠’로 바뀐 거죠. 완벽하게 이성으로 헤어졌는데 다른 설정으로 유지가 된다?! 그건 불가능하죠. 사람들은 착각을 하곤 하는데,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닌 거거든요. 필요 없어서 헤어진 거예요. 필요하면 헤어지질 않아요. 내 외로움을 메꿔 주는 사람하고는 헤어질 수 없는 거거든요. 그 사람이 아니고서는 허전함을 견딜 수 없다면 헤어질 수 없어요. 아주 양아치적인 발언으로는 ‘단물 다 빠졌어’ ‘약발 떨어졌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바꿔 말하면 내 삶에 그 사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거죠. 그런데 싫어서 헤어진다고 착각하니까. 잔인한 이야기죠. 그걸 인정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선’이라는 인물에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어요. ‘캣츠비’에게는 ‘위대한’이라는 타이틀을 걸었고요. 사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들이 아름답거나 위대하게 보이지는 않잖아요.

선은 굉장히 바보 같은 애에요. 바보 같은 캐릭터죠. 캣츠비도 사실 조금도 위대하지 않죠. 찌질하고 없어 보이고 주도적이지도 않은 인물이에요. 가는 여자를 잡지도 못하고 해내는 것도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물어요. ‘뭐가 위대한 거냐고’ 하지만 작품을 끝까지 보다 보면, 제목이 맞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아름다운 선』 마저도 뭐가 아름다운 건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많아요. 너무 청승맞고 비현실적이고 순진한 여자가 멀쩡하게 살고 있는 헤어진 남자를 찾아와서 갑자기 ‘너 나 사랑했냐’고 물으면 그건 분명 민폐잖아요. 그런데 캣츠비가 위대하지 않았지만 결국 위대한 것처럼, 『아름다운 선』도 결국 ‘아름답네’라는 한 마디가 나오면 된 거예요. 결국 제목은 반어가 아니에요.

만화가 강도하에게 아름답다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되게 오락가락하는데 태도가 분명한 게 아름답다고 느꼈던 적이 있어요. 내 취향이건 아니건 분명한 건 아름다워요. 취향이라는 게 너무 얄팍하고 폭력적이라서 그 외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제대로 된 공포 영화를 봐봐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또 할리우드 시스템을 충성하는 분위기에서 쏙 빠져 나온 블록버스터, 너무 확실한 블록버스터는 아름다워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으니까요. 어떤 콘텐츠를 볼 때 누군가가 “당신 작품은 작품성이고 나발이고 없잖아”라고 말할 때, ‘저도 있는대요’라고 말하는 건 멋진 태도가 아니에요. 누가 뭐라고 하든 태도를 분명하게 하는 게 미학이에요. 만화가 김성모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아무리 조롱을 받고 그래도 태도를 분명히 했어요. 작품에 마초성이 있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마초 그 자체로 멋있어요. 가장 싫은 건 “이건 뭐야?” 싶은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흐리멍텅한 미학도 느껴져요. 모호한 매력도 인정이 되는 거예요. 이도 저도 아닌 미학마저도 하나의 태도로 인정이 되고 있어요.

포용력이 생긴 걸로 이해해도 될까요.

내가 놓치고 있는 미학이 있지 않냐에 대한 섬뜩함이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게 뭐야’라고 하면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야’라고 말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뭔지 잘 모르겠어. 괜찮은 것 같아’ 싶을 때가 많아요. 광의적인 문화 섭취를 위해서라도 단언하면 안 될 것 같고요. 지금은 뭐라고 단언하는 것 자체가 무서워요. 반 템포만 앞서 지켜보고 싶은 생각이죠.




결국 작가도 사람을 다루는 직업

만화가들은 연재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나요? 휴식 시간이 주어지면 무얼 하고 싶으세요?

제게 휴식은 사람 만나는 거예요. 어차피 저도 결국은 사람을 다루는 직업이니까요. 모든 창작물을 사랑을 받기 위한 행위에요. 찰리 채플린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싶어서 무대에 섰고 흥행을 한 거잖아요.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월급을 받기 위해서 일을 하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사랑 받기 위한 행위도 있어요. 글씨를 쓰더라도 조금 더 예쁘고 정갈하게 쓰고 싶듯이, 그 모든 행위들은 ‘나 잘하지, 나 잘 봤지, 나 정확히 판단했지’라고 인정 받고, 확인 받고 싶은 본능이 있는 거예요. 작품이 끝나면 매번 쪽지 시험을 본 느낌이에요. 메인 시험이 작품 전체라면, 연재를 하는 작가들은 매주마다 쪽지 시험을 보는 것 같은 심정일 거예요. 매번 평가는 다를 수 있잖아요. ‘이번엔 좀 아쉽다, 이번엔 좀 근사해’ 항상 달라요. 하지만 이런 거에 대해서 일희일비 하면 안 돼요.

