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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서 안 괜찮아 -연극 <가을 반딧불이>

가족의 화목, 한번쯤은 합의가 필요한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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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한 가정’이라는 추상적인 로망 때문에, 아버지는 가뜩이나 무거운 어깨를 내려놓지 못하고, 엄마는 하고 싶은 일을 언제나 포기하고, 자녀는 원치도 않는 일을 부모가 시켜서 하는- 이런 불필요하고 막대한 희생이 벌어지는 게 아니냐고, 연극 <가을 반딧불이>는 보여준다. 의도치 않은 사람들이 모여 한 식구를 이루고, 속마음을 감추며 ‘가족’답게 행세하려다 급기야 서로 감춰둔 패를 까고 직면했을 때, 비로소 이러이러한 관계를 맺자고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 그들은 진짜 가족이 된다.

복불복으로 주어지는 가족, 가족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우리가 맨 처음 참여하는 복불복 게임은 가족이다. 어떤 부모님, 어떤 가정 형편에서 태어날지, 우리는 누구도 선택할 수 없다. 당연히 주어지는 관계지만, 생각해볼수록 가족만큼 흥미로운 관계가 없다. 가족은 미래를 담보로 만들어진 집단이다. 가족은 수많은 약속과 다짐으로 형성된다. “행복하자. 행복하게 해줄게.” “이 아이를 잘 키워 보자.”

한 가족의 출발은 결혼식이라는 거창한 예식까지 동반한다. ‘잘 해보겠다’고 정말 큰소리치고 가족이 되는 거다. 헌데, 큰 소리 낸 사람치고 약속 잘 지키는 사람이 드물다. 부부만큼 뒤돌아서기 쉬운 관계도 없고, 가족만큼 허약한 관계망도 없다. 두 사람의 거대한 의지로 시작했지만, 사람의 의지란 쉽게 꺾이기 마련이고, 이후에 생겨나는 구성원은 아무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영입하는 거니까 말이다.

의지로 형성되었기 때문일까? 가족 구성원들은 때때로, 자신이 누군가의 행복을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에 빠진다. 이를테면, “너를 위해서 우리가 헤어지지 않는 거다.”라든지 “너를 이 집에 맡기고 가는 게, 못난 아비랑 사는 것보다 행복할 거다”라는 식의.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결정을, 어떤 사람들은 당사자 동의 없이 혼자 내린다.

아빠는 언제나 든든하고 의젓한 아빠여야 하고, 엄마는 언제나 헌신적이고 다정한 엄마여야 하는데, 착실한 아들딸이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는 가족과 솔직하게 대화하지 못한다. 그리고 짐작만 한다. 이렇게 서로 잘 모르니, 어긋나는 건 당연하다. 물론, 자기 입장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철없고 이기적인 가족도 있기 마련이다. 아들 다모쓰를 삼촌에게 맡겨두고, 슈크림 빵을 사오겠다고 거짓말을 한 채 젊은 여자와 달아난 아빠 분페이 역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아빠는 어렸고, 철없고, 이기적이었다.


“우리가 가족이라면, 이런 일은 의논했어야 하는 거 아냐?”


선착장에서 보트를 대여해주고, 국수를 파는 편의점을 운영하는 슈헤이. 그리고 그의 동생 분페이가 버리듯 맡기고 간 다모쓰는 삼촌-조카 사이를 넘어 부자지간처럼 끈끈하고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다. 여느 날처럼 선착장을 정비하고, 국수를 만들어 먹는데 불청객 두 사람이 찾아든다.

한 사람은 배를 대여해서 온종일 강 위에 가만히 떠 있는 수상한 샐러리맨 사토시, 한 사람은 슈헤이의 아이를 배었다는 전직 마담 마쓰미. 이 둘이 다짜고짜, 이 집에 머물겠다고 떼를 쓴다.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자, 그동안 평온했던 슈헤이-다모쓰 가족에게도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다모쓰는 낯선 불청객이 싫다. 아빠처럼, 형처럼 따르는 슈헤이와 예전처럼 둘이서만 살고 싶은데, 슈헤이는 마쓰미에게 맞춰주느라 쩔쩔매고, 사토시가 집안을 어슬렁거리는데도 그저 둔다. 다모쓰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다.