연재물은 작품이 올라가자마자 댓글이 쏟아지잖아요. 수천 개씩 댓글이 달리는데 일일이 다 보세요? 일부러 안 본다는 작가들도 있다는데, 사실 엄청 궁금하지 않나요?

연재라는 게 정말 악마적인 시스템이에요. 다 완성된 작품을 딱 꺼내 놓는 게 아니잖아요. 영화는 3분 보고 평가하지 않잖아요. 최소한 1시간 반을 보고 평가하죠. 연재는 매회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오류를 감당해야 하는데, 그 시스템을 알면서도 작가들은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기뻐하기도 하고 힘들어하기도 해요. 쓴 소리를 들으면 침울해지기도 해요. 하지만 가장 1차적인 평가는 독자들의 반응보다 내가 초안대로 작품을 완성했느냐에 있어요. 작품에는 메시지가 있고 테마가 있지만 꼭 그런 것들을 내세워야 좋은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일단 내가 본 것을 판단한 것을 잘 담아냈느냐가 중요해요.

반전 작가로도 유명하세요. “이번 작품은 반전이 없다”고 말해도 독자들이 쉽사리 믿지 않는다고요.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아니면 초안과는 다른 결말을 낸 작품은 없었나요.

마지막까지 시나리오를 쓰고 연재를 시작하니까 바뀌는 경우는 없어요. 『발광하는 현대사』의 경우에는 엔딩 장면에 대한 편집만 약간 바꿨어요. 후기 영상은 그대로 했는데, ‘좀 더 쉽게 가느냐’ ‘보다 작가의 주관적 해석으로 가느냐’를 끝까지 싸우다가 친절하지 않은 방식을 택했죠. 워낙 내가 불친절한 작가라고 인지된 것도 있고요. 물론 그런 프레임을 만든 것도 나 일 거예요. 긴장하게 보게 하는 것, 어떤 복선의 계기를 만드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내가 만든 프레임이에요. 초기 작품에는 분명히 존재했던 장치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작가가 만든 프레임에 스스로가 갇히는 경우도 많아요. 이번 신작을 하면서도 ‘그런 장치가 있어야 하는 거야’라는 질문을 했어요. 그런데 완결성이 높다고 완성도 높은 작품은 아니에요. 독자들한테 ‘반전 없을 거다’라고 말해도 이 자체도 트릭으로 보는 독자들도 많고요. 이럴 땐, ‘뭘 해도 안 되는 구나’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워요. 매회 오는 반응을 즐기는 게 훨씬 낫죠.

독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힘이 되기도 하지만, 힘든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연재물은 여러 가지 유혹이 많아요. 연재물을 보게 하는 힘은 여러 가지인데, 그림이 예뻐서 이기도 하고 연출이 좋아서, 또 스토리텔링의 짜임새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그런데 작가는 매회에 따라 붙는 포만감에 대한 싸움을 계속 해야 해요. ‘잘 봤다, 잘 먹었다’는 마음을 독자에게 줘야 하거든요. 50회를 연재한다고 했을 때, 독자들이 보기에 ‘32화는 꼭 있어야 했어?’ ‘재미 없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작가에게는 작품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반드시 필요한 컷이거든요. 매회 포만감과 싸워야 하는 스트레스가 연재물을 하는 작가들에게 가장 클 거예요.

그림 스트레스가 크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으세요. 글과 그림의 중요성을 딱 잘라서 말하긴 어렵겠지만, 작품마다 힘든 부분이 조금씩 다를 것도 같아요.

그림은 드라마를 잘 담는 정도로 족한 것인가, 아니면 그림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게 옳은가, 둘 다 아니면 서로 적절하게 타협하는 게 좋은 건가. 이 싸움은 매번 결론이 달라요. 어느 판단으로 진행하느냐에 따라서 강력한 미스테이크가 있을 수 있어요. 만화라는 건, 글과 그림의 이상적인 결합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 치우쳐도 안 되고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매 작품을 할 때마다 이야기, 드라마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는 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흥미 있는 이야기를 만드느냐는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숙제에요. 내가 뭘 바라보고 있냐가 작품을 만드는 데 밀접하다 보니, 작품을 쉴 때는 무조건 사람을 만나요. 독방에서, 또 책과 TV를 통해 세상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사람을 만나는 게 최고에요.




단언할 수 없다. 모호함을 즐겨야 한다

과거 인터뷰를 보니 ‘사람을 네 번 정도 만나면 다 파악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셨던 데요.

제가 그런 말을요? (웃음). 그런 시절이 있었나 보네요. 사실 ‘너 잘한다’고 할 때가 제일 조심스러워요. 그럴 때 인터뷰를 하면 안 돼요. 뭔가 단언적인 말 투성이거든요. 예전에 대학 강단에서 애들을 가르치다가 그만뒀는데, 교단이라는 게 학생들보다 10cm 정도 높은 곳에 서 있다는 이유로 단언적인 말들을 해야만 했어요. 나도 아직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사람인데, 마치 완성형 인간인 것처럼 이야기를 해야 하는 공기가 대학이라는 공간에 있었어요. 자칫하면 오만 방자하기 딱 맞는 곳이죠. 수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어제 그랬냐? 어제 술 먹었나’ 이 정도의 능글능글함이 허락되지 않으니까요.

인터뷰할 때도 마찬가지 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을 말하다 보면 스스로 결론을 내고 있고. 묻는 사람은 뭔가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니까요.

그렇죠. 사실 작가 인터뷰도 피해야 하는 게, 그 모호함을 즐겨야 하는데 질문에 대한 답을 강요 받고 있다고 착각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순간의 단언을 말해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어떠한 대답도 당연히 바뀔 수 있어요. 한 시간 전에 ‘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먹는 겁니까’라고 말했다가, 한 시간 후에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거거든요. 그게 사람이거든요. 모든 건 찰나의 기록일 뿐이에요.

트위터 하고 계시잖아요. 생각을 좀 정리한 뒤 글을 올리는 편이세요? 아니면 즉흥적인 생각들을 즐기시나요.

(웃음) 구글을 폭파시켜야 해요. 트위터 멘션을 지워도 구글링에 다 남잖아요. 원래 작가들은 트위터를 하면 안 돼요. 결국 계폭을 향해 달려가는 거예요. 어차피 끝은 계정 폭파에요. 트위터를 5년, 10년 할 것 같아요? 10년이 뭐예요. 5년 이상 못해요. 만약 그 이상 한다면 자신에게 특정한 이익을 주기 때문일 거예요. 끊임없이 홍보를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걸로 돈을 벌어야 하거나, 책을 팔아야 할 때. 뭔가 이익이 있지 않는 한 온전한 소설네트워크서비스를 유지하는 건 어려워요. 단어 자체가 트릭이에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페이스북은 나 잘 살아요. 트위터는 나 병신이에요”라고. 얼마나 병력이 높은지, 개드립이 높은지 싸우고 있는 거라고요. 어느 정도 맞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140자 단문을 꽤 진중하게 쓴다는 건 불가능하고, 또 어떤 취향, 지향, 논조를 가지고 무차별적으로 내 면전 앞에서 쏟아 내는데 방어할 기제도 없거든요. 온갖 흉학한 말을 해버리고 싹 사라지죠. 자신의 멘탈 게이지를 확인하는 데에는 유효한 부분이 있기도 하죠.

그런데도 작가들은 왜 트위터를 하는 걸까요.

보통 작가들은 트위터를 팬을 만나는 공간으로 착각하고 시작을 해요. “여기에도 내 팬이 있구나. 이렇게 소통할 수도 있구나”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놀다 보면 그게 아닌 걸 알게 돼요. 개드립의 향연으로 빠지는 거죠. 팬들도 그래요. “트위터를 보니까 오히려 작품이 훼손된다. 내가 생각했던 작가와 트위터에서의 인물은 다르다”고.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해요. 페이스북은 그나마 그룹을 묶어서 놀잖아요. 그런데 트위터는 검색만 하면 볼 수 있고. 올바른 용례는 구독이라고 생각해요.

계정을 없애고 다시 만드는 사람도 많아요.

그건 중독이에요. 저도 언젠가 계정을 폭파하겠죠. 중독된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제가 작품이 끝나면 낮술클럽을 만들려고 해요. 일단 멤버를 모집해서 멀쩡한 대낮에 술을 마실 건데, 조건은 휴대폰을 절대 테이블에 올려 놓지 않고 진동으로 바꿔 놓는 거예요. 낮술을 먹다 보면 좋은 소리가 나오겠어요? 신음이 더 많겠죠. 그게 그리운 거예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그 감정을 느끼고 싶은 거예요.




본능적으로 흡수하는 독자들이 무섭다

독자들은 작품을 보면서 때로는 작가의 입장, 심리를 상상해보잖아요. ‘이 그림 그릴 때, 작가는 이런 기분이겠다’ 하는. 반대로 작가들도 작품을 보고 있는 독자들의 표정, 심리 같은 걸 상상해 보기도 하나요. 예전에 “만화는 표정 있는 언어”라고 정의하기도 하셨어요.