삼촌과 교제했다는 마쓰미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고, 최소한 집에 부르려면, 가족인 자신에게 먼저 상의했어야 했다고, 다모쓰는 생각한다. 어째서인지 삼촌 슈헤이는 이에 대해 시원하게 해명하지 않고, 그저 다모쓰에게 사과할 따름이다. 그래, 이 집은 원래 삼촌 집이었지. 나도 손님이었지. 다모쓰는 급기야 집에서 자신이 나가기로 한다.

다모쓰가 짐을 싸서 나가는 날, 이 집의 갈등이 폭발한다. 그저 다모쓰를 달래던 삼촌 슈헤이도, 다모쓰와 잘 지내보려고 내심 노력하던 마쓰미도 드디어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자기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상처를 꺼내놓는다. 너를 위해서, 혹은 나를 위해서. 온갖 이유와 변명으로 숨겨두었던 진심이다. 그때 비로소 식구들은 이 가정에 놓여 있는 갈등을 똑바로 보게 된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두려웠는지.


‘화목한 가정’은 우리 모두의 로망


그래서 속마음을 털어놓은 가족들은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서로가 아빠, 엄마, 삼촌, 조카, 계급장 떼고 약한 대로, 모자란 대로 본 모습을 보여줬을 때, 서로 감당이 되면 행복해졌을 것이고, 영 감당이 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헤어졌을 것이다. 어떻게 됐든 나쁜 감정을 지뢰처럼 매복하고 살 때보단 나아졌으리.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 실제 가족의 갈등이 연극이나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까닭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렇게 갈등을 정면으로 마주 볼 기회가 없어서. 서로의 속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놓는 순간이 없어서였다. 대부분 피한다. 부부유별, 장유유서의 유교 국가에서 과묵한 경상도 아버지가 구구절절 속마음 털어놓는 광경, 상상하기 어려운 가족이 분명히 있으니까 말이다.

가족은 화목해야 한다? 가족은 사랑해야 한다? 과연 당연한 얘기일까? 우리가 가진 가족의 상, 그것은 거저 주어진 예시일 뿐이다. 화목한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화목’이라는 개념을 가족 구성원들이 한번쯤은 합의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화목한 가정’이라는 추상적인 로망 때문에, 아버지는 가뜩이나 무거운 어깨를 내려놓지 못하고, 엄마는 하고 싶은 일을 언제나 포기하고, 자녀는 원치도 않는 일을 부모가 시켜서 하는- 이런 불필요하고 막대한 희생이 벌어지는 게 아니냐고, 연극 <가을 반딧불이>는 보여준다. 의도치 않은 사람들이 모여 한 식구를 이루고, 속마음을 감추며 ‘가족’답게 행세하려다 급기야 서로 감춰둔 패를 까고 직면했을 때, 비로소 이러이러한 관계를 맺자고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 그들은 진짜 가족이 된다.


삼촌 슈헤이는 다모쓰에게 “가족이란 거짓으로 이어진 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가족의 화목’ 같은 건, 당연히 모든 가족이 갖춰야 할 덕목이 아니라, 거짓으로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꼭 한번 실현하고 싶은 모두의 로망인 셈이다. 이 진실을, 연극 <가을 반딧불이>는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를 통해, 자연스럽게 지극히 일상적으로 전달한다.

<가을 반딧불이>는 최근 연극계에서 활발하게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재일교포 정의신 작가가 쓰고 김제훈 연출가가 연출했다. 조연호, 이항나, 배성우 등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띈다. 근원적인 가족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촘촘히 박혀 있는 웃음 코드에 객석에 쉴새 없이 폭소가 터진다. 심지어 암전과 암전 사이에 박수 세례가 쏟아져 나왔다.

‘가족이라서 괜찮아.’ 토닥거리는 위로가 아니라 ‘가족이라고 다 괜찮아?’라고 의문을 던지는 연극. 극장에서는 신나게 웃겨놓고,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스스로 답을 찾아보게 하는 연극. 무엇보다 따뜻한 연극이었다. 가족이 된 네 식구가 가을 반딧불이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마지막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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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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