하죠. 많이 해요. 독자들이 이 컷을 볼 때 웃고 있겠다, 허무하겠다, 오글거리겠다. 다 상상해요. 그런 게 다 느껴져요. 사실 컷 하나 그릴 때 3시간씩 붙잡고 그릴 때가 많아요. 독자들이 볼 때는 ‘그게 뭐가 중요해?’라고 하겠지만, 작가들은 인물이 팔을 왼쪽으로 괼까, 오른쪽으로 괼까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어요. 목이 녹아 내리면서까지 이랬다 저랬다 자세를 바꿔 가며 그림을 그려요. 그런데 독자들이 그 그림을 보는 시간은 0.2초도 채 되지 않거든요. 두려운 건 ‘내가 이렇게 공들여 그린 그림을 저렇게 짧은 시간에 지나쳐 버린다’는 게 아니라, 독자들이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3시간을 투자한 그림을 그 짧은 시간에 흡수하고 지나간다는 거예요. 그게 무서운 거예요. 외형적으로 ‘그냥 지나가네’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흡수하고 지나가니까 투자할 만한 거예요.

웹툰은 스크롤을 올리며 보니까 보는 시간이 더욱 단축되지만, 그래도 단행본으로 책으로 보는 경우에는 좀 더 세심하게 볼 것 같은데요.

책으로 볼 때는 1분 이상을 볼 때도 있고 다시 되돌아 가서 보기도 하죠. 책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거예요. 역시 사람들은 드라마 위주로 보니까 그림은 최소화 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작가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글과 그림의 이상적인 결합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거거든요. 어떻게 보면 책이 더 적확한 형식인 게, 응시를 하게 되거든요.

가끔 후배 만화가들 작품도 보나요.

예전엔 많이 봤는데 요즘은 잘 보지 않아요. 다들 너무 잘 그리고 보고 있으면 부러워요. 다 나보다 잘나 보이고 잘하니까 화가 나요. 질투는 나의 힘이에요(웃음). 간혹 후배들 작품을 평가해달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선배는 조금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일 뿐이에요. 뭐를 평가할 만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 거죠. 모든 작가가 진행형이라 완성된 작가라는 건 없어요. 이제 말해도 되는 작가는 더 이상 작품을 하지 않는 작가죠. 그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말을 해도 돼요. 그런데 내년에 뭘 할지 모르는 작가를 특정한 카테고리로 규정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19세 데뷔해서 출판만화를 시작으로 지금의 웹툰까지, 25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하셨어요. 가끔 다른 일을 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 적도 있을 텐데요.

‘다음 생에 어떤 인생이면 좋겠냐’는 질문에는 ‘아직 이번 인생의 결론이 나지 않아서 모르겠다. 답을 유보하겠다’고 말해요. 저 역시도 가끔 상상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지만, 아직 결론이 안 났으니까요. 펜을 딱 내려 놓았을 때는 못할 짓이었어요.

『아름다운 선』 연재가 올해 12월까지죠. 출판만화에서 웹툰으로 넘어오면서 유독 ‘연애물’을 많이 하셨어요. 다른 장르의 작품을 기대하는 독자들도 많을 것 같아요.

출판만화 시절에는 가족, 사회 같은 좀 아픈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온라인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연애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게 됐어요. 그동안 연애물은 많이 했으니까 『아름다운 선』 까지만 하려고 해요. 주변에 활극, 액션물을 보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 잘해요. 그런 거(웃음). 액션은 악당이 매력적이어야 재밌잖아요. 히어로들은 어차피 하는 짓이 뻔하니까, 어떤 악당이냐가포커스에요. 굉장히 세고 거친 그림을 그려 보고 싶어요. 작가 이름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몰라볼 정도로 타격감 있는 그림. 마치 홍상수 영화를 보다가 <퍼시픽 림>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사실 연애물을 시작한 것도 ‘너 연애 이런 거 못하잖아’라는 소리를 듣고 ‘엇, 나도 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거예요. 다음 작품은 하드코어적인 느낌을 생각하고 있어요. 도끼 한 자루로 시작과 끝을 내릴 수도 있고요.

홍상수 영화를 보다가 <퍼시픽 림>을 보는 느낌이라, 무척 기대됩니다.

저도 제가 어디까지 극한으로 치달을지 궁금해서 못 참겠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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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엄지혜


eumji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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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만나는 황홀한 순간

『보보스』, 『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 신간. 날카로운 시선과 따뜻한 심장으로 세계와 인간을 꿰뚫어본 데이비드 브룩스가 이번에 시선을 모은 주제는 '관계'다.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와 만나는 순간을 황홀하게 그려냈다. 고립의 시대가 잃어버린 미덕을 되찾아줄 역작.

시는 왜 자꾸 태어나는가

등단 20주년을 맞이한 박연준 시인의 신작 시집. 돌멩이, 새 등 작은 존재를 오래 바라보고,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시선으로 가득하다. 시인의 불협화음에 맞춰 시를 소리 내어 따라 읽어보자. 죽음과 생, 사랑과 이별 사이에서 우리를 기다린 또 하나의 시가 탄생하고 있을 테니.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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